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강화도] 마니산의 봄풍경
봄이 무르익는 4월이다. 그것도 4일이니 결혼기념일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32회라고 할 수 있겠구먼. 그런 것이야 아무렴 어떤가 여하튼 잠시 짬을 내여서 봄나들이라는 이름으로 집을 나선다는 것이 중요할 뿐.
목적지는 강화도이다. 강화도의 교육기관에 발령받은 예전 인연의 윤 선생이 강화도에 놀러 오면 숙소는 책임 지겠다고 하는 바람에 펜션비라도 절약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기왕 나들이 하는 김에 마니산이라도 둘러볼까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의기 투합한 사람들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토요일 오후에 길을 나섰다.
집떠나면 개고생인 거야 누군 모르나... 그래도 떠나고 싶은 것은 본능적으로 방랑객의 기질이 뼈속 깊이 들어있기 때문일게다. 이렇게 벗꽃이 봄비를 맞고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나 보고 있으면 될 것을 무슨 신명나는 일이라도 있으려나 하여 복잡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냥 길을 나서는 것은 아무래도 팔자소관인듯 싶다. ㅎㅎㅎ
차창에는 빗방울이 연신 뿌려댄다. 유리닦게가 한가롭게 놀 수 만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는 1분 전진 3분 휴식을 반복한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야 얼마나 피곤하랴만.....
뒷자리의 젊은 부부는 마냥 즐겁기만 하다. 《運勢》편을 편집하여 인쇄소에 넘기느라고 밤을 새운 화인은 여전히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더 즐거운 여행길이기도 하다. 달콤한 잠에 빠져든 옆에서 열심히 카페의 글을 보면서 공부하고 있는 그의 남편 호연(湖然) 선생은 가끔 질문을 툭툭 던지기도 한다. 아호는 며칠 전에 화인이 선물한 것이다. 호수처럼 그렇게 유유자적 하면서 둘이서 살아가자나 뭐라나... ㅋㅋㅋ
두 시간을 달려도 목적지는 멀기만 하다.
가까스로 도착한 곳은 송산포도휴게소. 뭔가 요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 찰보리 만주인데 경주의 찰보리빵을 떠올렸다가 실망을 한 메뉴이기도 하다. 맛이 별로였다는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비주얼만 그럴싸 했다고 할까....
밤도 깊어서 9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을 할 수가 있었으니 대략 따져봐도 다섯 시간 반을 도로에서 보낸 셈이니 상행선의 고통은 피하고 싶기만 한데 그래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물론 이 사진은 다음 날 새벽에 찍은 것이다.
교육기관에서의 하룻밤도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들 너무나 편안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전기숙(無錢寄宿)으로 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환영 한다잖여~~~~!!! ㅋㅋㅋㅋ
하루 인연으로 빌려 든 관사의 숙소이다. 딱 원룸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선생님들이 발령받아서 오면 머물 수가 있도록 모든 시설이 다 되어 있는 곳이었다. 물론 경우바르기로 전국 최고인 삼녀 종녀씨는 냉장고에서 계란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남의 것은 손대지 않는 올곧은 성품으로 인해서이다. 그야말로 양반이다.
우리가 맨 꼴지로 합류했다. 그러니까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저녁먹을 꺼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려진 밥 상에 자리만 차지하면 되었으니 늦게 도착한 것이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말이 좋아서 강화도이지 막상 둘러보니 별로 사 올 것이 없더란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저녁을 준비했다기에 잘 했다고 했다.
지난 해에 맞이한 하나밖에 둘도 없는 종녀씨의 며느리이다. 점괘를 보고 쌍동이 점괘라고 했더니 무지무지 좋아한다. 그래서 또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디저트라고 셋째남편께서 솜씨발휘를 한 작품이다. 맛은...... 먹을만 했다. ㅋㅋㅋ
따뜻한 방에서 제각기 편할 대로 한칸씩 차지하고 잠을 잤으니 편안할 밖에~ 윤 선생 고마버~~!!
