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2 · 금요일
낭월명리학당 一念卽是無量劫 -순간을 영원처럼
인연이 되셔서 고맙습니다
05.22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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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행

[전남장성] 박수량의 백비

[전남장성] 박수량의 백비

[전남장성] 박수량의 백비

  가끔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인연의 싹이 자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서 또 새로운 일로 전개가 될 적에 가끔은 '하늘의 뜻이겠거니....'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그 일로 인해서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도 그와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문득 해 본 생각이다. 일의 발단은 항상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1. 드라마 『서시비사(西施秘史)』를 보다가...

어쩌다가 서시에 대한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2년 작품으로 41부작인데 처음에는 심심해서 올레영화로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에 검색을 해 보니까 전체가 다 올라와 있어서 일단 저장을 한 다음에 틈나는대로 한 편씩 공부삼아 보고 있는 드라마이다. 참고로 유튜브에 있는 것은 중국어에 중문자막이고, 올레TV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중국어에 한글자막이다. 춘추말기에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 사이에 월의 범증이 있고, 범증과 함께 미인계로 등장하는 여인이 서시라는 정도는 대부분 알고 계실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무참한 살상만 이어지는 전쟁드라마와 달리 화사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해 주는 효과도 있다. 백비 호랑이 맹장인 오자서가 등장을 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오자서와 맞짱을 뜨는 인물이 눈길을 모은다. 충신인 오자서를 사사건건 물먹이는 탐관인 백비(伯嚭)가 등장을 하는데 결국은 오자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물이니 아무리 충성을 다하더라도 간계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백비에 대해서 참고자료가 있는가 싶어서 네이버에 검색어를 넣어봤다. 네이버 당연히 백비가 검색이 되었다. 그런데 주루룩~ 훑다가 보니까 뜬금없는(미쳐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백비(白碑)가 걸려든다. 엉~? 이건 뭐지? 일이 그렇게 되어서 박수량(朴守良)까지 가게 된 것이고 그래서 생각에도 없었던 장성나들이를 하게 되었던 셈이다.  

2. 한국에도 무자비(無字碑)가 있었구나....

글자가 없는 비는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 산동성의 태산(泰山) 만댕이에서 본 무자비였다. 태산에 갔을 적에 무자비를 보고서 '그럴 수도 있겠다.... ' 싶었다. 공이 너무 커서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글자를 새기지 말자는 의미로 생겨난 무자비이니 글자를 새겨야 할 석공은 아마도 날로 먹어서 신났을 것 같기도 하다. 태산무자비 그리고 검색을 해 보면, 중국에서는 여기저기 무자비가 등장을 하는데 측천무후의 무자비도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자신의 업적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을테니 무지비를 세우라고 했다니까 스스로 명하여 만든 것이라는 의미에서 본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여하튼 한국에서도 무자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쳐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가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무자비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름도 백비(白碑)라고 했으니 무자비이면서도 조선의 정서에 맞춰서 이름을 붙였던가 싶기도 하다. 일단 흥미를 끄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좀더 따라가 보자는 궁금증이 발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장성나들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서두에서 인연의 끈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된다.  

