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 제44장. 소요원(逍遙園)
8. 길신태로(吉神太露)
==============================
“어때? 배가 고프지 않아?”
“아닙니다. 밥 먹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요. 누님이 시장하신 것이 아닙니까?”
“혹시나 해서 주인된 입장에서 물어본 거야. 손님을 밥도 안 챙겨주고 제 욕심만 가득해서는 끝없이 울궈 먹는 못된 주인 소리를 들을 순 없잖아. 호호호~!”
“알겠습니다. 어서 다음 구절을 보고 싶단 말씀이지요?”
“맞아. 실은 다음 구절도 궁금해. 왜냐하면 경도 선생과 가탁 선생과 인족 선생의 생각을 훑어보는 재미가 또 보통이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이지요. 어서 읽어보시지요. 하하~!”
기현주는 다시 책장을 넘겨서 「은현(隱顯)」편을 읽고 풀이했다.
길신태로 기쟁탈지풍(吉神太露 起爭奪之風)
흉물심장 성양호지환(凶物深藏 成養虎之患)
‘길신이 뿌리가 없으면 쟁탈의 바람이 일어나고
기신이 지장간에 숨으면 호랑이를 키우는 재앙이다’
글을 다 읽고 풀이한 기현주가 의미심장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 대목은 그럴싸~하잖아?”
“맞습니다. 참 잘 이해하셨습니다.”
“경도 선생의 글인지는 몰라도 가탁 선생의 수준은 충분하다고 봐도 되겠는데 맞아?”
“잘 판단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길신(吉神)은 용신(用神)을 말하겠지?”
“그렇게 봅니다.”
“태로(太露)는 천간에 있으면서 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잖아?”
“맞습니다. 을유(乙酉)의 을, 정유(丁酉)의 정, 갑술(甲戌)의 갑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일점(一點)의 의지처가 지지에 없다면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바람막이가 없는 촛불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쟁탈의 바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다만,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데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이러한 의미를 모를까 봐서 노파심이 느껴지는 대목이잖습니까? 그래서 있어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겠습니다.”
“내가 바로 이해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흉물심장(凶物深藏)은 반대로 말하면 길신심장(吉神深藏)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잘 이해하셨습니다. 아마도 ‘보물을 묻어두는 길조(吉兆)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언젠가 드러나면 크게 쓰일 테니 말이지요. 종신(終身)의 복(福)이 되지 않겠습니까? 특히 일지에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고요. 하하하~!”
“그렇구나. 내용에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네.”
“타당하니까요.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우창이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하자 기현주가 또 읽었다.
강중이적과자(強衆而敵寡者)
세재거기과(勢在去其寡)
강과이적중자(強寡而敵衆者)
세재성호중(勢在成乎衆)
‘무리가 강해서 대적하기가 부족하다면
세력은 그 부족한 것을 제거하게 되고
부족한 강함이 많은 무리를 대적하게 된다면
세력은 무리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풀이하고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네? 갑자기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가 뭐지?”
“간단합니다. 이 대목은 사족(蛇足) 선생이 붙인 까닭입니다. 하하하~!”
“사족 선생은 인족 선생보다는 위의 수준이란 말인가? 그렇게 느껴지네?”
“맞습니다. 없어도 되는 것이지만 구태여 허물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결국은 강약(强弱)의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이렇게 어려운 글자를 썼으니 아마도 글재주가 없는 사족 선생이었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어쩌면 오히려 글재주가 많고 유식해서 이렇게 쓴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후학을 위해서 글을 쓰면서 일부러 어렵게 썼다면 스스로 이치를 정통(精通)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데 어렵고 알아듣기 힘든 말로 가르치겠습니까?”
“아, 그건 말이 되네. 그럼 사족 선생은 왜 이렇게 썼는지만 이해하면 되겠구나. 어떻게 이해하면 되지?”
“억부(抑扶)의 상리(常理)도 있지만 종세(從勢)의 기밀(機密)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괜히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할 적에는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면 됩니다. 휘둘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뭐가 기밀이지?”