새벽에 잠을 깨니 날이 훤히 밝았다.
2 층의 옥상으로 올라갔더니 저만치 서해 바다가 보인다. 분위기는 요즘 한참 재미있는 남남북녀의 박수부부가 이사한 주변인듯 싶다. 그렇지만 한가롭게 호구조사를 할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그냥 이 부근으로 이사 했겠구나... 생각만 했다. 방송으로 보면, 전망의 바다 풍경이 딱 요만큼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닷가로 내려가는데 어느 집 펜션의 화단에 진달래가 만발이다. 참 곱기도 하지.... 조물자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거든.... 작년에 본 색을 그대로 재연해 놓았으니.... 나이가 들어가는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감동의 물결이 일어난다. 시인이 되어가는 걸까?
갯가로 나가는 움직임을 눈치챈 호연 선생이 슬슬 따라온다. 그래서 물었다.
낭월 "이서방, 이 꽃이 뭐지?"
호연 " 개나리입니다~!"
낭월은 그래도 1초라도 생각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최소한 산수유 꽃이라고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을 뿐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개나리.... 나 참.... 그래서 또 물었다.
낭월 "왜?"
호연 "노랗잖아요."
뭐 간단하다. 노란 색은 개나리. ㅎㅎㅎㅎ
호연 "아니, 무슨 꽃인지 가르쳐 주셔야지요~"
낭월 "그렇군. 생강나무 꽃일쎄~"
호연 "네? 생강이 나무에서 열리는 거였나요?"
낭월 ".............."
백매가 아직도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래서 광양의 매화마을에 가지 않았던 보답을 여기에서 해 주는 구나. 고맙다. 깨끗하여 순결한 매화꽃은 품격이 상상급(上上級)이다.
갈대가 분위기를 잡아주는 장화리 해안이다. 눈으로는 풍경을 즐기고 귀로는 바다의 의야기를 듣는다. 이목구비에 써놓은 눈이 중요하냐 귀가 중요하냐고 했던 글이 떠오른다. 과연 눈과 귀는 둘 다 중요하다고 해야 할까보다. 소리없는 바다풍경이나, 바다풍경이 없는 파소소리라니.... 쯧쯧~이기 때문이다.
"7시 40분에 아침 먹으러 오세요."라고 뒤에서 소리친 종녀씨의 말이 떠올라서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외지인들이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떠났는지를 짐작케 하는 문구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물론 난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공동책임일 뿐이다.
그렇게 아침을 든든히 먹고는 여행객은 길을 떠난다. 일숙객(一宿客)으로 떠돌았던 20대 초반의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한 절에서 두밤을 자지 않기 운동... 뭐 그런 것이었는데 당시로써는 김삿갓이 전혀 부럽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하얀 고무신은 자동차가 되었고, 지팡이 대신(어린 놈이 참 당돌하기도 했지.. ㅎㅎ)에 카메라가 손을 지키고 있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럭저럭 흐른 세월이 40개의 봄을 맞이했구먼...
마니산 입구에 도착하니 특이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국조단군전참배소'라..... 아마도 단군교 계통이 모임안기 싶기도 하다. 하긴 참성단(塹星壇)에다가 참배소를 차리지 않으면 어디에 차리겠는지를 생각해 봐도 타당하다. 참배하는 인연을 지으라는 안내를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마니산 이야기를 잘 써놔서 누구라도 읽어보면 알 수 있겠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두악(頭岳)이 마니(摩尼山)이 된 설명은 어설프다. 그러니까 설명을 하려면 마리가 마니로 변한 이유까지도 해야 할텐데 뭔가 엉금슬쩍 넘어간 느낌이 드는 것은 혹 종교가 다른 사람들의 반발을 염려해서일까?
