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⑰ 수토역사전시관(搜討歷史展示館)
(방문일: 2026년 6월 1일 월요일)

수토사역사박물관이 태하에 있다. 성하신당에서 바로 지척이기도 하다.

거리는 0.3km이고 시간은 1분이다. 여행자에게는 이런 사소한 정보도 도움이 될 수가 있지 싶어서 캡처해서 자료를 추가해 놓는다.

건물도 웅장하게 지었다.

관광객들이 연신 들어가고 있으니 울릉도에서 필수코스라고 봐도 되지 싶다. 역사공부니까 좀 지루해도 자료를 갖춘다고 생각하고 긴 설명이지만 사양하지 않고 텍스트로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어떻게라도 쓰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이 급해서 수토사 각석문을 생략했네. 임오명각석문을 봐서 그걸로 퉁칠 생각을 한 것이기도 하다.

마당에는 큼직한 수토선의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노를 세어 보니까 여덟 개구나 양쪽에서 16명이 열심히 젓는다는 말이겠네. 망망대해를 노질을 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감이 있었겠지. 바람의 힘으로 배를 움직여야지 노의 힘으로 동해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영화 벤허였나? 범선을 노질하는 생생한 영상이 있었는데...





수토의 사전적 의미는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의미지만, “자세히 점검한다”는 의미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나 중국 선박이 주로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출몰했으므로 이들을 토벌할 필요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동해안 어민들이 울릉도를 왕래하고 일본인들도 울릉도에 출몰했으므로 이들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울릉도에 나타난 우리 어민과 일본인을 찾아내 본토로 돌려보내고 섬을 관리하는 것을 수토라고 표현했다.
울릉도 쟁계
조선은 초기부터 쇄환정책을 실시했음에도 동해안 연해의 어민들은 울릉도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부단히 왕래했으며 일부는 울릉도에 거주하기도 했다. 일본인들도 이른바 도해면허를 빌미로 울릉도에 와서 전복을 채포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가 숙종 대에 양국인이 섬에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693년 울릉도에는 40여 명의 조선인들이 어로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어민에게 납치당해 일본으로 연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두 사람을 조선으로 송환할 때 첨부한 외교문서에서 조선인의 출어 금지를 요청했고, 이로 말미암아 양국은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논전을 벌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라고 불렀고, 일본은 ‘다케시마 일건(竹島一件)’이라고 불렀다. 1693년에 시작된 쟁계는 1696년 일본 에도막부가 자국민에게 도해금지령을 내리고 1699년에 이 사실을 조선 정부에 정식으로 알려옴으로써 결착되었다.
조선 전기의 해양영토정책, 쇄환정책
우리나라 도서島嶼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책은 해금정책海禁政策이었다. 이는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먼바다로의 출입을 규제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연해지방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고, 우리 백성 가운데서도 군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경우가 있으므로 해금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백성을 본토로 돌려보낸다는 쇄환刷還의 목적이 컸고, 후기에는 사람들의 왕래를 점검하고 섬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러한 영토정책을 쇄환정책이라고 한다.




