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2. 혜암도인(慧岩道人)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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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이 석실의 주인인 진상도는 이 화산에 들어 온지도 금년으로 대략 20여 년이 흘렀다. 그 이전에는 천문(天文)이며, 기문(奇門)이며, 지리(地理)며, 병법(兵法)과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법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학문은 모조리 배우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강호를 유람하였다.
그의 젊은 시절은 마치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여행자와도 같았다. 한 권의 서책을 완독하면 곧바로 다음 책을 찾아 나섰고, 한 명의 스승에게서 배울 것이 없어지면 즉시 더 높은 경지의 고수를 찾아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중원의 구석구석을 누볐고, 그의 눈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탐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영민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학문을 심오한 경지까지 통달하게 되었고,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속에서 서로는 오묘한 연관을 맺으면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통감하고 온갖 종류의 학문도 결국은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이든 정신이든 각기 따로따로 생겨서 그렇게 제멋대로 놀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었던가 보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한 권의 고서를 펼쳐들고 촛불을 밝혀가며 밤을 새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치 천둥번개라도 치는 듯한 충격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심신(心身)이 몽롱(朦朧)해 지면서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 빛은 처음에는 가늘고 희미했지만, 점점 더 강렬해지면서 그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지식들이 마치 거대한 퍼즐의 조각들처럼 제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은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그 이유에 의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면서 흘러간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 동안 온갖 종류의 학문을 구하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자신의 열정(熱情)은 한낮 지식의 탐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쫓아 헤매던 나그네가 문득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 것과도 같았다.
수십 년간 쌓아온 명성도, 천하의 학자들로부터 받아온 찬사도,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진정한 깨달음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이 무의미해 보였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더 이상의 유람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조용하게 은거할 장소를 찾아서 이리저리 주유(周遊)하면서 찾고 있었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에서는 웅장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화산(華山)을 좋아한 진상도는 가능하면 화산에다가 조용하고 아담한 석실이라도 한 칸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화산의 험준한 봉우리들과 깎아지른 절벽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는 운무(雲霧)의 장관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자연의 경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이 응축된 성역(聖域)이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이상적인 수행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여간 복이 많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냥 마음만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자연의 도'에 대해서 관찰을 하면서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호남성의 북쪽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지나게 되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날의 풍경과 함께 남해의 검푸른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광활한 호반에 철렁하게 넘치는 물은 왕성한 수(水)의 기운이 허공을 향해서 솟구치고, 그 기운을 안개로 엉키게 한 다음에 다시 주변의 초목으로 스며들어서 생기를 가득 채우는 모습에 취해 있었다.
봄볕은 따사롭게 호수를 비추고, 잔잔한 물결 위에서는 온갖 수조(水鳥)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호수 주변의 버드나무들은 연두색 새싹을 틴 채로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봄안개에 싸여 마치 선경(仙境)과도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찻잔을 들었는데, 그 안에는 강호에서도 유명한 동정호의 오룡차(烏龍茶)가 향긋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어서 연신 차를 마시는 손길에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세상사의 덧없음에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수(水)......
오행(五行)의 시작이면서 끝에 머무르고 있는 수(水)는 겨울의 냉기운을 머금고 있으면서 자연을 정화(淨化)시키고 순환(循環)시키는 역할을 하는 성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동정호의 넘실대는 물결은 기나긴 여정(旅程)에서 얼마나 많은 더러운 것을 씻어서 맑은 세상을 만들면서 여기에 도달하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면 한 모금의 차 맛은 더욱 향기로웠다.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그것을 돌아서거나 감싸안으며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처세술인가.
그날도 무심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윤회사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특이한 표정에서 뭔가 눈길을 끌게 되는 묘한 느낌이 있어서 주시하게 되었다.
그 사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강호인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려는 의지와 동시에 깊은 절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참아내려 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떨 때는 붉은 기운이 돌다가도 금세 창백해지기를 반복했고, 이마에서는 끊임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사내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안광에 부담을 느꼈는지 천천히 진상도에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에서도 무언가 억지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득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머쓱해진 진상도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느 고인이신지 모르겠으나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 소생에게 눈길을 주시는지 궁금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배어있었지만, 동시에 예의를 잃지 않으려는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아, 실례했소이다. 문득 춘색(春色)이 하도 고와서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다가 귀하의 모습을 발견하고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례를 범했으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오."
"아닙니다. 그런데 감히 여쭙습니다. 무엇이 특이하다고 보셨는지요?"
"이거,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는 말씀이오만, 혹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안으로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떨까 싶소이다."
그 남자는 간단치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이 사람에게서 풍기는 중후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서 2층의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창가의 자리에서는 동정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후의 햇살이 호수를 금빛으로 물들이며, 멀리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노래 소리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귀하의 모습과 얼굴에 흐르고 있는 특이한 기운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소이다. 이 진모(陳某)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필시 경락(經絡)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기운의 흐름이 역류(逆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구려."
진상도의 말에는 확신이 배어있었다. 오랜 세월 천문지리를 공부하며 터득한 관상술과 기운을 읽는 능력이 그로 하여금 상대방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내는 흠칫 놀라면서 포권(包拳)을 하여 고개를 숙였다.
