일부(一夫) 선생의 향적산방(香積山房)
향적산방을 한 번 가봐야지.... 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뭔가 궁금하다는 마음이 생겨서 읽어보게 된 책 한 권으로 인해서였다.
이 책이 인연이 된 것은 아마도 한동석 선생의 《우주변화의 원리》 였을 게다. 제대로 된 뜻은 다 이해하지 못해도, 뭔가 그럴싸 해 보여서 나름대로 이해를 해 보려고 애썼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이해가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이미 이 책은 절판되었고, 누군가 중고의 가격으로 8만원을 매겨 놓은 책이라는 것을 검색해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혹시 시중에 아직도 유통이 되고 있는가 싶은 궁금증에서였는데 절판이 되었으니 서점에서 구입하기는 어렵겠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하튼.
책에 수록된 향적산방의 위치도이다. 그림도 참 잘 그렸다. 등고선까지 그린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같으면 인터넷의 지도를 실었을 것으로 짐작을 해 본다.
네이버의 지도를 보면 대략 이러한 위치쯤일 것으로 본다.
다만, 정작 표현하고 싶은 향적산방은 어딘가에 숨어서 보이질 않으니 실제로 책에다가 사용하려면 그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래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옳았겠다는 생각으로 끄덕끄덕~~
향적산방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흥미가 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했었던 것은 계룡산에 둥지를 틀기도 이전이었다. 그런데 계룡산에 자리를 잡은지도 20여 년이 흘러갔건만 아직도 못 가봤다는 것이 참.... 여하튼 마음은 그렇다. 아껴두고 싶었던 선망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지도를 보면 참 묘하게 생긴 길이다.
바로 산 너머에 있는 향적산방이기 때문에 지름길로 본다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한 중간에 금남정맥(錦南正脈)이 경계하고 있다. 사실 감로사의 뒷산이 금남정맥이라는 것도 불과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만 여하튼 편하게 가려면 적어도 계룡산 자락을 거의 한 바퀴 돌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전에 향적봉에 갔을 적에 향적산방도 가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가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 온 것도 인연이 아직 안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갑다 할 수도 있겠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연산으로 감을 사러 가자는 연지님. 그래서 가는 김에 향적산방을 가봐야 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묵혀 둔 숙제를 이제서야 하자는 마음이 순식간에 생겨난 셈이기도 하다.
위치로 보면 바로 산 너머가 되지만 산길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빙 돌기로 한 것이다. 수시로 출몰하는 돼지들로 인해서 혼자서 산행한다는 것도 여간 무섭지 않은데 동행할 사람도 없으니 핑계도 참 좋다.
자동차로 갈 수가 있는 곳은 무상사까지이다. 무상사는 좀 특이한 사찰이니 지나는 길에 들여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무상사는 외국에서 온 스님과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향적산방의 입구에 해당하는 향적산 자락에 가람을 세우고 수행자들이 머물고 있다.
숭산 스님은 외국으로 다니면서 포교를 하셨던 분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현각 스님도 이 분의 제자이고 미국에서 인연이 되었지.... 이 절은 언제 만들었는지 현판을 보면....
음.... 경진년이로구나.... 그럼 2000년. 대략 16년이 되었다는 이야기로구먼. 물론 그 이전부터 기초적인 터전을 잡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볼 수 있지 싶다.
더 위쪽에 있는 향적산방은 향적산이라고 했는데 더 아래에 있는 무상사는 계룡산이란다. 그렇다면 향적산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로군.
명산의 이름에 의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럼에도 일부 선생은 계룡산이라고 하지 않고 향적산이라고 하셨던가.... 지금도 지도에 따라서는 향적봉이라고도 하고 향적산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계룡산의 연봉으로 이어진 향적봉을 따로 향적산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계룡산의 전체 지형을 보면, 향적산이라고도 하고 별도로 국사봉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다음 지도에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향적봉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지만 향적산이냐 향적봉이냐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면, 따라가는 사람은 계룡산을 내세우게 되고, 독립적인 사람은 향적산을 내세우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본다.
