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2 · 금요일
낭월명리학당 一念卽是無量劫 -순간을 영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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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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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행

청도 사리암(邪離庵)

청도 사리암(邪離庵)

청도 사리암 전기(邪離庵 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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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사리암은 비교적 덜 알려진 기도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암은 많이 알고 있어도 사리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면 이참에 알아두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리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릴 참이거든요. 어쩌면 기도를 좀 해 보셨다는 벗님은 들어봤음은 물론이고, 직접 가서 기도를 하셨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처에 대한 순위를 매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5위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팔공산 갓바위에 이어서 운문사 사리암을 꼽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은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1. 오랜만에 찾은 사리암


아마도..... 십 년은 더 되었지 싶습니다. 모처럼 사리암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운문사의 은행나무가 하도 곱다고 하기에 청도 나들이를 한 김에 둘러보려고 했던 것인데 일행이 사리암을 가보자고 하는 바람에 일정이 길어지게 된 것이지만 또한 하늘의 뜻이려니~ 합니다. 왜냐하면 운문사까지 가서 사리암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경주에 가서 불국사를 안 보고 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맘을 내지 못하는 것은 길이 좀 험하다는 것 뿐입니다. 여하튼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운문사-1

청도읍에서도 운문사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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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무슨 산에 있느냐고 물으면 얼른 답하는 말이 "운문산~!"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보통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하네요. 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에 운문산이 있더란 말이지요.

그러나 정확히 알아 두려면 호거산(虎踞山)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호랑이가.... 엉? 호거산(虎居山)이 아니네? 예, 그렇습니다. 낭월도 대충 생각할 적에는 호랑이가 사는 산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세히 보니까 웅크릴거(踞)로구먼요. 그러니까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짐작컨대, 처음에는 운문산이라서 운문사라고 했지 싶습니다. 그런데 따라하기 싫은 어느 화상이 운문사의 주변은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세라는 핑계같지 않은 핑계를 대면서 호거산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듣고 보니까 독립성이 보여서 그냥 절에서만 사용하는 산의 명칭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해 보리암은, 금산(錦山) 보리암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정도전의 잔꾀에서 나온 이름이고, 원래는 원효가 붙인 이름을 오래도록 사용해서 보광산이라고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상황에 따라서 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야 늘 있어왔던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로 가장 큰 규모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다만 오늘의 주제는 운문사가 아니라 사리암이므로 그냥 지나치겠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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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왔더니 벌써 길 모양새가 달라졌네요. 깔끔하게 포장을 했습니다.

운문사-2

그것도 예전에는 걸어서 가야 했던 길의 2.3km를 차로 갈 수가 있게 되었군요. 길은 있어도 비포장이어서 울퉁불퉁 했었는데 일단 맘이 푸근해 집니다. 이것은 게으른 중생의 나태함이라고 해도 되지 싶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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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사리암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도 넓직 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객들이 찾아오는지 대충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만, 특히 이 날은 11월 11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엄니들이 애를 태우는 수능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리암이 보이는데..... 찾아보시지요.