수토정책의 시작과 확립
쇄환의 의미에는 수토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다만 조선 초기에는 수색해서 토벌한다는 의미보다는 돌려보낸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울릉도 쟁계를 거치는 동안 일본의 영토적 야심을 간파하게 되었으므로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관리정책을 폈다. 이를 우리는 수토정책이라고 한다.
수토정책을 제도화하기 전에 먼저 울릉도의 상황을 조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숙종은 1694년 삼척 첨사 장한상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개척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어렵다는 장한상의 보고를 받은 숙종은 3년마다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수토정책의 시작으로, 수토정책은 1699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1894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수토정책의 목적
조선 정부가 수토정책을 시행한 것은 법망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친 자를 찾아내고 일본인의 침입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여 거주민을 본토로 쇄환하고 일본인의 침입 여부를 점검했다. 또한 정부는 수토관에게 울릉도의 지세와 수목, 짐승과 조수, 토산물과 해산물 등의 정보를 파악하여 보고하고 지도를 그려 제출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조선의 이상향 울릉도
울릉도는 비옥한 토지, 많은 전복과 미역 포획량 등 과연 조선인들이 무릉도라 칭할 만하였다. 이러한 울릉도에 대한 인식은 일반 백성뿐 아니라 문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시대 문인들의 문학 작품에서, 울릉도를 이상향 혹은 신선이 사는 섬으로 표현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조선 / 19C 후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경팔경도 滄景八景圖 중 장승망도 조선 / 연도미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필산수도 鄭敾筆山水圖 조선 / 연도미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조선 / 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관동기행이백운 關東紀行二百韻
유몽인 作
地名君奭召 民想翊成黃 短碣苔紋缺 千秋茂烈揚 蔚陵浮海浪 蒼巘露天潢 如艦漂篁笋 隨波渡鹿麇
지명이 소공대라 백성들이 익성공 황희를 그리워하는데 작은 비석에 이끼 끼었으니 오랜 세월 훌륭한 공덕 드러내었네 울릉도는 바다 물결 위에 떠 있고 푸른 산봉우리는 은하수 위로 드러나니 배가 죽순 밭에 떠다니는 것 같아 물결 따라 사슴과 노루도 건너가겠네
소공대견울릉도 召公臺見鬱陵島
성대중 作
三峰秀拔海中央 宛有神人通往來 雲氣渺茫常自隱 秋空開豁忽懸望 靈山一面曇花現 金闕千重蜃氣翔 只向塵間相妄想 靑童去路月茫茫
세 산봉우리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으니 마치 신인들이 내왕하는 것 같고 구름 기운에 아득하게 가려 항상 보이지 않는데 가을하늘 맑게 개이니 갑자기 바라보이네 영산의 한쪽 면에 우담화 피고 금궐에는 겹겹이 신기루 피어 오르는데 다만 속세를 바라보니 부질없는 생각 일어나고 신선 가는 길에는 달빛만 아득하네
소공대견울릉도
召公臺見鬱陵島
성대중 作
召公台见郁陵岛 | 召公台見鬱陵島
三峰竦秀海中央 宛有神人遠放光 雲氣渺冥常自隱 秋空開豁忽想望 靈山一面曇花現 金闕千重蜃氣翔 只向塵間招妄想 靑童去路月茫茫
세 산봉우리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으니 마치 신인이 빛을 내뿜는 것 같고 구름 기운에 희미하게 어두워 항상 보이지 않는데 가을하늘 맑게 탁 트이니 갑자기 바라보이네 영산의 한쪽 면에 우담화 피고 금궐에는 겹겹이 신기루 피어 오르는데 다만 속세를 바라보니 망령된 생각 일어나고 신선 가는 길에는 달빛만 아득하네
望武陵島 망무릉도
이석형 作
望武陵岛 | 望武陵島
出沒波中一髮微 桃林擲火見依希 若爲駕彼生兩脅 待得高風時一飛
파도 속에 출몰하는 섬 머리카락같이 희미하니 마치 복숭아 나무 숲의 불놀이처럼 보이네 만약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다면 하늘 높이 부는 바람 기다렸다 한번 날아가 볼 텐데


1694년 가을, 장한상이 울릉도를 조사한 이후 조선 조정은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수토하기로 하였으나, 수토제가 정식으로 시행된 것은 1699년에 이르러서였다. 영의정 유상운은 1698년 4월 울릉도 수토 시행을 건의하였으나, 당시 영동 지역의 흉년으로 인해 계획은 이듬해로 연기되었다. 그 결과 1699년 6월 월송만호 전회일이 최초의 수토를 수행하였다. 이후 수토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제도로 정착하여 1894년 12월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3년 주기로 실시되었으나 18세기 말부터는 2년 주기로 변경되어 시행되었다.

조선의 해상 및 해안 방어는 수군의 관할이었으므로, 울릉도를 관리하는 울진현령이 아닌 삼척진영장과 월송포만호가 수토관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울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항로 또한 험난하여, 수토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항해와 더불어 많은 인력 및 물자의 동원이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여건을 고려하여 조선 조정은 삼척진과 월송포에 소속된 수군이 교대로 수토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윤회수토’라고 하였다.
*삼척진영장 : 삼척진에 둔 정3품의 영장으로 보통은 삼척영장이라고 한다. 삼척첨사(종3품)가 영장을 겸임한 경우가 많다. 삼척첨사는 ‘삼척포 수군첨절제사(三陟浦水軍僉節制使)’를 줄인 말이다.
*월송포만호 : 월송포에 둔 종4품의 수군만호로 보통은 월송만호라고 한다. 울릉도가 개척된 후에는 월송만호가 울릉도장을 겸직하다가 1895년 전임도장을 두었다.


