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2 ·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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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제1장 화산의 노도인/ 1. 만산홍엽(滿山紅葉) [증보판]

[001] 제1장 화산의 노도인/ 1. 만산홍엽(滿山紅葉) [증보판]

[001]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1. 만산홍엽(滿山紅葉)


주원장(朱元璋)이 원(元)을 정벌하고 명(明)을 건국한지도 30여 년이 지난 홍무(洪武) 만년이다. 정국은 3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에게 나라를 넘겨주려는 시기였다. 천하는 겉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으나, 조정 내부에서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야심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까지 흘러들어오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세의 소란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 곳이 있었으니, 바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의 화산(華山)이었다.

우뚝우뚝, 제각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절경의 바위 봉우리들이 구름 위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화산. 예로부터 수없이 많은 영웅호걸들의 발길이 스쳐 지나가고 또 그렇게 여전히 호기심 어린 사람을 부르는 명산이다. 동봉(東峰) 조양대(朝陽臺)에서부터 서봉(西峰) 연화봉(蓮花峰)에 이르기까지, 그 험준함과 아름다움이 천하에 둘이 없다 하여 '기험천하제일산(奇險天下第一山)'이라 불리우는 곳이기도 했다.

이 화산의 깊숙한 곳,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협곡 깊은 곳에는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백학(白鶴) 두 마리가 날아오르는 하늘에는 자욱한 안개가 서려있다. 그 안개는 마치 선계(仙界)와 속계(俗界)를 가르는 경계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개를 아래로 하고서 그 위에는 역시 만장(萬丈)이나 되어 보이는 아득한 산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 들어온다.

멀리서 이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깊은 산중의 적막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깊고도 높은 화산의 협곡만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가끔씩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들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 속에서 자연의 생동감을 전해줄 뿐이었다.

때는 한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10월 초순. 낮은 들녘에는 아직도 단풍의 여세(餘勢)가 남아 있었지만, 이 깊은 산중에서는 이미 그 곱던 물색들이 퇴색(退色)해 버리고 있었다. 그 무성하던 나무숲들의 그늘에 가려서 여름 내내 보이지 않았던 암벽과 더 깊숙한 곳의 세세한 곳까지도 하나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어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단풍잎들은 붉은 것, 노란 것, 갈색 것들이 뒤섞여 마치 천상의 화공(畫工)이 붓을 휘둘러 그려놓은 일폭의 거대한 그림 같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도 잠시, 이제는 하나둘씩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함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깊은 산중에 돌연 적막을 깨고서 깊은 한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후~~!"

그 소리는 길게 이어졌는데, 보통 사람이 얼핏 들어봐도 상당한 내공이 실린 중후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그 한숨 속에는 깊은 회한과 동시에 달관한 듯한 초월적 경지가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 후에 카랑카랑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음...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구나! 이렇게 붉었다가 스러지는 빛깔을 보아 온지도 어느덧 한 갑자(甲子)가 지났으니 덧없는 세월 속에 나이만 먹어가는구나......"




그 음성의 주인을 찾아보니, 그는 얼핏 봐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맑고 윤택이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깊은 지혜를 담은 듯한 주름이 몇 개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세월의 풍상을 겪은 흔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를 닦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었다.

옷은 청색이 감도는 도포를 입었는데, 그 옷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청색 천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햇빛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색깔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잠사(蠶絲)에 특별한 염료를 들인 것으로 보였다.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오래된 죽간(竹簡)으로 만든 서책이었다.

그는 이미 단풍이 지기 시작한 틈 사이의 널따란 반석(盤石)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반석은 자연이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직했는데,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다듬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천상(天上)에서 선관(仙官)이 휴식을 취하러 하강한 것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그리고 멀리 산 아래를 응시하는 시선에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맑았는데, 마치 깊은 못물처럼 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면서도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때때로 그 눈에는 기대감과 약간의 근심이 교차하며 스쳐가곤 했다.

이렇게 깊은 화산(華山)의 협곡(峽谷)에 누가 찾아오기로 했는지, 그렇게 혼자서 독백을 하면서 가끔 산 아래를 응시하곤 하기를 한 시간 정도 흘렀다. 그 동안 그는 때로는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산 아래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가면서 산중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는 전혀 추위를 타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깊은 내공으로 단련된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온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 온기는 단순히 체온이 아니라, 마치 내단(內丹)을 수련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운이었다.

그렇게 다시 산중은 적막(寂寞)에 휩싸인 채로 고요가 유지되고 있었다. 저 멀리 협곡 너머로는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산봉우리들의 윤곽이 붉은 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도포의 남자는 다시 한 번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구나. 어제 같이 젊었던 시절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한 갑자의 세월이 흘렀다니... 그러나 도를 향한 마음만큼은 예전보다 더욱 간절해졌으니, 이것만으로도 이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의 내면에는 지난 60년간의 수행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젊은 시절 속세에서의 번민과 갈등, 그리고 도를 찾아 나선 구도의 여정, 그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스승들과 동문들, 깨달음의 순간들과 시행착오의 나날들...