운문사-3

사리암이 까마득하게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위에 보면 하얀 건물이 살짝 보일 겁니다. 그것이 사리암입니다. 잘 안 보이시는 벗님께서는 한 번 사진을 클릭하고, 그래도 잘 안 보이면 한 번 더 클릭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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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준비되어 있는 지팡이가 눈길을 끕니다. 예전에는 갓바위에도 많이 있었던 지팡이인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여기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을 못했군요. 그만큼 길이 가파르다는 의미라고 보면 틀림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을 적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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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경사진 길이 나그네를 제압하네요. 그래도 한 발 한 걸음 옮기는 만큼 길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눈은 아이구~ 저길 언제 가나~~ 하고 있는 사이에 발은 자꾸만 움직이게 되고 그래서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에도 천천히 걸을 착(辶)을 써놨던 것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서두르면 망치는 것이고 느긋하게 꾸준히 하면 이룰 수가 있는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고, 늙은 쥐가 항아리를 뚫는 법입니다. 쉬 달궈진 남비는 빨리 식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도 떠오르네요. 여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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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아무리 떠들어 봐야 길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올라가야만 해결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천천히 올라갑니다. 바쁘게 서두를 나이도 아니잖아요. 그렇잖아도 가을의 풍경이 아직도 그대로이니 음미도 하면서 그렇게 오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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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험하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예전에는 비탈길에 경사가 하도 심해서 줄줄 미끄러지면서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갔던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깔끔한 손질을 한 길이니 역시 길을 잘 닦아야 한다는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이 가볍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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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는 색다른 현수막도 만나게 되네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린 돌을 주워다가 탑을 쌓았으면 이런 글을 붙여놓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냥 둬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길가에 쌓아놓은 돌이 굴러떨어지면 행인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평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점으로 인해서 이런 글귀를 붙여놓았으리라는 짐작을 해 봅니다. 그 바람에 쌓아놓은 돌은 보이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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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도하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군요. 사진이 흔들렸습니다만, 길만 보여드리기도 심심해서 그냥 끼워 넣었습니다. 이 사진은 확대하지 말고 그냥 보시기를 바랍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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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 해 놓은 길이니 편안하게 걸을만 합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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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상태를 보니까 한 3년은 되었지 싶습니다. 마침 올라가다가 난간을 수리하는 사람이 있길래 콘크리트 도로 한 지가 3년은 되어 보인다고 했더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ㅋㅋㅋ~ 그냥 감이지요.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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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를 떨다 보니까 어느 사이 사라암이보이네요.

벌써 규모가 엄청 납니다. 많은 불자들의 소원이 쌓여서 이뤄진 결과물이라고 봐도 되지 싶습니다. 예전의 모습은 떠올리면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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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준비를 하시는 모양입니다만, 지팡이를 둘이나 짚고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힘이 드셨던가 보네요. 그리고 1천배라도 하고 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할테니 지팡이가 왜 필요한지 더불어 이해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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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길에 공식적인 역사도 훑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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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위로 향했더니 아지매들이 자신들 찍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사리암에 와서 사리암을 안 찍어가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비로소 올려다 보고서는 자신들도 폰을 들어서 찍느라고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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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손님들 치닥꺼리를 하는 젊은 친구도 요령소리가 나도록 바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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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나반존자 님의 전각이 보입니다.

소문에 비해서 참으로 작고 아담한 전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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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러니까 21세 무렵인가......?

거의 40년 전에 저 곳(중간 오른쪽에 석등 하나 보이는 자리)에서 100일 기도를 했던 인연처입니다. 여름에 시작해서 가을이 깊어질때까지 나반존자님을 좀 뵙고 싶어서 판을 벌였었지요. 그렇게 한 인연은 존경하는 사조이신 경봉 선사의 경험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되지 싶습니다. 이제부터가 사리암 전기입니다. 많이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하하~


2. 사리암과 경봉 선사의 기연


아득한 옛날입니다.

경봉 선사께서 통도사 주지를 하면서 학인들과 선객들을 제접할 시절의 일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오래 된 일이라서 약간의 오류는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어느 선지식께서 경봉 선사에게 한 마디 한 것이 가슴에 박혀서 주지를 사임하고는 죽기를 작정하고 쌀 한 말 짊어지고 이 자리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 쌀을 다 먹고 나면 굶어 죽어버릴 작정을 했더랍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공양주를 하던 시절에 직접 경봉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니 그야말로 육성체험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책에서 읽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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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 아래에 움막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라암입니다. 그야말로 혼자 기거하면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토굴이라고 해야 알맞을 공간이었겠습니다. 아마도 짐작컨대, 나반존자님도, 굴의 한쪽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렇게 근사한 전각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을 시절이었다고 본다면 말이지요. 오가는 행인도 없는 적막강산이었을 뿐입니다.

하루 종일 나반존자를 기도하고 염하고 외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 얼마 간의 쌀은 바로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겠네요. 경봉 스님이 덩치도 거구시거든요. 많이 먹어야 유지가 되는, 생존에는 매우 불리한 몸의 구조라고 할 수 있겠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느냐는 생각은 미뤄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만기보다 더 장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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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끼만 해 먹고 나면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다지요.

