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주학명인전⑧ 하건충(何建忠)】
차례
[머리말] 7
[일러두기] 13
[등장인물] 17
제1화 가건중심(可健中心)을 찾아온 여자 21
제2화 묻고 또 묻다 55
제3화 가건중심(可健中心)의 사람들 79
제4화 나는 어디에 있는가 111
제5화 나를 둘러싼 열 가지 마음 141
제6화 여덟 자리와 두 개의 그림자 171
제7화 나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215
제8화 마음과 행동사이 263
제9화 고정된 것은 무엇인가 307
제10화 고정된 자리, 움직이는 나 353
제11화 질문이 태어난 시각(時刻) 409
제12화 오래된 지도, 새로운 지도 475
제13화 한 기둥 안의 여러 마음 529
제14화 일곱과 세 사이 595
제15화 책에 없는 스무 기둥 635
제16화 첫 생각과 다음 생각 679
제17화 돈과 마음의 거리 725
제18화 자리의 높이, 사람의 높이 791
제19화 가족의 자리, 마음의 거리 849
제20화 남은 길 883
[작가의 말] 937
------------------------------------
작가의 말
질문이 남아 있는 자리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대개는 무엇인가를 정리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하건충(何建忠)의 연보를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두 권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 외에는 생애를 구체적으로 복원할 만한 자료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만날 수 있었던 하건충은 그의 책 속에 있는 하건충이었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정리된 것보다 새로 생긴 질문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그의 명리 이론이 궁금했다.
어떻게 십성(十星)을 인간의 심리와 연결했는지, 궁위(宮位)와 성(星)을 어떤 방식으로 나누었는지, 육친과 재물과 관직을 왜 마음의 문제까지 확장해서 보았는지가 흥미로웠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관심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이 사람은 왜 여기까지 생각했을까.
왜 명리를 공부하다가 인간의 심리를 말하게 되었고, 인간의 심리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본원(本原)과 근심(根心)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그 질문이 오래 남았다.
하건충의 이론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도 있고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때로는 놀랄 만큼 날카롭고, 때로는 너무 성급하게 결론에 다가간 것은 아닐까 싶은 대목도 있었다.
재물에 관한 설명이 그랬다.
재물을 대하는 사람의 심리를 깊이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현실적인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 마음의 구조를 조금 더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위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보다 사람이 권위와 지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는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면 이런 것부터 묻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마음을 보려고 하셨는데, 왜 여기에서는 다시 현실의 크기와 높이로 돌아가셨습니까?”
일주의 심리 분석에서도 의문이 남았다.
육십갑자 가운데 마흔 개만 설명하고 나머지 스무 개는 아무 설명 없이 빠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독자가 스스로 찾아보라는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조금 무책임하지 않은가 싶었다. 적어도 내가 책을 읽으며 느낀 하건충은 이론의 구조를 매우 꼼꼼하고 촘촘하게 세우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스무 개의 간지를 아무 이유 없이 남겨 두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가건신괘(可健神卦)는 더욱 궁금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소개에는 분명히 가건신괘가 등장한다. 그런데 정작 본문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구체적인 운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하건충을 만나면 반드시 묻고 싶었던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만날 수 없었다.
질문만 허공에 남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름대로 그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고, 실제 상담에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운용의 틀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더 묻고 싶어졌다.
“이것이 선생님이 생각했던 가건신괘가 맞습니까?”
현실의 하건충에게 물을 수 없다면 소설 속에서라도 물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 질문을 던졌고, 소설 속 하건충에게 답을 맡겼다.
궁위에 대해서도 그대로 따르지만은 않았다.
하건충은 월지(月支)를 정관궁(正官宮)으로 놓고 여성에게는 남편의 의미를 연결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시대적 관점이 남아 있는 해석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일지(日支)를 남녀 공통의 배우자궁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개진했다.
남자든 여자든 배우자는 일지에서 살핀다는 쪽이 오늘날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지장간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진토(辰土)의 지장간 비율을 하건충은 戊5·癸2·乙3으로 정하였다. 나는 진토가 고(庫)의 성격을 지닌 이상 그 고기(庫氣)의 비중이 좀 더 높아야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다른 진술축미(辰戌丑未)도 같은 관점에서 다시 검토했다.
이러한 수정들은 하건충의 원전을 고쳐 쓰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의 이론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그가 세운 틀 안에서 다시 묻고 싶은 문제가 생겼고, 그 질문을 작품 속에서 하건충에게 되돌려 준 것이다.
어쩌면 마음 한쪽에는 그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 하건충이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책 어딘가에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육친을 궁위로 분리한 것은 하건충에게 특히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진소암(陳素庵)은 부친을 편재(偏財)로 보는 전통적인 육친론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친을 편재라고 한다면 아들의 정재인 며느리와 같은 십성으로 묶이게 되니, 관계의 실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친을 년간(年干), 모친을 년지(年支)라는 궁위로 본다면 이런 모순은 상당 부분 해소된다.