"진 선생께서는 과연 예리한 안광을 갖고 계셨습니다. 소생은 이미 불치의 병을 안고 있습니다. 백방으로 치료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어떤 약도 무효(無效)하고, 어떤 명의도 해결책(解決策)을 제시하지 못하여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선생께 모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혹시, 진 모의 견문이 좁다고 탓하지만 않으신다면 귀하의 이름을 맞춰 봐도 좋겠소?"
"예? 소생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셨단 말입니까?"
사내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병을 알아본 것도 놀라웠는데, 이제는 정체까지 알아본다니...
"당금 무림에서 특이한 검법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모두 제압하고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 되었다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소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자오검(子午劍) 오혜량(吳慧樑)이라는 것을 듣고는 명호(名號)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더랬지요."
"틀림없습니다. 소생이 오혜량입니다. 이룬 것도 없이 허명만 강호에 떠돌아다니는가 싶습니다. 변변치 못한 이름을 감히 헤아려 주시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내력이 깊으신 선생께서는 어떤 어른이신지도 궁금합니다마는.....?"
문득, 오혜량은 경계의 마음이 일었다. 그토록 숱한 고수들과 자웅을 겨루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기도 이미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순간 살기(殺氣)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림의 정점에 서있는 자의 숙명이었다. 명성이 높을수록 그를 시기하거나 도전하려는 자들이 많아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것을 본 혜암은 부드럽고 중후한 웃음으로 오혜량의 긴장된 마음을 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손을 들어서 흔들면서 말했다.
"아아~! 염두에 둘 필요 없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진상도(陳詳道)라고 부르고 강호에서는 혜암(慧岩)이라고도 불러 줍디다. 그대와는 일 푼의 원한 관계도 없으니 경계하지 않아도 될 거요. 다만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죄악감(罪惡感)에 의한 고통을 벗어나서 해탈에 이르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오."
그의 말에서 전혀 위협을 가할 악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통의 본질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자비심이 느껴지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아오르는 격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오혜량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이렇게 순수한 선의로 자신을 도우려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오검 오혜량이라는 명성에 압도되어 가까이 오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혜암도인은 달랐다. 그의 눈빛에서는 진정한 자비와 지혜가 느껴졌고, 그 마음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알 수 있었다.
"아, 그러셨습니까? 의심해서 송구합니다. 소견이 협소하여 누군가 아는 체를 하면 소생이 항상 긴장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자신도 모르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이오~! 이해하고말고. 그러니까 아까 본 모습에서는 극심한 냉기(冷氣)와 극렬한 열기(熱氣)가 교차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음이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인데, 그래도 그러한 고통을 잘 견뎌 내는 것을 보면서 필시 내공이 최상승(最上昇)이라는 것을 짐작했소이다만, 과연 자오검이셨군요."
혜암의 분석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오혜량이 겪고 있는 고통의 양상을 마치 직접 체험한 것처럼 세밀하게 설명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자오검이라는 것을 알아보셨는지 그것이 소생은 더욱 궁금합니다."
"그야 혜암(慧岩)에게는 약간의 관형찰색(觀形察色)에 대한 잔재주가 있다오. 그렇기에 얼굴에 타고 흐르는 기운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얼굴이 반홍반청(半紅半靑)으로 보였더란 말이오. 그런데 겉으로는 여느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소이다."
"과연~! 탄복(歎服)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것은 아니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어떻게 연마하셨기에 그러한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게 궁금하고 또 그것을 알아야 원인에 대해서 분석(分析)할 수가 있을 것이니 치유(治癒)의 해결책도 찾아낼 수가 있지 않을까 싶소이다마는......?"
"사실 말씀을 드리자면 이야기가 좀 길어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진 대인께 이러한 정황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고통의 열빙지옥(熱冰地獄)에서 벗어날 길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견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좀 지루하시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셔서 한 중생의 번뇌를 해결해 주신다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나도 사실 확신은 없소이다. 다만 어쩌면 해결의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어서 괜히 해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감히 개인의 문제에 끼어든 것이나 아닐까 그것이 저어지는 뿐이오이다."
혜암의 이런 겸손한 태도가 오히려 오혜량으로 하여금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고수일수록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함부로 장담하지 않는 법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그렇게도 천하를 누비면서 이 기묘한 증세를 치료할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봤습니다만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증세라는 말만 할 뿐이고 어느누구도 해결책은 고사하고 원인조차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사느니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왜 아니겠소. 능히 그 고통의 극렬(極烈)함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해도 되지 싶소. 빈도(貧道)가 과거에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고통도 짐짓 느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모한 짓도 망설임 없이 했더란 말이오."
혜암의 이런 말에서 오혜량은 진정한 동지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오검 오혜량은 짐짓 진중하고도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까지 된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들려주려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인(奇人)을 만나는 것도 천재일우(千載一遇)인데 이러한 기회에 자칫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놓쳐버린다면 아마도 천추(千秋)의 한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 두서없는 이야기나마 소상히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명찰(明察)하셔서 지혜의 힘을 베풀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뿐더러 은혜가 백골난망(白骨難忘)이겠습니다."