일부 선생은 계룡산을 따르는 것, 그러니까 예전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 그래서 정역(正易)을 창시한 것으로 봐서 계룡산에 붙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향적산을 세우기로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근거는 없다. ㅎㅎㅎ
향적산방으로 가는 길은 무상사를 왼쪽에 두고 올라가면 된단다. 무상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소요시간은 대략 20분 정도 걸리지 싶다. 해찰하면서 올라가는데 대략 30분 이상 걸린 것을 보면. 여하튼 그렇게 저물어가는 가을의 풍경 속에서 산길을 오른다.
대체로 이정표에서는 국사봉으로 안내하는 팻말이다.
향적산방이 유명하기는 한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도 되었는데....
여하튼 올라 가봐야 한다.
시멘트로 보수를 한 것인지 승용차는 오르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인지 애매~한 모습의 길이 나타난다. 저렇게 가운데를 높여 놓으면 승용차는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사륜구동의 지프차만 올라갈 수가 있다고 하는 모양인가 싶다.
누군가 애써서 돌탑을 쌓아놓은 바위도 나타난다. 지루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길에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이런 사진은 기록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향적산방을 오르는 길은 이렇게 생겼노라고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까닭이다. 작품성은 아니지만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서 무심코 오르는 도중에 한 장씩 담아 본다.
은근히 가파르다. 아마도, 일부 선생께서도 좁디 좁은 산길로 오르내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는다. 진리를 생각하고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던 모습으로 이 산길을 올랐을 것이리라. 심심한데 일부 선생의 이력을 찾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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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金恒)
자 도심(道心), 호 일부(一夫) 1826년 출생, 1898년 사망 충남 논산에서 출생함.정의
1826(순조 26)∼1898. 조선 말기의 학자.
개설
자는 도심(道心), 호는 일부(一夫). ≪정역 正易≫의 저자이다. 충청남도 논산 출신. 어려서부터 덕기도골(德器道骨: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로 모습이 비범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리학에 깊이 침잠하고 예문(禮文)에 조예가 깊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20세 때 민씨(閔氏)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으나 살림에는 뜻이 없어 독서만 하였으며, 영가(詠歌:창가)를 계속 불렀다. 일찍이 이운규(李雲圭) 밑에서 최제우(崔濟愚)·김광화(金光華)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특히 이운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운규는 어느날 최제우·김광화·김항 세 사람을 불러놓고, 최제우와 김광화는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그 일을 잘 하라고 당부하고, 김항은 공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크게 천시(天時: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를 받들 것이라고 하였다.
1879년(고종 16)이운규가 전해준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뜻을 19년 동안의 노력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그의 수양방법은 ≪서전 書傳≫의 정독과 다독, 그리고 영가와 무도(舞蹈:춤추는 것)로 인한 정신계발이었다.
그 뒤 그에게 이상한 괘획(卦劃:주역의 기본이 되는 그림)이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기력이 쇠한 탓인가 생각하였으나 점점 뚜렷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그렸는데, 그것이 곧 <정역팔괘도 正易八卦圖>였다.
팔괘의 명사(命寫)가 끝나자 공자의 영상이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렇게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면서 무한히 찬양하고, 호를 ‘일부’로 하라고 하였다. 이 때가 1881년이었고, 그 해에 ≪대역서 大易序≫도 얻게 되었다.
1885년≪정역≫을 완성하였는데, 그 무렵 논산시 연산면 도곡리국사봉(國師峯)으로 옮기자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정역≫을 공부하였고, 뒤에 이들이 일부계 신종교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였으며, 혹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기보다는 타일렀고, 틀렸다고 지적하기보다는 좀 덜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그로써 그의 천성이 온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 낮잠을 잔 일이 없고 밤에도 거의 앉아서 지냈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주역≫을 한국식으로 풀이하여 체계화한 한국역학의 대가였다.