십성 하나에 사람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고, 먼저 자리를 정한 뒤 그 자리와 성의 관계를 살피는 방식이다.
이 점만으로도 하건충의 궁위론은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내 마음에 걸린 부분도 있었다.
공망(空亡)이 그랬다.
기존 명리의 잔재를 걷어내고 새로운 체계를 세우려 했던 사람이 왜 공망은 그대로 남겨 두었을까.
소설이라는 핑계를 빌려 그것도 따져 물었다.
“옛것을 버린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왜 남겨 두셨습니까?”
도화, 역마, 천을귀인, 천월덕귀인 같은 신살에 대해서는 나도 전부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왕초보사주학》에서 신살은 일단 보따리에 싸서 시렁에 올려놓고 두고 보자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믿지 않는 것과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기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실제 작용은 따로 검증하면 된다.
이번 책에서 백호대살을 다룬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왜 하필 그 일곱 간지가 백호대살이 되었는지 성립 구조를 살펴보는 것과, 실제로 그것이 사람의 사고나 재앙과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나는 이 둘을 구별하고 싶었다.
책을 다 쓰고 뒤돌아보니 어느새 한 권 전체가 질의와 응답과 비판으로 이어지는 토론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이 책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는 처음부터 분명히 하고 싶었다.
하건충을 높이기 위해 쓰지도 말고, 깎아내리기 위해 쓰지도 말자.
그가 한 말은 가능한 한 그대로 살피고, 이해되지 않는 곳에서는 질문하고, 설명이 부족한 곳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따져 묻게 하자.
박현주와 왕일평, 임광춘, 진소정, 지창힐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들의 질문 가운데 상당수는 내가 하건충의 책을 읽으며 실제로 품었던 의문이었다.
“이 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이 경우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가.”
“앞의 설명과 뒤의 설명은 서로 맞는가.”
“이것은 사실인가, 해석인가, 아니면 하나의 철학인가.”
이런 질문들을 등장인물들에게 맡기고 나니 책이 훨씬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일평을 통해서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묻게 했고, 임광춘을 통해서는 복잡한 이론을 다시 먹고사는 생활의 자리로 끌어내렸다. 진소정을 통해서는 가족과 관계의 문제를 바라보았고, 지창힐을 통해서는 오래된 명리의 전통과 새 이론을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박현주는 끝까지 쉽게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남겨 두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좋은 제자는 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잘 묻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면서 여러 번 멈춰 섰다.
원전을 그대로 옮기면 이야기가 죽고, 이야기를 살리려고 너무 멀리 나가면 원전이 흐려졌다.
어느 선까지 확장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를 계속 고민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방법은 단순했다.
원전에 있는 것은 원전에 있는 대로 살리고, 원전에 없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질문과 토론 속에서 드러내자.
그렇게 하면 독자도 어디까지가 하건충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이 작품의 확장인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지막 제20화를 쓰면서는 오래 머물렀다.
하건충이 이심(理心)의 길을 오래 걷다가 자신이 설명했던 선정(禪定)의 길을 직접 걸어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을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는 것과 살아 보는 것은 다르다.
무념(無念)을 설명하는 것과 실제로 무념에 드는 것은 다르고, 무아(無我)를 정의하는 것과 나를 내려놓는 것도 다르다.
어쩌면 공부는 어느 순간 그런 벽 앞에 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말로는 다 설명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 말이 가리키는 곳에 가 본 적이 없는 순간.
그때 사람은 다시 선택해야 한다.
더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 걸어 볼 것인가.
하건충이 실제로 그 선택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그 장면은 소설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명을 설명하던 사람이 마음을 설명하고, 마음을 설명하던 사람이 마침내 마음의 뿌리를 묻는다.
그 흐름 자체는 오래 생각해 볼 만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명리학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사주는 사람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주를 공부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덟 글자로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명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공부가 될 수 있다.
맞히기보다 살피고,
단정하기보다 기다리고,
판단하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공부.
그렇게 된다면 명리는 운명을 재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박현주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하건충도 사라지고 질문만 남겨 두었다.
스승에게 던지던 질문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이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道未盡.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렇다.
하건충에 대해 다 알게 된 것도 아니고, 그의 이론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책을 쓰면서 풀린 의문도 있었지만 새로 생긴 의문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공부란 어쩌면 답을 하나씩 쌓는 일이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도 하건충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쯤 자신의 질문을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사주는 사람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운명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그 질문 가운데 하나라도 오래 남는다면 이 책을 쓴 보람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하건충에게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건넨다.
당신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답을 듣지 못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각자가 자기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