혜암은 점원이 갖고 온 따끈한 차를 잔에 따르면서 오혜량의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했다. 창밖으로는 저물어가는 석양이 동정호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혜량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이 처음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십오 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평범한 검법을 배우며 무림에 첫발을 디뎠지요. 하지만 소생의 성정이 남다른 바가 있어서인지, 기존의 검법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동시에 깊은 후회가 배어있었다.
"스승님께서는 기초를 탄탄히 하라고 하셨지만, 소생은 더 강하고 더 빠른 검법을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서를 통해 자오(子午)의 이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혜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오... 하루 중 음양이 교차하는 가장 극단적인 시간이로군요. 자시(子時)는 음기가 극에 달하고, 오시(午時)는 양기가 절정에 이르는..."
"정확하십니다!" 오혜량의 눈에 잠시 광채가 돌았다. "소생은 그 원리를 검법에 적용해보고자 했습니다. 한 번의 검격에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동시에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자오검법의 시초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검기(劍氣)의 성질을 바꾸는 정도였습니다. 차가운 음기의 검기와 뜨거운 양기의 검기를 교대로 사용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소생은 더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오혜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 번의 검격에 음양을 동시에 담아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단전(丹田)에서 음양의 기운을 동시에 순환시켜야 했습니다."
혜암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였겠군요. 음양은 서로 상극하는 기운인데, 그것을 한 몸에서 동시에 운용한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소생은 젊은 혈기에 사로잡혀 위험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위험이 있기에 더욱 강력한 검법이 탄생할 것이라 믿었지요."
"놀랍게도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자오검법이 완성되었을 때, 소생의 검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의 검격에 극한의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담겨 있어,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했습니다."
오혜량의 목소리에 잠시 자부심이 스며들었다가 곧 침울해졌다.
"그렇게 강호를 누비며 수많은 고수들을 제압했습니다.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도 얻었지요.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한 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감이었습니다. 자오검법을 사용한 후 며칠간 기력이 달리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증세는 심해졌습니다."
오혜량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 순간에도 그의 얼굴색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몸 안에서 음양의 기운이 끊임없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시가 되면 극음의 냉기가 온몸을 얼려버릴 듯 차가워지고, 오시가 되면 극양의 열기가 몸을 태워버릴 듯 뜨거워집니다."
혜암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군요.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두 번이었는데, 이제는 한 시진(時辰)마다 음양이 교체되며 고통이 찾아옵니다."
오혜량의 목소리가 떨렸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는 이 몸이 음양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오셨군요..." 혜암의 목소리에 깊은 동정이 배어있었다.
"천하의 명의라는 명의는 모조리 찾아다녔습니다. 소림의 의승, 무당의 도사, 심지어 서역의 밀교 고승까지... 하지만 모두들 고개만 저을 뿐이었습니다."
오혜량이 쓸쓸하게 웃었다. "어떤 이는 이런 증세는 처음 본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명의는 소생을 보자마자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혹시 자오검법을 포기하면 어떨까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혜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시도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자오검법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라 음양의 기운을 몸에 새겨넣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 몸에 새겨진 음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최근에는... 차라리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혜량의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강호에서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던 제가 이렇게 무력하게 고통받으며 살아야 한다니... 이런 삶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혜암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으로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고, 동정호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오 대협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황이 매우 심각하군요." 혜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정말... 해결책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오혜량의 목소리에 한 줄기 희망이 스며들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소생이 과거에 연구했던 바에 따르면 음양의 대립을 조화로 전환시킬 방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혜암이 신중하게 말했다.
"어떤 방법입니까?" 오혜량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태극(太極)의 원리를 아십니까?" 혜암이 부채를 꺼내들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음양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품고 있으면서 순환하는 것입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생기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생깁니다. 현재 오 대협의 상황은 이 순환이 끊어져서 음양이 서로 충돌만 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오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순환을 다시 연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혜암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 "다만 그를 위해서는 매우 위험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오혜량이 즉시 대답했다. "이런 고통을 계속 견디느니 차라리..."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혜암이 엄숙하게 말했다. "음양의 기운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그 충돌이 더욱 격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혜량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견디기 힘든 고통인데, 그보다 더한 고통이라니...
하지만 그의 눈에는 곧 결의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도 시도해보겠습니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훌륭하십니다." 혜암이 감탄했다. "그런 의지가 있으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오혜량이 간절하게 물었다.
"우선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 필요합니다. 치료 과정에서 강력한 기운의 파동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혜암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생이 알고 있는 곳 중에 화산에 작은 석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치료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화산이라..." 오혜량이 중얼거렸다. "오악 중 하나인 그 화산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험준한 산세와 강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 치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인적이 드물어 방해받지 않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정호의 운명적 만남이 오혜량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혜암에게는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볼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달빛이 호수를 은빛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각각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혜량은 마침내 찾은 희망의 빛에 감사했고, 혜암은 이 어려운 치료가 성공할지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도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만남이 앞으로 펼쳐질 장대한 이야기의 서막임을, 두 사람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