수토관의 주요 임무는 울릉도에 잠입하여 체류 중인 조선인을 찾아낸 후 이들을 육지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본인의 활동 여부를 탐색하고, 울릉도의 지세를 파악하며, 수토 시행을 입증할 수 있는 울릉도 특산물의 확보와 삼(蔘) 채취 등도 수토관이 수행해야 할 업무에 포함되었다. 수토관은 임무 수행 이후 비변사에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이때 울릉도의 지형을 그린 ‘울릉도 도형’도 함께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부 수토관은 울릉도에 잠입한 선주나 잠상(潛商)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들의 체류와 영리 행위를 묵인하는 한편, 상부에는 울릉도에 거주민이 없었다고 허위 보고하기도 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비리가 적발될 경우 강원도관찰사까지 교체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1694년 삼척첨사 장한상이 최초로 울릉도를 조사할 당시에는 6척의 선박과 150명이 동원될 정도로 수토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이후 울릉도를 오가는 수로에 대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1699년부터 약 4척의 선박과 80~100명 규모의 인원이 울릉도에 입도하여 수토 임무를 수행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대규모 동원으로 인한 민폐를 줄이기 위해 인원을 점차 감축하였다. 이처럼 수토에 동원된 인원 중에서는 사공, 격군, 포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울릉도 개척 이후에는 월송만호가 울릉도장을 겸임하거나 평해군수가 울릉도 첨사를 겸임하여 정기 수토와 수시 검찰을 병행하면서, 이에 따라 수토에 동원되는 선박 수가 축소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토제가 확정된 초기에는 3년마다 수토관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인해 물자 조달에 어려움이 발생하거나 민란이 일어난 경우에는 수토의 파견이 연기되었다. 1699년 최초의 수토가 시행된 이후 수토는 3년 주기로 실시되었지만, 1795년경부터는 2년 주기로 변경되었다. 울릉도 개척 이후 월송만호가 울릉도장을 겸임하게 되면서, 정기적인 수토 외에 비정기적인 검찰도 수시로 수행되었다. 이러한 비정기적 검찰의 시행 빈도가 많아진 이유는 울릉도로 잠입하는 각 도의 상선과 일본에서 들어오는 선박의 수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울릉도 수토를 위한 선박의 출항은 순풍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으므로, 대부분 바람이 순조로운 4월과 윤 4월, 그리고 5월에 이루어졌다. 수토관이 인삼 채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될 경우에는 채취 시기에 맞추어 6월과 7월에 출항하기도 하였다. 선박의 출항 일자는 고정되지 않았으며, 수토관과 수행원들은 평해의 대풍헌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순풍이 불어오면 즉시 울릉도로 출발하였다.


1699년 월송만호 전회일은 6월 4일부터 6월 21일까지 17일, 1794년 한창국은 4월 21일부터 5월 8일까지 18일, 1859년 삼척영장 강재의는 16일 동안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이러한 수토 기간에는 수토관과 수행원들이 육지에서 출항하여 울릉도에 도착하는 데 소요되는 1~2일, 울릉도에서 출항하여 육지로 귀환하는 데 소요되는 2~5일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 울릉도에서 수토 및 조사를 수행한 시간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또한 수토관의 의지와 현지 상황에 따라 체류 기간이 변동되었으므로, 수토 기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1714년 강원도 암행어사 조석명은 바닷가 방어책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평해와 울진이 울릉도와 가까워 뱃길에 장애가 없고 울릉도 동쪽으로 섬이 일본의 경계와 잇따라 접해 있다.’고 하였다. 이는 평해와 울진이 울릉도의 출항지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토제 시행 초기에는 수토관 일행이 삼척부의 장오리진, 평해군의 구산진(구산포), 울진현의 죽변진과 울진포 등지에서 울릉도로 출발하였다. 이후 19세기에는 수토관을 역임한 삼척영장과 월송만호 모두 평해의 구산포에서 출항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기상 상태에 따라 출항지가 변경되거나, 출항지와 도착지가 일치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19세기 중반 평해군에서는 수토관 일행의 대풍헌 체재 비용을 구산동을 포함한 9개 마을의 주민이 부담하도록 하였다. 관청에서는 비용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각 마을에 일정한 원금을 배분하고, 그 이자를 돈과 곡식으로 징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또한 관청은 「수토절목」(1823년 추정)을 작성하여 비용 조달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생선이나 미역을 실은 상선이 각 포구의 나루터에 입항할 때 화물의 양에 따라 과세하고, 그 수익으로 수토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미역 채취선과 소금 선주에게도 과세하도록 하였다. 이 절목은 9개 마을 주민이 소장을 제출하여 요구한 결과였다.