참고문헌
- 『정역연구』(이정호, 국제대학 인문과학연구소, 1976)
관련이미지
정역조선 말기의 학자 김항(1826∼1898)이 저술한 역서.1885년. 정역의 사상은 선천.후천 사상과 일월개벽사상, 신명개벽사상으로 구성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김항 [金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렇게 호젓한 산길을 오르다 보니, 중간에 안내판이 나타난다. 얼마나 남았는가 싶던 차에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산길에서의 일상사이다.
연화사로 가는 길이 있고, 그 옆에는 석비가 서 있다. 뭐라고 써놨노.....
아산학회정신수련도장이라.....
아산학회라면 아산 선생의 배움을 익히는 모임인가 싶다. 아산(亞山) 김병호(金炳浩)선생님의 아산학회(亞山學會)에서 이곳에다가 수련원을 세워서 공부하는 학인들의 수행처로 삼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역시 주역의 명사(明師)가 출현하신 향적산방의 입구에 썩 어울리는 이름인가 싶다.
그런데, 왼쪽의 연화사가 그곳이라는 의미인지 더 올라가면 그러한 곳이 나온다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연화사라는 곳을 들어가 봤지만 아산학회의 이름을 유추할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이다. 천성이 수줍은 낭월이라서 문을 두드려서 확인을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은 까닭에 그냥 슬쩍 둘러보고는 길을 재촉했을 뿐.
저 앞에 고개가 보인다. 몸이 평지에 적응해서인지 그것도 산길이라고 조금은 숨이 찬다. 운동부족이라고 자책하면서도 걸음을 늦춰서 천천히 올라간다. 서둘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미끄럼 방지용으로 트랙터 바퀴를 깔았나? 여하튼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오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이 날 이 시간에 낭월이 향적산방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
문득,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김영갑 선생 책 이름이 떠올라서 자화상을 한 장 남겼다. 그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남는 것은 사진 뿐인고로. ㅎㅎㅎ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토굴집인가 싶었는데 화장실인가보다. 그 말은 향적산방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허름한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이 오늘의 목적지인 향적산방이다. 나이를 꽤 먹어 보이는 나무가 수문장처럼 보인다.
서각이 걸려있다.
[일도중(一道中)]
'하나인 도의 한 복판'이라는 뜻일까? 알듯말듯 한 글귀를 되뇌이면서 옆으로 돌아가 본다. 아마도, 향적산방은 수행처가 아니라 개인의 집인 모양이다. 그래서 함부로 휘젓고 다닐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다. 그냥 살금살금 둘러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하다.
기도하는 곳 답게 촛불을 켜는 장치가 여기 저기 되어 있고 여전히 꺼지지 않은 촛불이 있는 것을 보면 기도객은 끊이지 않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위굴이 나타난다. 여기가 아마도 향적산방의 핵심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촛대며 향로와 청수잔이 있는 것으로 봐서 기도를 하는 곳인 것 같다. 아마도 옛날 그러니까 150여 년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부 선생이 명상에 잠겨서 천지의 이치를 궁구하시던 공간이려니 싶은 생각에 새삼 엄숙해지는 마음이다.
배례를 하고는 석굴 입구에 앉아서 마음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났다.
이렇게 앉아서 하늘과 땅을 관하면서 천지 자연의 이치를 관조하셨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그 날의 모습은 어떠했을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고인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답사 여행의 즐거움이다.
정역의 팔괘도가 어떻게 얻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정역과 일부》에 설명이 되어 있으니 그 부분을 폰으로 찍어서 소개한다.
글씨가 작아서 안 보이면 마우스로 클릭해 봐도 된다. 다만, 한 번 클릭하면 비슷하게 보이는 화면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다시 클릭하면 큼직한 글씨로 보이니 참고 바란다. 다만 원문에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으시기에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간단히 정리한다.