3. 발상즉시 행동으로 옮겨야지

생각이 났으면 가봐야 속이 시원하지. 그래서 항상 외우는 주문이다. 발상즉행동(發想卽行動) 대부분은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왕왕 헛다리를 짚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하는 것은 선천적인 병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예약된 상담을 다 마치고 일정표에는 백판(白板)이 된 것을 확인하고는 심심해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얼굴에 쓰여있는 연지님을 충동질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짧디짧은 겨울의 저녁해가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DSC02489 백비까지는 143km라.... 대략 잡아서 두어 시간 걸리겠구먼. 조금 서두르면 1시간 반도 가능하겠지. 그야 운전자의 능력과 기분에 달렸으니 조수의 소관은 아니다. 다만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앉아있으면 다 되는 것이니까 더 할 일이 없다. 가끔 물이나 공급하고, 심심하겠다 싶으면 목캔디를 하나 제공하는 정도..... DSC02490 하늘은 전형적인 겨울날의 풍경이다. 구름이 옅게 드리우고 분위기는 음산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춥지는 않은 날이다. 겨울나들이의 조건으로는 이만하면 최상이다. 더구나 눈도 오지 않으니 더 바랄 것이 없는 셈이기도 하다. 집을 나서는데 가장 큰 악운이라면 폭설이니까 말이다. DSC02493 호남고속도로이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달랑달랑하니까 차도 덩달아서 마음이 급해지는 모양인지 조금씩 빨라지는 느낌이 든다. 박수량 선생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속도계를 바라본다. DSC02498 한참 신나셨구나.....  ㅎㅎㅎ 그럴 수록 나야 좋지.... 그럼 선생을 만날 시간이 더 단축될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구름 속으로 햇기가 사라진 시간에 백비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가 있게 되었다. DSC02499 이렇게 해서 백비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거의 두 시간이 걸린 셈이군. 여하튼 아직 어둡진 않았으니 선생님께 참배를 할 시간은 충분하여 다행이었다. DSC02501 옳지~~!! 뜻이 동하면 행이 따르고 행이 따르면 도달하리라.... ㅎㅎㅎ 무슨 뚱딴지같은 명언을... ㅋㅋ DSC02500 명종이 명하여 백비를 세우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청백리가 얼마나 드물었으면 왕이 이러한 명을 내렸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봄직 하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이나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오직 백성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그 시대에서나 지금에서나 빛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하겠다. 비록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왕왕 충신과 청백리는 있어왔는데 명종은 백비를 하사하실 생각을 했으니 또한 특별한 왕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러다가 또 명종을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가 조선왕조실록이라도읽게 될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혼자 웃는다. DSC02502 DSC02504 왔노라! 보았노라.... 쳇~! 뭐하는 짓고... ㅎㅎ 그런데 왠지 기분이 흐뭇하여 이런 기분이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을 뿐이다. 박수량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에 나름 흥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예전같았으면 나경이라도 지참했겠지만 풍수공부를 손에서 놓은 이후로는 그것은 챙기지 않게 되었다. 그냥 선생이 있어 찾아가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DSC02506 과연~!  백비이다. 글자 한 점 없다. DSC02508 중간에 흠이 있어서 만져봤는데 사냥꾼이 총으로 사격연습을 한 자국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총을 든 사람이 백비의 의미를 모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아닐거야.... 그럴리는 없지.... 그래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그럼..... DSC02505 백비를 세우게 된 연유가 적혀있어서 누구라도 한 번 읽으면 소상하게 알 수가 있는 이야기였으니 구태여 중언부언을 할 필요는 없지 싶다. 이렇게 해서 백비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마치거니와, 이제부터는 아곡선생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 하지 싶다.  

4.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선생에 대해여

아곡의 아(莪)가 초면이다. 그래서 찾아보니 지칭개란다. 지칭개는 나물이기도 하다. 지칭개 지칭개꽃 언뜻 보면 엉겅퀴 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시가 없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파리는 민들레와 닮기도 했다. 여하튼 아곡(莪谷)은 '지청개골'인 셈이로구먼. 동네 이름에서 아호를 따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은 선생이 태어나신 동네가 황룡면 아곡리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멋있는 호를 따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난 동네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동네 이름도 특별할 것도 없는 '지청개골'인데 말이지... 그래서 인품은 이러한 곳에서도 고고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득 낭월이 낭월(朗月)인 것이죄송스러워졌다. 그냥 수야(水也)라고 할 걸 그랬나.....? 왜냐하면 낭월이 태어난 마을은 이서면 수야리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잠시나마 그런 생각도 해 봤다는 것..... 아곡 선생으로 인해서 잘 사용하는 아호 조차도 부끄럽게 느껴지니 선생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소감이다. 아곡 선생은 자신을 위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다. 선생의 이름 석자는 부모님이 주셨을 것이니 자기 것이 아니고, 아호는 태어난 동네 이름을 빌려왔을 뿐이니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며, 집은 남의 초가에 세들어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또한 집도 한 칸 없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서울에서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오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원망이 생길 법도 하겠지만 그런 부친을 나중에는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죽은 다음'을 위해서 준비하는가.... 그런데, 아곡 선생은 오로지 지금 현재의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 하셨을 뿐, 그 다음에 자신이 죽은 다음에 시신을 어떻게 고향으로 옮겨갈 것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 앞에 청백리(淸白吏)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조차도 거북스러워 하시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간 본질에 대해서 100% 행하셨던 모습에서 더욱 감동이 전해진다.  