수토 선박
수토에 동원된 선박은 사람을 태우는 기선(騎船) 1척, 식량과 도구 등을 싣는 복선(卜船) 1척, 소형 선박인 협선(挾船) 2척 등 모두 4척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수토 선박을 2척으로 줄이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그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수토제 시행 초기에는 선박을 새로 건조하여 사용하였으나,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경상도 각 포구의 병선과 전선을 임대하여 활용하였다. 그러나 임대한 선박도 파손 등으로 사용이 어려워지자, 삼척과 강릉에서 선박을 건조하여 평상시에는 상선으로 이용하고, 수토 시에만 활용하자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다만 이 방안의 실제 시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수토와 채삼군(採蔘軍)
울릉도의 삼은 중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잠상들이 울릉도에 잠입하여 삼을 채취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수토관 일행에 채삼군이 공식적으로 동행하기 시작한 것은 1795년부터이다. 「채삼절목」에 따르면 채삼군은 삼척영장이 입도하는 경우에만 동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월송만호의 입도 시기에는 삼척영장으로 교체하여 파견하는 방식이 시행되었다. 사료에 의하면 채삼군은 영동 지역 각 군현이 분담하여 선발하였으며, 1795년과 1799년 두 차례에 걸쳐 울릉도에 입도한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1799년 수토의 경우 강릉 5명, 양양 8명, 삼척 10명, 평해 4명, 울진 3명 등 총 30명이 채삼군으로 선발되어 울릉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채취한 삼은 육지에서 생산된 삼이나 재배삼에 비해 품질이 낮았던 반면, 채삼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해는 상당하였기 때문에, 결국 울릉도에서의 삼 채취는 중단되었다.
주민의 후망군(候望軍) 역할
수토관과 그 일행이 수토 임무를 마치고 본진(本鎭)으로 귀환할 시기가 되면, 삼척이나 평해 등지의 해안 주민들은 해안가에 막을 설치하고 수토선이 정상적으로 귀항하는지 망을 보며 기다렸다. 이는 수토선이 귀항 도중 풍랑을 만나 난파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즉각적인 구조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후망군 : 본래는 높은 곳에 올라가 적을 살피는 일을 맡은 군사를 이르는 말이지만, 수토제에서는 주민이 이를 수행하였다




수토관들은 울릉도로 출항하기 이전부터 임무 수행을 마치고 육지로 귀환하기까지 여러 차례 제의를 시행하였다. 대표적인 제의로는 산제(山祭), 해신제(海神祭), 선제(船祭) 등이 있었는데, 이는 안전한 항해와 임무의 무사 수행, 그리고 평안한 귀환을 기원하는 의례적 행위였다.

1786년 월송만호 김창윤은 4월 28일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29일 그는 4척의 선박에 나누어 타고 저전동(저동)에 이르렀으며, 일행과 함께 목욕재계한 후 산제를 지내고 본격적인 섬 조사에 착수하였다. 수토 임무를 마친 이들은 5월 4일 울릉도를 떠나기 직전 단(壇)에 올라 해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돛을 올려 삼척으로 귀환하였다.

수토를 기록한 문헌들
수토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사료로는 각종 역사서와 수토기, 각석문, 현판, 울릉도 지도 등이 있다. 주요 사료는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올린 보고서, 강원 감사의 장계 및 의정부의 회신을 기록한 관찬사서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일성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수토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수록한 사료는 『승정원일기』로, 수토의 시행 혹은 연기에 대해 국왕에게 보고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수토관이 개인적으로 기록을 남기거나 제3자가 수토관에게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경우도 있다. 장한상은 수토정책이 정착하기 전에 조사 임무를 띠고 파견된 뒤 『울릉도 사적』이라는 글을 남겼다. 박세당은 『울릉도』에서 장한상의 『울릉도 사적』의 일부를 전했고, 『울릉도 사적』에 없는 내용도 기술했다.
현재 울진 대풍헌에는 현판과 「완문完文」 그리고 「수토 절목搜討 節目」이 남아 있다. 「완문」은 관아에서 동민洞民들이 지켜야 할 사항을 지시한 문서이다. 구산동민들이 수토비용을 홀로 부담하게 된 과중함을 호소하자, 9개의 마을이 함께 갹출하여 원금을 보존하고 그 이자로 수토비용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1811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토 절목」은 삼척 영장의 행차에 소요되는 비용이 과중하다는 구산동민의 호소에 부응하여 평해군 전체에서 수토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한 지침서다. 182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의 수토상황을 기록한 개인 문헌으로 『항길고택일기恒吉古宅日記』가 있다. 『항길고택일기』는 삼척(현재 동해시)의 항길고택이라는 집안에서 1747년부터 1904년까지 그해의 책력冊曆에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일기에는 관아에서 수토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미와 좁쌀 등을 거두어간 내용이 적혀있다.











































자료를 꼼꼼하게 잘 정리해 둔 것으로 보여서 수토사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이해할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