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10.28 · 수요일(乙亥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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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④ 조기역사관과 군사터널

연평도④ 조기역사관과 군사터널

 


조기를 담북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연평도다~!

 


 

 

 


연평도에 도착해서 민박집에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묵기로 예약한 사람입니다."
"예? 누구시라고요? 예약하셨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갑자기 느낌이 싸~해진다.

혹시 몰라서 예약을 진작에 해 뒀었는데 누락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 확인은 되었어요. 그런데 빠트렸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다른 곳이라도 연결해 주시면 되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 차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연평도에 들어왔다.

연평도는 다른 포구와 다른 점이 있었다.

 


가까운 곳은 바닥이 얕아서 큰 배가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바깥에 마련한 연평항은 당섬을 의지해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 내려서 걸어가든 차를 타든 이동을 해야 마을에 들어간다.

 


내일까지 타고 다닐 차도 받았다. 렌터카다. 다행이다. 든든하군.

 


먼저 민박에서 잡아 준 신일민박이다. 아무렴 워뗘. 따시게 편히 쉬면 되지.

 


우선 조기역사관으로 향했다. 마음은 가래칠기에 가 있지만 어차피 인접지역이다.

먼저 연평도에 왔으니까 조기역사관부터 둘러봐도 시간은 충분하겠다. 3시 44분이다. 

 


 

 

 


 

 

 


 

 

 


 

 

 


 

 

 


 

 

 


 

 

 


 

 

 


 

 

 


 

 

 


 

 

 


 

 

 


 

 

 


설마 조기의 수호신이겠어? 

조기 많이 잡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장군님인데. ㅋㅋㅋ

 





















 

연평도, 임경업 장군과 조기잡이의 기억

연평도(延坪島)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역사와 전설이 겹쳐 있는 섬이다. 오늘날에는 서해의 접경 지역이자 꽃게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섬의 지난날을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조기가 있다. 봄이면 조기 떼가 올라왔고, 조기를 따라 어선이 모여들었으며, 어선을 따라 상인과 물자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의 마음속에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있었다. 연평도의 조기잡이를 이해하려면 물고기와 어장뿐 아니라,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셨던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평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며,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뉜다. 조기 파시와 임경업 장군의 사당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대연평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연평’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처럼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황해도 해주와 연결된 생활권에 속하였으므로, 오늘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찾아가는 섬이라는 인상만으로는 옛 연평도의 위치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황해도 연안과 서해 여러 포구를 이어 주는 바닷길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섬이었다.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황해도 해주목 항목에는 연평평에서 조기가 나며, 봄과 여름이면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여 그물로 잡고, 관청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나라의 비용에 보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서 조기는 석수어(石首魚)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조선 전기에 이미 외지의 어선들이 찾아올 만큼 어장이 발달하였고, 국가에서도 그 생산과 유통을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기록은 임경업 장군의 전설을 읽을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연평도에는 장군이 처음으로 조기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실제 조기잡이는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군을 조기잡이의 시조라고 부르는 것은 어업의 시작 연대를 밝히는 역사적 설명이라기보다, 어민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열어 주고 지켜 주는 존재로 장군을 받아들였다는 신앙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알맞다.

그렇다면 임경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1594년(甲午)에 태어나 1646년(丙戌)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무장이다. 1618년(戊午)에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군사적 임무를 맡았으며, 북방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백마산성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1636년(丙子)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백마산성을 지켰으나, 청군은 이곳을 우회하여 조선의 수도로 진격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그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하고 청나라에 맞서려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청나라와의 관계뿐 아니라 조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도 얽혔다. 결국 1643년(癸未)에 배를 타고 명나라로 건너갔으며, 뒤에 청나라에 붙잡혔다가 조선으로 송환되어 국문을 받던 중 죽음을 맞았다. 나라를 지키려 했던 장수의 비극적인 생애는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러 설화로 이어졌다.