“뭐기는 뭐겠습니까? 세력이 지나치게 왕성하면 그 세력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니까 이것은 앞의 강유(剛柔)와 순역(順逆)의 복제판(複製版)이라고 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아, 그런 뜻이었어? 정말 듣고 보니 그런 뜻이었구나. 그렇다면 그 대목도 인족 선생이 썼을 것이라고 했으니 이 대목도 사족 선생으로 추켜 줄 것이 아니라 인족 선생의 설인 것으로 끌어내려야 하겠어. 호호호~!”
“그러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정말 그래도 되는 거지?”
기현주는 혹 그러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지 다시 다짐했다.
“당연하지요. 첫째로 오행균형(五行均衡)의 조화법(調和法)을 어겼고, 둘째로 상리(常理)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슨 현기(玄機)라도 있는 것인 양으로 호들갑을 떨었으니 말이지요.”
“그렇긴 한데 정말로 예외(例外)는 전혀 없는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우창은 억부론(抑扶論)을 정도(正道)로 삼고 조화론(調和論)을 정법(正法)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고 실제로 임상(臨床)을 해보면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알았어. 확고(確固)하구나.”
“내일의 일은 알 바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관점으로는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타당(妥當)하다고 여길 따름이지요. 하하~!”
“그래 알았어. 다음 편도 살펴보자. 이름이 진태(震兌)구나.”
기현주는 다시 책을 펴고 「진태(震兌)」편을 읽었다.
진태주인의지진기(震兌主仁義之眞機)
세불양립 이유상성자존(勢不兩立 而有相成者存)
‘목금(木金)의 주체는 인의(仁義)의 참된 기틀이니
세력이 양립할 수는 없으니 서로 이룬 자만 존재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진태(震兌)는 팔괘(八卦)의 진괘(震卦)와 태괘(兌卦)를 말하는 것이잖아?”
“맞습니다.”
“아니, 왜 이런 글이 여기에 있느냐는 거지. 생뚱맞잖아?”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그냥 풀이하고 넘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도로 덮어버리겠습니까?”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기현주도 다시 글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 말을 사주에 대입하면 진(震)은 목(木)이니까 갑을(甲乙)이 되고, 태(兌)는 금(金)이니 경신(庚辛)이 되잖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의(仁義)가 나온 것이겠지요. 오행(五行)과 오상(五常)을 말하면서 팔괘를 집어넣어서 혼돈탕(混沌湯)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맞아! 혼돈탕이 적당하구나. 왜 그랬을까? 이것도 인족 선생의 글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주역 선생의 글일 수도 있겠습니다. 멋있어 보이려고 꾸민 것으로 본다면 말이지요.”
“어? 주역 선생이라니? 그런 선생은 여태까지는 등장하지 않았잖아?”
“맞습니다. 이제 등장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하하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줘봐.”
기현주는 또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
“역경(易經)이 상하(上下)로 되어있는 것은 알지 않습니까?”
“그야 알지. 상경(上經)이 있고 하경(下經)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상경의 마지막 괘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경의 마지막 괘라면 화수미제(火水未濟)잖아?”
“맞습니다. 어쩌면 이 주역 선생이 읽었을 적천수의 내용에는 앞의 은현(隱顯)과 중과(衆寡)가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진태(震兌)와 감리(坎離)로 상편(上篇)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봐서 말이지요.”
우창의 말에 기현주가 책장을 뒤로 넘겨보고는 말했다.
“아, 그렇구나. 다음에는 하편의 육친론(六親論)으로 이어지는구나. 그러면 상편은 뭐지?”
“상편은 통신론(通神論)입니다. 용신을 통달하는 논리라고 풀이해도 되지 싶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다면 상편은 그나마 중요하고 하편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면 되는 거야?”
“꼭 그렇게 말할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불탄 집에서 못이라도 줍는 심정이나,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이라도 줍는 마음이라면 말이지요.”
“아, 그러니까 몰라도 되나 알아서 해롭진 않을 것이라는 말이구나.”
“맞습니다.”
“그나저나 진태(震兌)는 무슨 뜻을 전하려고 여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거야?”