그런데 설겆이를 하고 있으려니까 산 아래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내다보니 할머니 두 분이서 쌀을 한 말씩 이고 험한 길을 올라오시더라네요. 정성껏 불공을 해 드리고 아사를 면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천일의 기도를 채울 수가 있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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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에서 나반존자님이 붓을 세 자루 주시더랍니다.

너는 글로써 교화해라 라는 뜻이었던가 봅니다. 그 후로 경봉 스님의 글만 보면 다들 좋아해서 참으로 많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유일한 그림도 한 폭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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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입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기도를 마치는데 문 앞에서 수백명의 대중이 동음으로 나반존자를 외치더랍니다. "앗, 큰 절의 나한님들이 오셨구나~!"하고 문을 확 밀치니 금새 그 소리는 언덕 밑에서 들리더라는 군요.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었던가 싶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서 운문사를 들리니까 절은 폐사가 되다시피 하고 오백나한전은 비가 새고, 나한님들의 옷은 비에 퇴락해서 목불인견이었더랍니다.

'아하~ 나한님들이 옷을 입혀 달라고 올라오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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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걸망을 내려놓고 전국 본사로 통보를 해서 운문사 재건불사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운문사에서는 경봉 스님이라면 껌뻑 죽을 정도였다고 하겠네요. 실은 그 덕분으로 낭월도 남자의 몸으로 비구니 암자에서 100일이나 머물 수가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큰사람의 덕은 어디서나 보게 되는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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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기까지만 해야 사리암 전기에 합당하지 싶습니다. 다시 오백나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면.... 아마도 오늘 중으로 끝내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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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께서 불사를 하시려고 보니까 연기문이 필요하더랍니다. 연혁을 말합니다. 언제 누가 건물을 짓고 수리하고, 등등의 내용 말이지요. 그런데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아 볼 수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문득 맨 앞 줄의 세번째 나한님이 눈에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반짝 들어올리니까 그 속에서 모든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 졌던 것이지요. 기도를 많이 하면 그 정도의 신통력 같은 혜안이 생기는가 싶기도 합니다. 또한 직접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알게 되었지요.


3. 나반존자(那畔尊者) 의 전기


이제 사리암에 주인공이신 나반존자에 대한 전기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나반존다는 불타의 생전에 큰 제자 중에 하나인 빈두로 존자의 중국식 이름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빈두로 파라타 존자인데 신통력을 부리다가 부처님께 꾸지람을 듣고 멀리 교화하러 가라는 명을 받았다는 설이 있는 이야기를 다음 블로그에서 가져왔으니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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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oneupvajra/446



사분율(四分律)』에서

 옛날 수제가 장자(長者)는 전단 발우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높은 상아말뚝 위에 달아 놓고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사다리를 놓지 않고 이것을 취할 수 있으면 그에게 이것을 주리라" 했다. 외도들은 이 말을 듣고 신통을 부리려 했으나 되지 않아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빈두로(賓頭盧)가 이 말을 듣고 목건련에게 물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답하였다.    "사실입니다."    빈두로는 말하였다.    "당신은 사자후(獅子吼)가 제일이니 곧 가서 그것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목건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려워해 그것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빈두로는 곧 그 집에 가서 선정에 들어, 자리에 앉은 채 팔을 뻗어 그 발우를 취했다.   "그 때 종광(縱廣)이 극히 큰 방석(方石)에 앉아 몸을 공중에 날려 발우를 취해 가지고 돌아갔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꾸짖어 '왜 비구가 외도의 발우를 가지느냐, 또 계를 받지 못한 사람 앞에서 신통을 부리느냐?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너를 물리쳐 이 염부제에서 살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다. 이리하여 빈두로는 부처님의 명령을 따라 서방의 구야니에 가서 4부(部) 대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폈다. 염부제의 4부 대중은 빈두로를 사모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돌아옴을 허락하셨으나, 앉아서 신통을 부렸기 때문에 열반에는 들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명령하여 말세의 4부 대중을 위해 그들의 복밭이 되게 하시고, 그도 스스로 맹세하여 '이 3천하에서 누구든지 청하면 다 가리라' 하였다."  