연평도의 조기잡이 전설도 장군의 중국행과 연결되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의 세부는 조금씩 다르지만,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군이 중국으로 향하던 중 먹을거리와 식수를 구하기 위해 연평도에 들렀다. 일행에게 먹일 반찬이 부족하자, 장군은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베어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에 꽂아 두도록 하였다. 이후 물이 빠졌을 때 살펴보니 나뭇가지의 가시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로 허기를 면하였고, 섬 주민들도 장군에게서 조기를 잡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무대는 막연한 바닷가로만 남아 있지 않다. 당섬 남쪽의 안목 일대, 곧 안목 선착장과 모이도 사이의 갯골이 그 장소로 전해진다. 이곳은 ‘안목살터’ 또는 ‘안목어장’으로 소개된다. 오늘날 그 바다를 바라보면 평범한 물길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섬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장군이 조기를 잡아 사람들을 먹였던 장소이다. 지명과 물길에 이야기가 붙어 있으니, 전설은 책 속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풍경의 일부가 된다.

나뭇가지를 꽂아 물고기를 잡았다는 대목은 전통적인 어살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살은 물고기가 드나드는 길목에 말뚝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시설을 만들어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는 어로 방식이다. 전설 속에서 조기가 가시에 걸렸다는 장면을 실제 어획 과정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던 어민들의 경험이 이야기의 바탕에 놓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때와 물길을 알아야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 이치를 꿰뚫어 보는 장군은 생업의 길을 알려 주는 존재였던 셈이다.

다만 전설을 소개하면서 특정 연도를 단정하는 것은 주의할 일이다. 일부 안내에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와 장군이 중국으로 건너간 일을 한데 묶기도 한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1636년(丙子)에 일어났고, 장군이 배를 타고 명나라로 건너간 행적은 1643년(癸未)의 일이다. 연평도에 들러 조기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얽힌 전설로 소개하는 것이 정확하다. 전설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실제 행적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평도 주민들이 임경업 장군을 모신 곳이 충민사(忠愍祠)이다. 대연평도 면사무소 뒤편 언덕에 자리한 이 사당은 장군을 기리는 장소이면서, 어민들이 풍어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던 신앙의 공간이다. 서해안에서 임경업은 전쟁의 영웅이라는 의미를 넘어 조기잡이의 신, 어업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이러한 믿음은 연평도에만 머물지 않고 서해안 여러 지역으로 이어졌다.

어민들에게 바다는 먹고사는 터전인 동시에 생사를 가르는 곳이었다. 고기를 많이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서 포구로 돌아오는 일은 그보다 앞서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면 충민사는 한 장수의 공적만을 기념하는 사당으로 그치지 않는다. 출어를 앞둔 사람의 긴장, 배를 기다리는 가족의 걱정, 한 철의 어획에 살림을 걸었던 마을의 소망이 함께 모이는 곳이다. 장군을 향한 신앙에는 풍요를 바라는 마음과 바다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란히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기는 왜 연평도까지 올라왔을까. 옛 연평어장을 이루었던 참조기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회유성 어류이다. 남쪽 바다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 떼가 봄철 산란을 위해 서해를 따라 북상하였고, 그 이동 경로에 여러 어장이 형성되었다. 남쪽에서 먼저 조기잡이가 시작되고, 계절이 진행되면서 어선들도 북쪽으로 움직였다. 연평도의 조기철은 대체로 4월 말부터 6월 초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연평도의 번성은 섬 앞바다만의 일이 아니라, 서해를 따라 이어지는 조기의 이동과 어민들의 이동이 만나는 결과였다.

옛 연평어장은 섬 바로 앞의 바다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황해도 연안의 등산곶과 구월봉 부근까지 이어지는 해역도 중요한 조업 공간이었다. 어민들은 육지의 봉우리와 해안 지형을 보고 배의 위치를 가늠하였다. 지금처럼 전자 장비가 항로와 어장을 알려 주지 않던 시절에는 산의 모양과 물빛, 바람과 조류를 읽는 경험이 곧 생업의 기술이었다.

조기의 도착은 섬의 생활 달력에도 흔적을 남겼다. 연평도에서는 음력 사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무렵이면 조기 떼가 어장에 들어온다는 경험이 담긴 표현이다. 모든 조기가 그날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해마다 돌아오는 조기철을 친숙한 말로 기억한 것이다. 어민들에게 계절은 달력의 숫자뿐 아니라 어떤 물고기가 어느 물때에 찾아오는가로도 구분되었다.