“아마도 쓸데없는 말이라도 덧붙이고 싶은데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끝에 와서야 이렇게 추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연결해서 한 문장 차지한다는 뜻이란 말이야?”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을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세불양립(勢不兩立)의 뜻은 생각해 볼 점도 있지 않을까?”
“세력은 양립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주에서 그러한 논리를 대입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되겠습니다.”
“왜? 통관법(通關法)도 있잖아? 내용으로 봐서는 금목상쟁(金木相爭)이면 둘을 다 남겨 둘 수가 없다는 말로 보이는데?”
“아, 그게 떠오르셨습니까? 이미 통관법을 말했는데 여기에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긴, 그럴 필요가 없으니 이미 군더더기라고 해야 하겠구나. 어차피 두 세력이 견제하고 있다면 그중에도 강자(强者)가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지.”
“맞습니다. 그대로 정리하시면 되지 싶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 두 대목은 명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괜히 어딘가에서 있는 글을 싹둑 잘라다가 끝에 붙여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단 말이지?”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정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네. 그렇다면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란 말이잖아?”
“그래도 읽어보실 거지요? 하하하~!”
우창의 말에 기현주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감리(坎離)」편을 읽었다.
감리재천지지중기(坎離宰天地之中氣)
성불독성 이유상지자재(成不獨成 而有相持者在)
‘수화(水火)는 천지(天地)의 중기(中氣)를 주재(主宰)하니
홀로 이룰 수가 없는지라 서로 유지(維持)하는 자가 존재한다’
이렇게 풀이한 기현주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정말로 맛이 없는 내용이구나. 성부독성(成不獨成)은 세불양립(勢不兩立)과 대구(對句)가 되는 것은 알겠지만, 결국은 수화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 길하다는 말이지?”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수화(水火)가 천지의 중기(中氣)를 주재(主宰)한다고 했네? 이것은 무슨 의미이지? 어떻게 수화가 주재할 수가 있지? 오히려 토기(土氣)가 중재하는 것이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토기가 중재한다는 것은 명리학자의 관점이고 수화가 주재한다는 것은 주역학자의 관점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건손(乾巽)과 감리(坎離)의 이야기도 나눴는데 잊지는 않으셨지요?”
“아 맞다. 그랬구나. 팔괘는 북남(北南)을 수화(水火)로 배치했으니 주재(主宰)가 맞았구나. 이렇게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니 참 갈 길도 멀기만 하지?”
“누구나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자기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우창도 늘 그렇습니다. 하하하~!”
“동생이 그렇다니 나도 위로가 되는구나. 호호호~!”
기현주의 말에 우창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떻게든 연결을 시켜봐야 할 텐데 어떻게 정리하면 될까?”
“맞습니다. 상지자재(相持者在)는 상성자존(相成者存)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렇겠다. 결국은 금목(金木)은 싸우지 않아야 하고, 수화(水火)도 대립하지 않으면 좋은 팔자가 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지?”
“그보다 더 타당한 이유는 찾기가 어렵지 싶습니다.”
“뭐야? 그러니까 결국은 대립하지 말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이잖아? 어렵게 설명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그 말이잖아?”
“잘 이해하셨습니다. 누님. 하하하~!”
우창이 웃으며 말하자 기현주가 다시 책의 맨 앞을 펼치고서 물었다.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 앞의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을 들어야 하겠는데 나를 위해서 풀이를 도와 줄 수가 있겠어?”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육친론(六親論)에 대해서는 살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궁금하기야 하지. 다만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봐서 뒤에 나오는 내용은 동생이 아니라도 혼자서 해결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여서 말이야. 차라리 처음부터 풀이해 줬으면 좋겠어.”
우창은 기현주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누님의 공부를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사이에 누님의 서고(書庫)를 보면서 독서도 하는 여유로움을 누리면 우창도 감지덕지(感之德之)지요.”
“그래? 정말 고마워. 일행들도 함께 뭐든 내 집처럼 편하게 이용하면 되니까 조금도 구애(拘礙)를 받지 말아.”
이렇게 말하면서 자원과 삼진을 둘러봤다. 그러자 자원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어느 사이에 마무리가 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설명한다니 언니와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가 있겠어요. 자원도 환영이에요.”