 

 

 

『청빈두로경(請賓頭盧經)』에서

 

 

 

 "천축(天竺)의 우바새와 국왕과 장자 등은 일체의 모임을 열 때는 항상 빈두로 파라타서(賓頭盧頗羅墮誓) 아라한을 청하였다. 빈두로는 그 이름이요 파라타서는 그 성이다. 그는 수제(樹提) 장자를 위하여 신통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꾸짖고 열반에 들지 못하게 하시고는 그에게 명령하여 말세의 4부 대중을 위해 그들의 복밭이 되게 하셨다. 그를 청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 향을 사르고 예배한 뒤에 천축의 마리산(摩梨山)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대덕 빈두로 파라타서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말세 사람들의 복밭이 되었으니, 내 청을 받아 여기서 이 공양을 잡수십시오'라고 한다. 또 새로 집을 지었을 때에도 '내 청을 받아 이 집 침대 위에서 주무십시오' 하고 청해야 한다. 또 여러 스님들을 두루 청해 목욕할 때에도 '내 청을 받아 여기서 목욕하십시오' 하고 청해야 한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향탕(香湯)과 회수(灰水)·조두(?豆)·양지(楊枝)·향유(香油) 등을 살펴보고 차고 더움을 조화시켜 사람이 목욕하는 법과 같이 하고는 문을 열고 그를 들어오게 한 뒤에 문을 닫는다. 사람이 목욕을 마칠 때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여러 스님이 들어간다. 무릇 모임에서 음식을 먹고 목욕하려 할 때는 반드시 모든 스님을 청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해탈을 구하되 의심하지 않고 정신을 똑똑히 차리며 신심이 청정한 뒤에라야 비로소 그가 내려올 것이다.    근세(近世)에 어떤 장자는 빈두로 대아라한이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말세 사람들의 복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여법하게 대회를 베풀고 지극한 마음으로 빈두로를 청하였다. 담요 밑에 좋은 꽃을 두루 펴고 그를 시험해 보려 했다. 대중의 공양이 끝나고 담요를 들어 보았더니 꽃이 다 누렇게 시들었다. 그는 오뇌하고 스스로 꾸짖으면서 그 허물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다시 정성을 다해 경사(經師)에게 자세히 물은 뒤에 또 대회를 베풀고 전처럼 보시했다. 꽃은 또 다시 시들었다. 그는 또 집 재산을 다 털어 다시 대회를 열었으나 그 꽃은 여전히 시들었다. 그는 오뇌하고 자책하면서 다시 1백여 명의 법사를 청해 그 과실을 알리고 참회하며 사죄했다. 그 때 그는 상좌(上座)의 한 노인을 마주하고 사방에 알려 그 허물을 사과했다.    상좌의 노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세 번 나를 청했고 나는 네 청을 모두 받았다. 그러나 너는 종을 시켜 문에서 나를 막았고, 또 내가 나이 늙고 옷이 해졌으므로 배척을 당한 뢰제 사문(賴提沙門)이라 생각하고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네 청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들어가려 했다. 네 종은 지팡이로 내 머리를 때려 깨지게 했으니, 내 이마의 오른쪽 상처가 그것이다. 둘째 번에 왔을 때도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억지로 들어가려다가 또 머리를 맞았으니 내 이마 가운데 상처가 그것이다. 셋째 번에도 또 왔으나 여전히 머리를 맞았으니 내 이마 왼쪽 상처가 그것이다. 네가 한 짓인데 오뇌하면 무엇하겠느냐?'    말을 마치자 그는 곧 사라졌다. 장자는 비로소 그가 빈두로임을 알았다.    그 뒤로는 아무도 공양을 차리고 청할 때에 감히 문을 닫지 않았다. 만일 빈두로가 와서 그 자리에 앉게 되면 꽃은 시들지 않는다. 새로 집을 짓고 평상을 만들고 빈두로를 청하려 할 때는 다 향탕(香湯)을 땅에 뿌리고 향유(香油) 등불을 켜고 새 평상과 새 담요 위에 솜을 털어 깔고 그 위에 흰 비단을 덮는다. 그리고 초저녁에 여법하게 청하고는 다시 문을 닫은 뒤에는 삼가 함부로 엿보지 말지니라. 그리고 모두가 각각 지성으로 그가 반드시 온다고 믿으면 그 지성에는 감동되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그가 왔을 때에는 요 위에 누웠던 곳이 나타나고 욕실(浴室)에도 탕수(湯水)를 쓴 흔적이 나타난다. 대회의 청을 받았을 때는 혹은 상좌(上座)에 있고 혹은 중좌(中座)에 있으며 혹은 하좌(下座)에 있다. 어디서나 스님의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들이 그 이상한 점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한다. 그가 떠난 뒤에 그가 앉았던 자리에 꽃이 시들지 않는 것을 보고야 그가 왔던 것을 안다."    요새 재(齋)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법에 의하지 않고 다만 인정(人情)을 좇아 시행한다. 범인은 부처님과 성승(聖僧)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미 앞의 경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시주(施主)는 먼저 불당을 깨끗이 소제하고 성승이 앉을 자리를 안치해야 한다.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한 뒤에 좋은 향을 피우고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며 온갖 꽃을 뿌린다.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고 우러러 3보 및 성승을 받들어 청하고 시방 법계의 모든 범부와 성인도 다 두루 청한다. 그리고 "제자의 청을 받아 성의(聖儀)를 굽히어 집으로 와서 왕림하십시오" 한다. 