갑자기 멀리서 걸걸하고 육중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지면서 공기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던 도포자락의 남자도 잠시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매우 가볍고 우아했는데, 마치 구름이 떠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소리는 어느 사이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실로 대단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달려온다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날아온다고 해야 할는지 표현하기에 곤란한 정도의 빠른 몸동작이었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분명히 극도로 높은 경공술(輕功術)을 구사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혜암도인(慧岩道人)~~!"

그 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졌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도포자락의 남자도 대꾸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벗을 만나는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서 오시오! 달마존자(達磨尊者)."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마존자라고 불린 인물은 허공을 걷듯이 몇 차례 몸을 움직여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경공술은 정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어서 그것을 밟고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의 점프로 수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왔던 것이다.




형색을 살펴보니, 눈은 데굴데굴한 왕방울이었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그 수염은 회백색이었는데, 마치 강철처럼 억세 보였다. 얼굴은 구릿빛이었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어서 오랜 세월 수행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밝고 생기가 넘쳤다.

걸친 옷은 장삼에 가사를 걸쳤는데, 이미 몇십 년이나 세탁하지 않았는지 누덕누덕 기운 천도 이미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나마 다 떨어져서 속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솥뚜껑 같은 손을 덥석 내밀어서 도포의 남자를 움켜잡았다. 그의 손은 놀랍도록 컸는데, 마치 부채처럼 넓직했다. 그러면서도 그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혜암도인, 오늘을 많이 기다렸소이다. 그간 법체 평안하셨소이까?"

달마의 목소리는 마치 종을 치는 것처럼 웅장하고 깊었다. 그 음성에는 오랜 수행으로 단련된 특별한 힘이 서려 있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빈도(貧道)는 존자의 염려지덕으로 하는 일도 변변히 없으면서 세월없이 나이만 먹고 있구려. 상인께서는 그간 어찌 보내셨소?"

혜암도인의 대답에서는 깊은 겸손함과 동시에 진정한 도인다운 초월적 경지가 느껴졌다. 그의 말투는 매우 정중하면서도 자연스러웠는데, 이는 오랜 수행을 통해 몸에 밴 품격이었다.

"소승은 도인과 약속한 후로 10년간 숭산(崇山)에서 면벽한 결과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생각을 해 보니 허접하게나마 무시를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고서 이렇게 10년이 되기를 기다려서 오늘 화산으로 한달음에 달려왔소이다. 껄껄껄~~!"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서 이미 탈속(脫俗)한 도인의 모습이 그대로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의 웃음소리는 산울림을 일으킬 정도로 컸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기쁨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주객(主客)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10년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린 것은 이 달마라고 불린 노화상을 기다린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깊은 인연과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존자께서야 이미 불도의 깊은 경지를 몸소 체득(體得)하신 분으로써 자연의 풍광(風光)을 관찰하고 직관으로 통찰(洞察)하시니 그 높은 안목을 무슨 수로 벗어날 수가 있겠소. 그에 비하면 빈도는 겨우 속진(俗塵)이나 벗어나서 이렇게 산중에서 도를 닦는다고 주접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련할 뿐이오이다. 허허허."

혜암도인의 겸양하는 말에는 진정한 지혜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겸손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의 높은 경지를 스스로 낮추어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다.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하시오. 실로 이렇게 높고도 깊은 안목을 갖고 세상의 이치를 관조(觀照)하시는 도인은 근래 200년 내로는 찾으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외다. 껄껄껄."

달마 역시 혜암도인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진심어린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찬(過讚)은 실례라고 합디다. 이제 그만하시고 석실로 들어가시지요."

"예, 그럽시다. 오늘은 밤을 새워서 나눌 이야기가 적지 않겠구려. 껄껄껄."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한바탕 칭찬한 후에 석벽으로 다가갔다. 혜암이 암벽을 향해서 손을 한번 휘두르자 이끼가 잔뜩 붙어있는 절벽에서 스르릉 소리가 나면서 동굴의 문이 열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문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문(石門)이었는데, 밖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구조로 만들어서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 문을 여는 방식도 특별했는데, 단순히 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공의 진법(陣法)을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달마도 담담하게 혜암도인 뒤를 따라서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은 그 넓이가 대략 30평 정도 되어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천연적인 동굴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인공 동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벽면을 보면 정이나 끌로 다듬은 흔적이 역력했고, 천장의 높이도 균등하게 맞춰져 있었다. 이런 석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벽에서는 야명주(夜明珠) 두 개가 붙어있어서 어두운 석굴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야명주는 달걀 크기 정도였는데, 은은한 청백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아서 눈이 편안했다. 안력을 돋워서 살펴보면 천장 부근에는 상당히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예전에는 기름이나 나무를 이용해서 조명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안쪽에는 소박하게 만들어진 침상이 있고, 그 곁에는 책상이 놓여 있는데 빛이 바랜 고서가 몇 권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책들을 자세히 보면 『도덕경(道德經)』, 『장자(莊子)』, 『주역(周易)』 등 도가의 경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한쪽에는 간단한 침구와 약간의 의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매우 소박하고 간소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정신적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혜암은 방석을 내어서 손님에게 권하면서 자신도 앉았다. 그 방석들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는데, 만져보니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어서 앉는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받쳐주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오랜만에 귀한 벗께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방문을 해 주셨는데 변변한 대접도 없으니 손님에 대한 예의가 말이 아니외다. 허허허!"