조기잡이가 한창이던 때의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다. 파시는 물결 위의 시장이라는 뜻으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어장에 어선과 상선이 모여 수산물을 사고파는 장을 말한다. 조기를 잡는 배와 그것을 사서 육지로 운반하는 배가 바다에서 거래하였고, 섬에는 그 사람들을 상대하는 상점과 음식점, 숙박시설과 선구점 등이 들어섰다. 조기가 올라오는 짧은 기간에 작은 섬이 거대한 계절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파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도 있다. 1934년(甲戌)의 신문 기사에는 주민이 약 천 명이던 연평도에 조기철이면 선원과 상인 약 2만 명이 모여들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기마다 규모는 달랐겠지만, 작은 섬의 평소 생활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인파였음을 알 수 있다. 수천 척의 배가 모였다는 기록과, 배를 건너다니며 포구에서 당섬까지 갈 수 있었다는 회고도 전해진다. 뒤의 이야기는 정확한 거리를 재어 적은 사실이라기보다, 바다를 빽빽하게 채웠던 선박의 모습을 기억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알맞다.

조기가 돈이 되는 과정에는 잡는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배에서 쓸 물과 식량, 땔감과 어구를 공급하는 사람도 필요하였다. 잡은 조기를 사들이고 보관하여 육지로 옮기는 상인도 있어야 했다. 마포에서 물자를 싣고 온 배들이 조기를 받아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일부는 해주를 거쳐 개성으로 유통되었다. 연평도의 바다와 도시의 밥상이 배와 포구를 통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기 한 마리는 어민의 소득이면서 상인의 상품이었고,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물산이었다.

사람과 돈이 한꺼번에 모이는 파시에는 흥겨움과 그늘이 함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현지 조사에는 조기철의 큰 벌이와 붐비던 골목을 회상하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편으로는 술집과 유흥업소가 번성하고, 도박과 다툼도 벌어졌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돈이 넘쳤다’는 표현만으로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기는 어렵다. 거친 바다에서 힘들게 번 돈이 잠깐 사이에 사라지기도 하는 곳, 풍어의 기쁨과 불안정한 생활이 맞물린 곳이 파시였다.

그렇게 번성하던 연평도의 조기 파시도 끝을 맞았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조사에서는 1968년(戊申)을 마지막 파시가 열린 해로 전한다. 그러나 이를 그해부터 연평도 바다에서 조기가 단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전국의 어선과 상인이 몰려들 만큼 큰 조기어장과 계절 시장이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조기가 예전처럼 북상하지 않게 된 이유는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다. 해양환경과 수온의 변화, 어선의 동력화와 어구 발달에 따른 어획 압력, 산란 환경의 변화 등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어민들의 경험과 연구자들의 견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조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사라졌다고만 하거나, 수온 변화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면 복잡한 바다의 변화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조기의 이동과 어장의 변화가 섬 전체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연평도의 대표적인 수산물은 꽃게이다. 조기 파시의 명성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섬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대연평도의 조기역사관은 지나간 조기잡이와 파시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충민사는 그 바다에 삶을 맡겼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한다. 안목의 물길에서는 조기를 잡아 사람들을 먹였다는 장군의 전설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장소들을 함께 바라보면 연평도의 풍경은 항구와 해안 너머로 한층 깊어진다.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준 영웅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고, 충민사에는 만선과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다. 파시의 기억에는 짧은 봄철에 생계를 걸었던 수많은 사람의 분주함이 스며 있다. 연평도의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그 모든 시간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눈앞의 물결 아래로 조기 떼가 지나가던 길을 떠올리면, 조용한 포구에서도 한때 이 섬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기의 신이 계시는 임경업 장군 사당]-----------------------------------

 


 

 

 


 

 

 

 

















까치발샷으로 전경을 담았다.



장군님 울 밖에서 문안 여쭙습니다~!