그래서 언젠가는 마니산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시끌시끌했던 적도 있었는데 마니산의 마니가 불교적인 용어여서라는 설도 있지만 이름은 바뀌지 않고 그냥 넘어간 모양이다.
마니산은 화도면에 있는데 화도면도 원래는 강화도에 딸린 섬이었고 이름은 고가도(古加島)였더란다. 그런데 1880년대 이후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서 마침내 강화도에 붙어버리게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다시 배를 타야만 갈 수가 있는 불교성지인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 역시 교각이 서 있는 것을 지나는 길에 발견했다. 그렇다면 상판만 얹으면 되겠구나. 내년 쯤에는 차타고 바로 보문사 갈 수도 있겠단.....
국립공원은 모두가 무료입장인데 마니산은 예외인가보다. 절에서 받는 사찰관람료는 내야 한다지만 단순히 국립공원인데 입장료를 내라니 반발들도 했을게다. 그러니까 이렇게 구구한 변명문을 늘어 놓았겠지... 그래도 주차비는 받지 않으니 감사 하라잖여... 하긴 주차비 4천원 받는 것보다 입장료 받는 것이 이익이지... ㅎㅎㅎ
어른 개인 2천원. 얼마 안 되네 뭐.....
읽을 거리 많아서 좋구먼.
중요 위치를 확대하면 이렇다.
참성단에 오르는데 계단으로 오르거나, 등산로로 오르거나 선택하라는 안내이기도 하다. 계단으로 오르면 바짝 산밑으로 다가가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되고, 그게 싫으면 좀 돌아가더라도 덜 힘든 등산로를 택하라는 것이다. 물론 셋째 처제의 안내대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경험하기로 무족건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등산로로 가는 걸로 결정했다.
셋째 동서님은 산에 오르는 것이 자신없는 눈치이다. 워낙 산을 못 걸으신다는구먼. 그래도 아들과 며느리와 동행하게 된 마당에 빠질 수가 없어서 내심으로 최면을 걸고 계신 눈치였다. 괜찮을꺼야... 아무렴, 괜찮을 거야 사바하~~!!
아직도 읽을 것이 남았군... 이건 또 뭔 소리랴......
그러니까 결국은 좋은 이야기였구먼. 뭐.... 종교단체의 냄새가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기운이 좋다는 거니까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어. ㅋㅋ
재미있는 것은 갓바위의 엘로드 회전 수가 16회라잖여. 그러니까 갓바위의 기보다 세 배나 더 쎄~~~다는 거지. 대단한 마니산이구먼. 근데 운문사는 왜?
중국 산동성의 공자묘에 갔을 때가 문득 생각나는구먼. 그 곳에서 기 감지에 뛰어난 모 선생이 공자묘 위에서 심룡척을 돌렸더니 60바퀴가 나왔는데 더 돌아가는 것을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바람에 황급히 달아났었지. 참 그때가 생각나는 구먼... ㅎㅎㅎㅎ
언제 봐도 잘 어울리는 7중2화(七中二花)이다. ㅋㅋㅋ 믿거나 말거나 낭월은 그래 생각 한다.
비에 젖은 앉을 자리도 있었지만 내려오는 이를 위해서 마련한 것일게다. 지금에서 쉴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이다.
젊은 조카 내외는 열심히고 추억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귀엽다.
등산로로 접어드니 처처홍엽(處處紅葉)이다. 아니, 처처분홍엽인가? 여하튼 곱기도 하다. 지천이 진달래 꽃이다. 진달래는 우리 말일까? 아니다 한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진달래(眞達來혹은 眞達萊)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낭월도 모른다. 그야 아무렴 어떤가 경상도에서는 참꽃이라고 하는데, 참꽃을 한자로 바꾸면 진화(眞花)로구먼.