 5. 김인후() 선생이 지은 묘지명()

묘지명 묘지명2 묘지명3 혹 원문을 보고 싶은 벗님이 계실까 하여 국역 국조인물고에 있는 이미지를 첨부해 본다. 혹 읽어보려고 해도 글자가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벗님을 위해서 원본 그대로 올렸으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판이 나타날 것이니 전혀 그런 염려(혹은 핑계.ㅎㅎ)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다. 물론 필요한 것은 이 묘지명을 풀이한 한글판이다. ㅎㅎㅎ 어디 읽어 보자.....  

공의 휘()는 수량()이고 자()는 군수()인데, 태산현()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향선생() 김개() 학사()에게 수업하였는데, 침착하고 근면하여 한 글자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으므로 과장()에 출입할 적에 책 한 권도 휴대하지 않았고 시문을 지을 때 법도가 있었다. 정덕() 8년(1513년 중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덕 9년(1514년 중종 9년)에 을과() 제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가 광주() 주학()의 분교관()이 되었는데, 김세필() 공이 광주 목사(使)로 있었다. 그가 일찍이 공과 더불어 국학()의 사제간()으로 있을 때 정신을 쏟아 묻기를 좋아하는 공을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문장을 논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등 부지런히 하였다. 그 이듬해에 승문원()으로 들어가 부정자()에서 박사()에 이르렀고, 선무랑()의 품계에 올라 성균관 전적(),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전임하였으며, 호서 도사(西)로 나가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손중돈() 공을 보좌하였다. 임기가 차자 형조 정랑()으로 전직되어 관직()을 그전처럼 겸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가 형조()의 벼슬로 세 번 왕래한 뒤에 병조 정랑()으로 옮기었다. 어버이가 늙어 봉양을 하기 위해 지방 고을을 요청하여 고부 군수()에 임명되었는데, 가정() 4년(1525년 중종 20년)이었다. 고부에 부임한 지 3년이 되어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자 헌납()에 임명되었고 장령(), 봉상시 첨정(), 사간(), 사도시 부정()을 역임하였다.