조기잡이의 수호신을 모신 연평도 충민사

대연평도 마을 뒤편 당산에 자리한 충민사(忠愍祠)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이름의 끝 글자는 절을 뜻하는 사(寺)가 아니라, 신위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사(祠)이다. 이곳은 장군을 추모하는 장소이면서, 연평도 어민들이 풍어와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해 온 신앙의 공간이다. 사당 안에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충민사의 유래에는 장군이 연평도 주민들에게 조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사진 속 안내판도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맞설 뜻을 품은 임경업 장군이 중국으로 향하던 도중 연평도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일행에게 필요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장군은 가시나무를 베어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에 꽂도록 하였다. 물이 빠진 뒤 살펴보니 나뭇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고, 이를 잡아 일행의 식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장군의 지혜로 조기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여겨, 그 은혜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는 당섬과 모이도 사이의 안목 일대이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에 나뭇가지를 세웠다는 내용에는 조수의 흐름과 물고기의 이동을 이용하던 옛 어민들의 경험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장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터의 무장을 넘어, 바다에서 먹고살 길을 알려 준 은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현재의 사당 자리에 얽힌 전설도 있다. 원래 사당은 당섬에 있었는데, 어느 날 불이 나 건물이 모두 타 버렸다고 한다. 이때 장군의 영정이 타면서 그 재가 바람에 날려 지금의 충민사가 있는 당산나무에 내려앉았다. 주민들은 장군의 혼이 화재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받아들여, 그 자리에 다시 사당을 마련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사당의 이전 과정을 입증하는 기록이라기보다, 주민들이 지금의 터를 신성하게 여기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전설이다.

충민사를 처음 세운 정확한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다고 소개하는 자료도 있으나, 학술조사에서는 최초 건립 시기를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특정 연도를 사당의 창건 연대로 단정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진 임경업 신앙을 바탕으로 사당이 유지되어 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반면 사당을 다시 짓고 고친 과정은 중수기(重修記)를 인용한 조사 자료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1931년(辛未) 봄 화재로 사당이 소실되었고, 1954년(甲午)에 중수하였다. 그러나 이후 폭풍으로 다시 훼손되어 1969년(己酉) 12월에 개수하였다고 한다. 『인천 섬의 민속』에는 여기에 더하여 1983년(癸亥)의 세 번째 중수도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충민사는 이처럼 화재와 풍해를 겪으면서도 거듭 고쳐 지켜 온 사당이다.

충민사에 모인 사람들의 바람은 조기를 많이 잡게 해 달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민들은 출어에 앞서 장군에게 풍어와 안전을 빌었으며, 마을에서는 공동의 제의를 통해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무사 귀환이, 육지에서 기다리는 가족에게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충민사는 그러한 마음이 모이는 장소였다.

안내판의 뒷부분은 장군에 대한 믿음을 한 가지 전설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진에서 판독되는 내용에 따르면, 명나라를 돕고 청나라에 맞섰던 장군의 행적과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숭모가 전설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존경과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이 만나, 장군을 어업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는 해석이다.

다만 장군이 연평도에서 조기잡이를 처음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미 연평도 일대에 봄과 여름이면 여러 지방의 어선이 모여 조기를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임경업 장군이 살았던 시대보다 앞선다. 따라서 충민사의 전설은 조기잡이의 최초 발명을 증명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업과 안전을 장군에게 의탁하였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 알맞다.

충민사를 바라보면 작은 사당 하나에 섬사람들의 긴 세월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조기 떼를 기다리던 봄, 만선으로 돌아오던 배, 거센 바람 속에서 가족의 귀환을 빌던 마음이 이곳에 함께 쌓였을 것이다. 건물은 여러 차례 무너지고 고쳐졌지만,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은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았다. 충민사는 연평도의 조기잡이 역사와 그 바다를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기억하게 하는 곳이다.

 

------------[동굴진지]------------------------------

 


조기역사관의 뒤로 돌아가면 있는 군 터널 관광시설을 미처 몰랐다.

다음날에서야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들렀지만 여행코스에서는 조기역사박물관 간 김에 들르면 되겠다.

 


 

 

 


 

 

 


 

 

 


 

 

 


 

 

 


 

 

 


터널 양쪽으로는 연평도와 옹진군의 정보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굴 끝에는 북쪽이 마주 보이는 곳에 커다란 대포가 자리하고 있다.

 


 

 

 


북한이 손에 닿을 듯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북한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들은 한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만 북한이라고 하는 것도 격이 안 맞는 듯하고...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ㅋㅋㅋ

 


 

 

 


 

 

 


 

 

 


앞의 해안이 가래칠기 해변이다. 그곳이 궁금하다.


다 놀았으면 가자~!!

 


 

 


 

 

 


등대공원도 같이 있다.

사당은 마을 뒤편 언덕 위에 있다.

임경업 장군 영정을 보려면 면사무소에 들러서 신고하면 되는 모양이다.

영정을 조기역사관에서 봤던 고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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