8살 적에 안면도로 이사를 했는데, 아버지께서 밭을 일구다가 참꽃나무라고 해서 마당 가에 심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친철한 주현씨라서(ㅎㅎ) 이름표를 떡 하니 써 붙였다. 「참꽃」그랬더니 동네 아저씨가 와서는 비웃는 거다. 진달래도 모르고 참꽃이 뭐냐고.... 그래서 무식한 부친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었지....
그 후로 아버지에 대해서 의심에 찬 마음을 품기도 했었는데 문득 그 진달래를 보니 오늘은 문득 부친이 뵙고 싶다. 하긴 오늘이 청명인가? 11시 39분이구먼. 그렇다면 지금이 10시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청명으로 바뀌는 시간이로구나. 청명한식에 조상 돌보는 습관이 있는 우리 나라를 생각하다가 떠올렸다. 그러니까 지나는 길에 누군가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 또 이런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구나...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뒤쳐지는데 다들 잘도 올라간다.
능선을 타는 길이다. 바위들이 솟아나서 악산(岳山)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디어 계단이 나타난다. 그럭저럭 정상이 가까워 지고 있나보다.
삼칠이 계단이 뭔 말이고? 37계단이란 말이가? 아니면 372계단이란 말이가? 여하튼 세어보진 않을란다. 그냥 갈 뿐이다. 그거 센다고 길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한 살이라도 덜 먹은 놈이 그래도 팔팔하다. 그게 아니라 산에만 올라가면 팔팔하다. 화인은 기감(氣感)이 강해서 기가 좋은 곳에서는 신명이 절로 난다. 그래서 부럽다가도, 수맥에서 맥이 풀리는 것을 보면 전혀 부럽지 않기도 하다. 벽덕스런 마음의 장난이라고 해야지. ㅋㅋㅋ
우야든둥~~~
단 밑에 도달했는갑다. 둘러친 울타리가 자못 엄숙하다.
개방시기를 안내해 놨구먼. 이것도 누군가 참고하시라고 큼직하게 확대해 봤다. 예전에는 밤에 올라가서 제단위에도 올라 갔었는데 이젠 다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는 문구였다. 흐~
그러니깐..... 뭐든 기회가 왔을 적에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에 하지... 하다가 그 다음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한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이 설레는 마음은 뭐지......
오호~~!! 제단이다. 멋지다.
기도하시는 분들 더우실까봐 그늘을 준비해 놓은 나무 한 그루가 더욱 경이롭다. 한 참을 바라봤다.
소사나무란다. 대단한 목신이다.
오랜 시간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면서 살아버텼을 연륜을 생각해 본다.
마침내 제단이다. 단군님께서 할배인 옥황상제께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하늘의 신님들께 기도를 하던 곳이고, 나라를 구해 달라고 기원하던 곳이기도 했을 터이다.
관람객이 잠시 뜸해 지기를 기다렸다.
혼자 있고 싶어서이다. 남자도 가끔은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제단 위를 바라보면서 팔선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의 음악소리와 함께 일진 강풍이 불어오더니만........
진짜로 선녀가 나타났다. 그래서 황홀했다.
근데, 다시 보니 결혼한 선녀인가 보다. 에구.... 파이다~~~
옆에 있는 헬기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 곳이 실제로 마니산 정상이란다. 마침 점심때여서 삼삼오오 짝을 이뤄서 저마다 갖고 온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헬기장이라고 하지만 실은 정상이라고 해야 하지 싶다. 여하튼 마니산 정상에서는 인증샷이 최고이다. 다들 그래서 더욱 분주하시다. 우리도 한 컷~! 짜잔~~
요노무 쎌카는 아무리 해도 모냥이 나오지 않는다.... 하고 있는데 어느 아지매가 도우미로 나서신다. 찍어드릴까요 하는데 불감청고소원이로다. 헐~!
워쩔껴~! 생긴 것이 그런 것을. 그래도 이 성한 두 발로 예까지 올라 올 수 있게 해준 몸이 감사~~!! 동행할 수 있는 연지님께도 감사~~~!!