그러니까, 공부 중에 눈 앞에 이상한 환영 같은 것이 보이셨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체력이 떨어져서 헛것이 보이는가 싶어서 고기도 먹고 힘을 길러 봤지만 그 영상이 없어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또렷하게 드러나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다시 정밀하게 살펴보니까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괘상의 모습인지라 주역을 다 뒤져봐도 이러한 괘상은 발견을 할 수가 없어서 도대체 이게 뭔 소식인가.... 하고 고심하다가 설괘전에서 한 구절을 발견하고서야 또한 하늘의 계시인가 보다 싶어서 조카뻘 되는 제자에게 그대로 그리게 하였더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팔려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가 싶기도 하다. 지금도 그 대목은 선명하게 떠올라서 말이다. 하늘에서 간지(干支)의 이치도 이렇게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부러움도 함께 포함해서 당시로는 참으로 환상적인 이야기로 신기하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선생이 공부하셨던 자리에 앉아 있으니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황홀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상쾌해졌다. 문득 눈 앞에 뭔가 보이는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 본다. 이게 뭐지....????
앗~!!!
바로 그 일부 선생의 정역도잖아~~~!!!
물론, 상상이 환상이 되어서 현실과 몽상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낭월의 꿈이었다. 그래서 포토삽의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허공에다가 정역팔괘도를 나타내 봤다. 아마도 일부 선생도 이렇게 보였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얼마를 앉아서 황홀한 고인의 향취에 잠겼다가 일어났다. 이미 사방은 어둠에 잠기려고 하는 땅거미가 짙게 내린다. 동북향의 그늘에 나무 숲까지 겹쳐서 아직 해가 넘어갈 시간은 아니지만 카메라의 빛 감지기는 자꾸만 어둡다고 비명을 질러 댄다.
옆으로도 공부방으로 보이는 한 채가 있었다.
공부하는 곳이니 일할머리 없이 들랑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안내판이 덩그렇게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오래 전에 들려보겠다고 생각했던 숙제를 마쳤다. 막상 둘러보니 개인의 집이 되어버려서 조금은 아쉬운 감도 있었지만 또한 인연법이겠거니 싶었다. 이렇게 한 마음이 일어나면 쉬운 것을 20년이 넘게 찾아나서지 않은 것도 참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무엇이든 미루지 않는 낭월임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명학자(命學者)의 길과, 역학자(易學者)의 길이 달라서일 것이라는 생각도 하산길에 슬며시 든다. 팔괘(八卦)의 역리나 간지(干支)의 명리나 모두 다 같은 고인의 지혜이지만 명리학과 역리학의 구조는 분명히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학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논하고, 명학은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고 할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은 서로 음양의 이치를 갖고 있는 학문인지라 간지학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음의 학문이고, 팔괘학은 외향으로 나아가는 양의 학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천시(天時)를 논하고, 명리에서는 인성(人性)을 논하는 것이 학문의 특성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학은 음양학의 뿌리가 되고, 명학은 오행학의 뿌리가 되어서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음양은 고정된 틀이 없기에 변화(變化)를 체로 삼아서 천지의 이치를 궁구하게 되므로 변화하는 것은 길하다고 하고 불변하는 것은 불길하다고 보는 것이고, 오행은 고정된 틀이 있기에 조화(調和)를 체로 삼아서 인생의 이치를 궁리하므로 안정과 균형은 길하다고 하고 불안정과 불균형은 불길하다고 하지만, 두 진리가 만나는 곳에서는 추길피흉(追吉避凶)의 목적이 있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결과가 있으니 서로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목적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둘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간지의 공부를 웬만큼 해 놓고서 여력이 된다면 팔괘에 대한 공부도 해 봐야 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어 본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선천역과 후천역, 여기에 정역까지 두루 이해를 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어둠이 깃든 향적산? 계룡산? 여하튼 호젓한 산길을 걸어 내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