"무슨 결례의 말씀을... 껄껄껄~! 빈승이 남의 손님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혜암도인이 참으로 입에 발린 예의를 차리시는구려. 그럴 필요 없소이다. 껄껄껄~!"

달마의 웃음소리는 대단히 컸으나 그리 넓지 않은 동굴의 석실에서는 울림이 크게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소리를 흡수하는 무슨 장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벽면의 구조나 천장의 모양을 보니 음향 효과까지 고려해서 설계한 것 같았다.

"자, 우선 이리 앉아서 목이나 좀 축입시다. 마침 남해에서 선물로 들어온 명주(名酒)가 있는데 아직 개봉하지 않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외다."

"저런, 그렇게 진귀한 보물이 이렇게 깊은 산 구석에 있었다니 참으로 혜암도인의 도력은 대단하여 놀라울 뿐이구랴. 남해라면 그 해상선인(海上仙人)이 보낸 모양이구만. 그 늙은이는 사람을 골라가면서 선물을 하는 모양이구만... 고얀 늙은이로고."

"원, 그럴 리가. 허허허."

혜암이 항아리를 꺼내어서 마개를 열었다. 그 항아리는 보통 술항아리와는 달랐는데,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맑고 청아한 향이 석실에 넘쳤다. 그 향은 단순한 술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깊은 산중의 나무향과 바다의 해초향, 그리고 어떤 신비로운 약초의 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 향에 취해서 잠시 말을 잊고 멍하니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활력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혜암이 문갑의 서랍을 열고서는 벽옥(碧玉)으로 다듬은 술잔을 두 개 꺼냈다. 그 술잔들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벽옥 자체가 워낙 귀한 보석이거니와, 그것을 이렇게 정교하게 다듬어 술잔으로 만든다는 것은 보통 솜씨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명주의 빛을 받은 벽옥의 술잔은 거무스레하게 빛을 내면서 은은하면서도 더욱 신비한 광채를 뿜어냈고, 그 빛으로 인해서 석실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술잔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명주의 향에 반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달마는 그 술잔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 보시오, 혜암도인. 이 술잔들이 벌써부터 명주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정말 신비로운 보물들이로구만."

"자, 우선 목을 축이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눠야지요."

혜암이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술이 잔에 부어지면서 나는 소리마저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옥구슬이 쟁반에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샘물이 바위를 적시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술의 색깔 또한 범상치 않았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미묘한 금빛이 돌고 있었는데, 그 빛이 벽옥 잔과 어우러지니 더욱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이거 향적(香積) 보살이 벌써 감응을 하시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영험이 있는 불공이 되겠소이다. 그럼..."

달마가 혜암이 주는 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놀람의 표정이었다가, 이내 깊은 감탄과 환희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마치 깊은 선정(禪定)에 든 것 같은 고요한 표정을 지었다.

혜암과 달마는 그렇게 한 잔씩을 나누고서는 또 온몸을 감도는 청아하고 온후한 음양의 조화가 이뤄진 기운을 느끼면서 각기 한 시진(時辰:2시간) 정도의 삼매로 젖어 들었다. 

한 잔의 술에서 이렇게 기이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다. 보통의 술이라면 기운이 청아하면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술의 기운이 온후하려면 술의 성질은 뜨거워야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해 선인이 보냈다는 이 명주는 참으로 보통 사람이 빚은 것이 아닌 특이한 술이었다.

이 술의 제조법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해 선인은 오직 진정한 도인들에게만 이런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도 아무나에게가 아니라 정말로 도덕이 높고 수행이 깊은 이들에게만 말이다.

술은 그 성질이 더운 것인데, 약초의 배합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이 한 잔의 술은 10년간 쌓인 몸속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고 다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충분한 묘약이었다. 그래서 아까운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 싫어서 두 사람은 조용하게 그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돌도록 기의 통로를 지켜보면서 희열감을 즐긴 것이다.