온 집안의 노소들은 다 정성을 다해 7일 전부터 미리 이렇게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다. 만일 집이 가난하여 좋은 향과 꽃이 없고 또 그 자리를 만들 만한 곳이 없으면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 처리한다. 성승이 앉기 전에 미리 아주 좋은 곳에 부처 자리를 안치하고 법에 맞게 물을 뿌리고 청소한다. 그 다음의 좋은 곳에는 성승이 앉을 자리를 만들고는 부드럽고 새로운 희고 깨끗한 것을 깔고 그 위에는 솜을 편다. 만일 시주가 마음으로 존중하고 느낌이 있어서 공양을 마치고 그 자리를 볼 때, 사람이 앉은 흔적이 있으면 보신(報身)이 온 줄을 알고 그런 흔적이 없으면 그것은 화신(化身)이 온 것이며 만일 시주가 마음으로 완전히 경시하고 태만했으면 보신도 화신도 모두 안 온 것이다.    그 자리에는 채색 그림이나 찬란한 비단이나 금은 등 온갖 장식 및 꽃을 흩거나 두지 말라. 그가 비록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범승(凡僧)과 같이 250의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온갖 비단이나 금은 등의 물건은 받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부처나 보살 등 대성으로서 출가한 사람의 상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면 그 때문에 갖가지 공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성승을 자리에 앉히고 공양을 드릴 때에도 그 자리가 6척 이상 높으면 안 되며 6척 이하의 법다운 승좌(僧座)면 좋다. 또 성승의 소상(塑像)을 그 자리에 앉혀도 안 되나니, 혹 보신(報身)이 스스로 오더라도 어찌 그 소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겠는가. 또 절에 항상 있는 스님의 그릇에 공양을 담아도 안 되나니, 보신이 와서 접촉할 수 없는 스님의 깨끗한 그릇의 공양을 먹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만일 발우나 속인들의 소반으로 드리면 그것은 화신과 보신에 다 통하는 것으로서 가장 법다운 것이다.    만일 성승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 있어서 돈이 들어와 성승을 위해 쓸 때는 그것을 발우나 수저·구리단지·수건 등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아주 좋은 소반이나 그릇을 사서 그 등에 주서(朱書)로 글자를 적어 두어, 다른 사람이 감히 잡스럽게 쓰거나 아무 집에서나 날마다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침과 점심때마다 그것에 음식을 담아 항상 부처님과 스님에게 드리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남는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호상(胡床)과 하나의 유단(油單)을 사서 쓰고 공양을 마치면 그릇은 조두(?豆)로 깨끗이 씻어 호상 위에 두고 유파(油巴)로 덮어둔다. 날마다 따로 이런 표시로 3보께 공양하는 마음이 항상 끊이지 않으면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만일 많은 돈을 얻었으면 서국(西國)의 사법(寺法)과 속인들의 집처럼 아주 고용하고 좋은 곳에 성승을 위해 방을 만들고 4시(時) 중에서 겨울과 여름을 따라 갖가지로 공양한다. 여름철에는 방 안에 날마다 따로 좋고 깨끗한 자리를 깔고 홑속옷과 구리단지·구리병·조두(?豆)와 깨끗한 수건을 준비하고 오전에는 음식을 드린다. 밤에는 등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마음과 힘을 따라 여법하게 공양한다. 겨울이 되면 두터운 옷과 담요·숯불·더운물·등불 등을 두고 때를 따라 공양한다.    혹 성승의 돈으로 남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항상 절에 있는 스님이나 내지 다른 스님이 써서는 안 되며 또 불법에 써서도 안 되며 또 그것으로 다른 성승의 형상을 지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성승의 돈으로 불상을 채색으로 그리거나 성승을 4벽(壁)에 그리거나 가섭·아난 등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빈두로는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승의 부촉과 진지(進止)를 얻을 수 없거늘 어찌 함부로 그것을 호용(互用)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사로이 썼으면 반환해야 하고 반환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분율(四分律)』에서 "이것에는 허용되지만 다른 것에 쓰면 죄를 짓게 된다"고 한 것이다. [남의 것을 자기 것처럼 써서 자기와 남을 불문하고 예사로 다른 데 쓰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이상에 말한 것은 다 경율(經律)의 성의(聖意)에 의해 적은 것이니, 이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3보의 물건은 귀중한 것이어서 호용(互用)할 수 없는 것이니 털끝만큼의 차이가 천리의 벌어짐이 될까 두렵다. 그러므로 양무제(梁武帝) 때에 대덕(大德)과 영유(英儒)들이 다 함께 서역(西域), 삼장(三藏)을 청해 『찬집성승법용(簒集聖僧法用)』을 다섯 권으로 번역해 내었던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도 다 그대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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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나반존자의 신통력