================================
[마니산 정보] 두산 백과 제공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69.4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참성단 정보] -한민족 대백과에서...
사적 제136호. 단군성조가 366가지에 이르는 나라 다스린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보본(報本:생겨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갚음)의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전국체전 때에는 이 제천단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특히 개천절에는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제천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민족 제1의 성적(聖蹟)으로, 마니산 제천단(摩尼山祭天壇)이라고도 한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 여러 곳에서 이미 나타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강화도 마니산에 있음.) 삼랑성(三郎城)을 쌓으시다(성이 강화 전등산에 있고 세 아들을 보내어 쌓았기 때문에 삼랑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수산집 修山集》의 〈동사 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강화의 옛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터를 닦아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이 제천단에 관한 본래의 연혁을 짐작하게 된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639년(인조 17)에 개수축(改修築)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승 신묵(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참성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내력과 여러 번 고쳐 쌓은 일을 알게 되며, 제천단에 대한 선인들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산은 계단길로 하기로 해서 일행을 따랐는데 계단이 말이 계단이지 이건 뭐 선반포스이다. 일보일보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엘로드로 기 측정을 했다는 안내판도 있다. 낭월은 기에 대해서는 나뭇토막인지라 별로 감흥이 없는데 화인은 기가 솟구치는 곳에서 무진장 행복한 샤워를 했단다. 정상에 들리느라고 꾸물거린 사이에 그랬단다. 좋아도 좋은 줄을 모르니 목석과 다를 바가 없구먼. ㅎㅎㅎ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오니 약수터가 목을 축이라고 마련되어 있구나.
저건 뭐꼬?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보고 가라는 뜻이겠거니....
뭔말인가 하여 확대하면 이렇다는 이야기이다.
더 자세히 읽어 보실 벗님은 사진을 클릭해 보시기 바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다 싶어서 검색을 해 보니까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각 고을마다 각색하여 전한다는 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도끼자루 썪는 줄도 모르고 바둑 구경만 했다는 이야기의 강화도 판인겨?
"그래서 세상은 허허실실이라잖여. 반은 진실이고 반은 허위라는 이야기지. 이 다리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모르겠는감?"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은 반영이 예사롭지 않아서 또 한 장 찍었다. 두두물물이 법문 아닌 것이 없는가 보다.
올라 갈 적에 점찍어 둔 자리에 일행들이 모여서 주문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몸을 이끌고 산에 갔다 오느라고 고생한 다리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줬다.
강화인삼 막걸리라는데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다. 강화산삼감로차라고 했어야지. ㅎㅎㅎ
"전원 무사히 산행을 마친 것을 축하합니다~~!!"
교동도에 다리가 놓였다는 말을 듣고서 가는 길에 이런 쪽지를 받았다. 이름을 써야 했음은 물론이다.
통일 전망대를 가 봤으니 동쪽은 본 셈인데 여기는 서쪽이다.
엄청나다. 이곳이 대한민국이다.
전자장치가 잘 되어 있다고 뻥친다. 노크 귀순이 있기 전까지는 이 말을 믿었지만... ㅋㅋㅋ
이 친구 호연 선생이 기를 쓰고 따라오는 이유를 그때만해도 몰랐다.
하염없이 바라보는 철망 너머의 북쪽 산하.... 연백평야라든가.....
그렇게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은 이유를 나중에 화인이 들려 준다.
"아버지 고향을 보고 왔노라고 하면서 보여드리려고 찍었다네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의 부모님은 고향이 이북이셨구나...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이 가슴마다 한 바가지씩이다.
일박이일땜에 둘러본 셈이기도 한 교동의 옛 마을에는 MBC에서 뭔가 촬영을 한다고 해서 모두 문을 닫았다나 뭐라나... 여하튼 그렇게 해서 북으로 가던 길을 멈추게 되었고 더불어서 여행도 끝나게 되었다.
2015년 4월 6일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