달마는 술의 기운이 자신의 단전(丹田)에서 시작해서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따라 온몸을 순환하는 것을 느꼈다. 그 과정에서 막혔던 경혈들이 하나씩 뚫리고, 탁했던 기운들이 맑아지는 것을 체험했다. 특히 10년간의 면벽 수행으로 인해 다소 경직되었던 부분들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혜암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홀로 수행하면서 쌓인 고독감과 때로는 자신의 길이 옳은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들이 이 한 잔의 술로 인해 말끔히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활력과 확신이 몸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먼저 달마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욱 맑고 깊어져 있었다.

"그 남해 선인은 늘상 이런 미주(美酒)만 들고 있으니 원기(元氣)가 더욱 넘칠 수밖에 껄껄껄."

"참으로 그렇소이다. 이 술 한잔이면 한 달은 아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시장기를 느끼지 않을 기력이 들어있다고 생각되는구려. 참으로 보기 드문 명주를 보냈다는 것을 이제 알겠소이다. 허허허."

두 사람의 대화에는 전과는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단순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신묘한 술의 기운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욱 예리해진 직관력과 통찰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득 혜암은 지난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지나가는 상념(想念)들이 한바탕 일어나는 것을 조용히 음미하면서 추억에 잠겼다. 그의 마음속에는 젊은 시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때는 아직 속세에 있을 때였다. 명나라가 막 건국되던 혼란한 시대에 그는 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렴한 관리였지만,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젊은 혜암은 세상의 무상함과 권력의 덧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특히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얘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꿈과 같느니라. 부귀영화도, 권력도, 심지어 이 육신조차도 모두 잠시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는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찾아서 살아가거라."

그 말씀이 그로 하여금 도를 찾아 나서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그 후 그는 모든 세속적 연결고리를 끊고 구도의 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며 고명한 스승들을 찾아 헤맸다. 무당산의 진인(眞人), 태백산의 은사(隱士), 종남산의 도인(道人)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수행자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스승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이 화산의 깊숙한 곳에서 수행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특히 7년 전, 그 유명한 '화산론검(華山論劍)'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무림의 고수들이 화산에 모여 무공을 겨루는 대회가 열렸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무력의 한계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육체적 강함이나 무공의 뛰어남보다는 마음의 평정과 도덕적 완성이야말로 참된 힘이라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혜암도인,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는지요?"

달마의 물음에 혜암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이 명주의 기운이 워낙 신묘해서 지난 일들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존자께서도 10년간의 면벽 수행에서 많은 체험을 하셨을 텐데, 혹시 들려주실 만한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그러고 보니 그렇구려. 10년이라는 세월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그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달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마음속에도 지난 10년간의 치열했던 수행 과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숭산 소림사(嵩山 少林寺) 뒤편의 석벽 앞에서 면벽하며 보낸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처음 3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깊은 선정에 들려고 해도 잡념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때로는 이런 수행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했지요. 특히 겨울철에는 추위가 뼈에 사무쳐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달마의 고백에는 진솔함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높은 경지의 수행자라 해도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4년째부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고, 외부의 소음이나 추위, 더위 같은 것들이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더군요. 그리고 6년째가 되었을 때는..."

달마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때의 체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6년째에 어떤 체험을 하셨는지요?"

"그때 처음으로 진정한 '무(無)'의 경지를 맛보았습니다. 나라는 존재도, 석벽도,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도 모두 사라진 상태...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의 상태에서 오히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이더군요."

혜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1년 동안은 그런 경지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면벽을 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든 그 고요한 중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요."

"정말 대단한 성취입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군요."

"혜암도인께서는 어떠셨는지요? 이 화산에서의 수행 생활에서 특별한 체험이 있으셨는지..."

이제 대화의 주도권이 혜암에게 넘어갔다. 그는 잠시 술잔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생각했다.

"저의 경우는 존자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도를 깨닫고자 했거든요."

혜암은 손으로 석실의 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이 석실도 처음에는 작은 동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20년에 걸쳐 조금씩 확장하고 정비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저는 돌의 성질을, 흙의 성질을, 그리고 이 산 전체의 기운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참 흥미롭군요. 계속 말씀해 주시지요."

"특히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봄에는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기운을, 여름에는 왕성한 생장의 힘을, 가을에는 성숙과 수렴의 지혜를, 겨울에는 고요한 침잠의 깊이를...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달마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도를 추구하면서도 이렇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큰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실제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깊어져갔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행했지만, 도달한 경지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밤은 더욱 깊어져갔고, 석실 안의 야명주는 변함없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 도인은 아직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속세의 변화하는 정세에 대해, 그리고 진정한 도인으로서 이 혼란한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혜암도인, 최근 조정의 소식은 들어보셨는지요?"

달마의 물음에 혜암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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