가정 10년(1531년 중종 26년)에 사성()으로 있다가 어머니를 위해 또 사임하고 보성 군수()로 나갔다가 1년이 넘어 사예()로 돌아와 또 사성 및 내섬시 정(), 군기시 정()이 되었다. 가정 15년(1536년 중종 31년)에 승문원 판교()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다가 특별히 통정 대부() 병조 첨지()로 승진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등의 벼슬을 겸하였다. 좌승지()로 옮길 무렵에 또 명하여 가선 대부()로 승진시켜 호조 참판()에 임명하였다. 가정 16년(1537년 중종 32년)에 함경도 관찰사(使)로 나가 세 번 병환을 이유로 사직한 끝에 군직()으로 개정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한성부 우윤(), 동지중추부사(), 공조 참판()이 되었고, 그 뒤 또 호조()로 옮기었다. 가정 18년(1539년 중종 34년)에 도총부 부총관()으로 있다가 다시 예조 참판()이 되었고 또 어머니 봉양을 하기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담양 부사(使)로 나가 3년이 다 되도록 눌러앉아 어머니를 모시었다. 가정 21년(1542년 중종 37년)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 상()을 마치자 조정의 명이 누차 하달되었으나 편두통()을 앓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벼슬하지 못하였는데, 때는 지금 주상(, 명종)이 왕위에 오른 그 다음 해였다. 가정 25년(1546년 명종 원년)에 비로소 상호군()에 취임하였고 자헌 대부()로 승진하여 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청렴한 덕에 대한 포상이었다. 한성 판윤(),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가정 29년(1550년 명종 5년)에 의정부 우참찬()이 되어 지경연의금춘추사(), 오위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가정 30년(1551년 명종 6년)에 조정에서 경기 관찰사(使)로 의망하려고 품계가 높은 사람 중에 인심을 진압할 수 있는 자로 추천하여 즉시 공에게 서울의 직책을 가지고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1년 만에 조정으로 들어와 도총관()을 겸임하였고 재차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다가 우참찬()으로 돌아왔고 호조 판서()로 임명되었다가 또다시 판윤이 되었다. 가정 33년(1554년 명종 9년) 정월 경신일()에 지중추부사로 병환이 나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을 보고하자 주상이 2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신미일()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내심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밖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하였도다. 집안에 남은 곡식이 없으니, 더욱더 가상히 여기고 애석히 여기도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담당관을 명하여 특별히 예장()을 치르게 하고 또 감사()에게 하명하여 공의 가문을 후히 구휼하게 하였으니, 대개 경연()의 관원이 공의 청빈()에 감복한 나머지 진강()의 기회를 통해 아뢰었던 것이다. 공은 간이하고 중후하며 신중하고 치밀한데다가 예법()으로 자처하여 자신의 극복이 갈수록 강하였으므로 옷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겸손하였다. 문장이 있었으나 드러내지 않았고 술은 정해진 양이 없었으나 강하게 자제하여 혼란에 이르지 않았다. 사람과 사귈 때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고 향리에 있을 때 근신하여 항상 만족할 때 그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다. 담양 부사로 있을 적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자 공이 몸소 약을 달이느라 수십일 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대변이 단지 쓴지 맛보아가며 약을 써서 병환이 나았다. 상복()을 입을 때 예를 지키기에 근면하여 상막()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상복을 벗은 뒤에도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맏형이 있기 때문에 혼백()을 모시고 따라가 초하루와 보름의 제전()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전라 감사()로 있을 적에 곧바로 재실()로 가서 묘소를 청소하고 위아래를 두루 살펴보는 등 끝까지 나태하지 않았다. 행실이 완성되어 정사가 닦아졌고 외직으로 옮겨 다스리자 가는 곳마다 직책이 수행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의리에 벗어난 일은 사람들이 감히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는가 하면 조정에 나가 38년 간 벼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나 조그만 저택도 없었다. 임자년(, 1552년 명종 7년) 겨울에 주상이 또 청렴 근신한 관료를 포상할 때 대궐의 뜰에 연회를 열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으며, 술과 음악을 모두 최고의 것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조용하게 취하도록 마시다가 파하라 명하고 저녁이 되자 궁중의 촛불을 들려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늘의 재앙이나 변방의 경보가 있을 경우에는 항상 걱정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2월 병신일()에 발인()하여 장성현()으로 돌아와 5월 경신일()에 호구() 선영의 왼쪽 축좌 미향()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공의 증조 어모 장군() 호분위 대호군() 휘() 문아()는 통정 대부() 좌승지() 겸 경연 수찬관()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할아버지 선략 장군() 휘 현손()은 가선 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휘 종원()은 자헌 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어머니 이씨()는 정부인()의 직첩을 추증받았다. 공이 통정 대부 전 행부사직() 유옥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정부인()에 봉해졌다.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박사우()는 진사() 출신으로 행의금부도사()이고 둘째 아들 박사로()는 풍저창 봉사()이다. 손자는 두 명인데, 박상경(), 박상근()이다. 공의 종손서() 오대박()이 도사의 명을 받고 족인() 김인후()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병들고 문장이 졸렬하여 공의 미덕을 천명()할 수 없으나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금()처럼 정밀하고 옥()처럼 단단하여, 안에 쌓아 밖을 제재했도다. 검소하고 겸손하여 해되는 사람과 사귀지 않았도다. 선조()에게 큰 영광을 안겨 드렸고 죽은 뒤에 특별한 은전()을 받았도다. 자손들은 힘써 경사를 이어받아 영구히 끊임이 없도록 할지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수량 [朴守良]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오호..... 그렇구나.... 이 글은 김인후 선생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김인후 선생은 또 뭔 양반인지가 궁금해진다. 뭔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적어도 아곡 선생의 묘지명을 지을 정도라면 살펴봐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 김인후를 찾으니 필암서원(筆巖書院)이 등장하네....