인용한 내용 중에서 수제장자에게 신통력을 발휘했다가 외도들의 빈축을 사고 부처님께 혼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을 하면, 설화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원래 실화보다 설화가 더 재미있거든요. 물론 없는 이야기는 아니므로 사기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하~

하루는 수제장자가 빈두로, 그러니까 나반 존자를 공양에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수제장자의 집으로 방문을 하게 됩니다. 점심 대접을 잘 받고, 후원을 거닐다가 마당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신통력으로 날려보냅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왔는데 부처님께서는 살인을 하고 왔다고 호통을 치시더라지요. 홀로 명상에 들어서 비디오 테이프를 되돌려 보니까, 그 바위가 날아갈 적에 임신한 여인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바위를 보고는 놀라는 바람에 낙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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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진 몰라도 독성각, 나반존자를 일명 독성(獨聖)이라고도 하므로 그렇게 부릅니다. 독성각은 항상 이렇게 산고랑 바위 틈사이에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서 부처님의 처소를 떠나서 멀리 홀로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열반에 들게 되자 중국의 천태산으로 옮겨서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는데, 특히 아이가 없어서 열망하는 여인들의 소원을 최우선적으로 들어준다는 발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남기도를 하러 갈 사람은 나반존자가 계시는 곳으로 간다는 말도 생기게 된 것이지요. 물론 어찌 생남기도만 들어주겠느냐는 점은 미뤄서 짐작을 해 볼 수도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다시 위에 나반존자 전각의 현판을 보시면 왜 『천태각(天台閣)』이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될 것으로 봅니다.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에 들었다는 의미로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일설에는 빈두로 존자와 나반 존자 사이에는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은 학자들의 소일꺼리로 냅두고 그냥 그 양반이 그 양반이겠거니 하면 된다고 봅니다.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으면 맞다고 생각하고 속편하게 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행복하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5. 마무리


이렇게 해서 운문사 사리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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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전국에서 각기 마음 속에 소원 한 가지씩을 품고 온 나그네들을 옮겨온 신발들입니다. 주인이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동안 신발들도 밖에서 같은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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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의 소원이 뜻과 같이 이뤄지기를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지나는 길이 있으시면 잠시 들려서 인연을 맺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5년 11월 13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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