자원이 환영하자 기현주도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다시 우창에게 물었다.
“오늘에서야 오행의 이치가 얼마나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한 것인지를 깨달았어. 참으로 놀랍고 감탄할 이야기네.”
“축하합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간지(干支)의 여덟 글자는 모두 한곳으로 모인다는 의미로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모두가 한곳으로 모인다고 하시는 말씀은?”
우창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어긋나지 않은 답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창의 말에 기현주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상편(上篇)의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서 물어본 거야.”
기현주의 말에 우창은 문득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누님, 도덕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삼십 개의 바큇살은 모두 가운데로 모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도덕경에 수레바퀴 이야기도 있었던가? 그건 못 봤는데 무슨 뜻이야? 바퀴의 살들은 중심의 축으로 향해서 모이는 것은 알겠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억부(抑扶), 균형(均衡), 조화(調和), 십성(十星), 월령(月令), 강약(强弱), 생극(生剋) 등의 모든 이치는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것이지요. 그 중심점은 바로 도(道)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하듯이 모든 바퀴는 중심축으로 향하듯이 모든 진리는 도(道)로 향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말한 우창이 종이에 글자를 썼다.
우창이 쓴 글을 보고는 기현주가 말했다.
“이건 뭐지? 갑자기 웬 십(十)인가?”
“음양(陰陽)이 만나는 도(道)입니다. 하하하~!”
“와~ 기발한 생각이구나. 이것은 열이 되기도 하니 도가 열렸다는 말이구나. 멋져~!”
“누님은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음양이 만나서 그 중심부에 모이는 것으로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에 만나지 못한다면 도는 이뤄지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맞아, 남녀도 바라만 봐서 될 일이 아니라 동침해야만 자녀가 탄생하는 것이니까. 한 일(一)은 음(陰)이고 뚫을 곤(丨)은 양인 거지?”
기현주의 안목은 이러한 것도 꿰뚫었다. 우창이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것이 모인다는 의미가 되기에는 좀 아쉽지 않아? 만난다면 몰라도 말이야. 좀 더 설명해 줘야 하겠어.”
기현주가 이렇게 말하자 다시 붓을 들어서 추가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도가 원(圓) 안에 있다는 의미로 볼까? 원은 우주(宇宙)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야.”
“정말 멋지십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붓질해 보겠습니다.”
우창이 붓을 들고 다시 손질했다.

그것을 본 기현주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와~! 이건 바퀴네. 도덕경에서 말하는 바퀴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었나?”
“물론 도덕경에 이렇게까지는 설명이 안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창이 상상을 한 것이지요. 이것을 정리하면 말이지요.”
이렇게 말한 우창이 다시 그림을 하나 그렸다.

우창의 그림을 본 기현주가 바로 알아보고 말했다.
“난, 노자(老子)가 수레바퀴의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것을 보니까 태허(太虛)가 보이네. 가운데 비어있는 곳이 바로 전능(全能)이고, 중심(中心)이고 조화(造化)란 말이잖아? 참 기가 막히는 설명이구나.”
기현주가 이렇게 말하면서 감탄했다. 그러자 자원과 삼진도 비로소 우창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창이 설명했다.
“그림은 어설프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누님이 자평의 이치가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이렇게 바퀴로 설명하는데도 용케 알아보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한마디 했다.
“싸부의 그림을 보면서 왜 자평법은 오행(五行)을 벗어나면 안 되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굴레의 중심으로 모이려면 오행의 이치가 아니고서는 안 되겠어요. 그래야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이 될 테니 말이죠. 자원이 나름대로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핵심을 본 듯해요. 이것도 순전히 언니 덕분이에요. 호호호~!”
자원의 말에 기현주가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모두를 지루하게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보람이 있는걸. 호호호~!”
“지루한 것이 다 뭐예요. 맛있는 음식에 멋진 정원에 열정적인 언니까지 만났으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죠.”
모두 흐뭇한 마음과 충만(充滿)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말이 없었어도 교감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석양(夕陽)의 기우는 햇살의 노을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