김인후라는 이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 밖에..... 물론 박수량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으니 습자지 상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만다.  그래서 틈이 나는대로 부지런히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게으름은 날이 갈수록 팽창하고,학구열정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그야말로 말만 번지르르~~ 하게 쓰는 기술만 나날이 느는 모양이다. 흐~ 어둠 속에 잠긴 백비를 떠나서 장성읍으로 들어갔다. 저녁도 먹어야 하겠고, 하루 묵을 숙소도 찾아야 해서였다. 아무래도 장성까지 와서 필암서원을 둘러보지 않고 그냥 간다면 다시 또 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아담한 고을이라서인지 머물 곳도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거의 한 바퀴를 돌다시피 한 다음에서야 겉으로 보기에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숙소에서 하루 머무르고는 다음 날 다시 읍내에서 가까운 필암서원을 찾았다. DSC02530     DSC02532   DSC02533   DSC02535   DSC02541   DSC02542   DSC02543   DSC02545   DSC02547   DSC02548   DSC02555   DSC02556   DSC02559   DSC02646   김인후 선생도 대단했던 학자였다는 것을 자료를 보면서 이해하게 되었으니 조선 중기의 두 분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본관 울산. 자 후지(). 호 하서(西)·담재(). 시호 문정().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 김온()은 서울에서 살았으나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부친은 종9품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 총명했으며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에게도 지도를 받았다. 1528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하였다. 뒤에 설서()·부수찬()을 거쳤고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누차 교리()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인종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술과 시로 방황하였다고 전한다.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의 이기일물설()에 반론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문묘()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 남원의 노봉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西)》 《백련초해()》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가, 9월에는 추향제()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인후 [金麟厚] (두산백과)

두산백과의 자료를 살펴봐도 과연 대단했던 성리학자셨구먼. 이렇게 훌륭하신 대 학자까지도 겸하여 뵙게 되었으니 1박2일의 나들이도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오늘의 주인공은 박수량 선생이므로 필암서원과 김인후 선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 정도로 정리한다.  

7. 돌아오는 길에....

기왕 장성까지 왔는데 좀 더 둘러보고 갈 곳은 없을까 싶어서 지도를 뒤적거리다가 요월정(邀月亭)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인데 요월을 보니 문득 대북의 목책에서 차를 마셨던 요월차방이 떠오르기도 한다. DSC02615 DSC02619 DSC02630 DSC02626 DSC02624 DSC02622 DSC02631 내 그럴 줄 알았지. 여기에서 다시 김인후 선생을 만나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기대승 선생까지 만나게 될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이번 나들이는 생각지 못한 인물들을 자꾸 만나게 되는 구먼. 사실 김인후는 몰라도 기대승은 안다. 왜냐하면 퇴계선생과 성리학 토론을 했던 인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들이 서로 요월정에서 자연과 더불어 도를 탐구했다고 하니 새삼스럽게 경건한 느낌이 든다. 퇴계 선생은 김인후 선생과 성균관에서 동문수학을 했던 것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기대승 선생이 퇴계 선생과 맞짱을 뜨는데 훈수를 둔 분이 바로 김인후 선생이 아니겠느냐는 추리를 해 볼 수도 있지 싶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묶어서 소설을 쓴다면 또한 한 시대의 고고한 학자들의 토론회에 동참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2015년 1월 15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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