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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학명인전⑥ 임철초(任鐵樵)】
차례
머리말 7
주요 등장인물 11
제1화 부귀공명(富貴功名), 예언은 비참하게 빗겨가고 15
제2화 생불여사(生不如死), 운명의 문 39
제3화 매화농향(梅花濃香), 겨울나무의 향기를 놓치다 99
제4화 식소사번(食少事煩), 천자의 팔자를 논하다 153
제5화 진퇴지기(進退之機), 낙엽 속에서 天道를 보다 191
제6화 조후지리(調候之理), 물과 불로 재단할 수 있는가 249
제7화 전구월령(專求月令), 격국에 주인을 세우다 299
제8화 사번취정(捨繁取精), 옛 학설을 거르고 붓을 들다 349
제9화 직필곡필(直筆曲筆), 굽은 붓을 다시 세우다 387
제10화 형천동정(刑穿動靜), 무례형은 무례하게 만드는가 415
제11화 체용지의(體用之義), 도를 한쪽으로 논하지 말라 437
제12화 중화정리(中和正理), 핵심은 치우치지 않는 것 473
제13화 한난조습(寒暖燥濕), 불과 물에도 때가 있다 507
제14화 청탁지변(淸濁之辨), 맑은 명조면 사람도 맑은가 535
제15화 음양순역(陰陽順逆), 죽은 불이 금에서 태어나는가 571
제16화 화토동궁(火土同宮), 지장간에 숨은 비밀 605
제17화 방국합화(方局合化), 모였다고 모두 변하는가 639
제18화 종화지변(從化之辨), 변했다고 무엇이 되었는가 691
제19화 병원지변(病源之辨), 병은 팔자 안에만 있는가 737
제20화 운명지변(運命之辨), 하늘은 거꾸로 흐르는가 797
임철초 연보와 시대 배경 839
작가의 말 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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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랑했기에 다시 물었다
이 책을 다 쓰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든다.
『사주학명인전』의 앞선 인물들을 쓸 때에도 많은 자료를 찾고, 오래된 책을 뒤지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따라가 보았다. 그러나 임철초(任鐵樵)는 조금 달랐다.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통도사에 출가하여 한문을 배웠다. 그때 배운 한문이 훗날 내 삶에서 얼마나 큰 몫을 하게 될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저녁이 되면 낡은 책을 펼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였다. 당시에는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가 있다는 것을 모를 때였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난다. 아는 글자보다 모르는 글자가 더 많았을 텐데 원서를 읽겠다고 달려들었다. 한 줄을 읽다가 막히면 다시 보고, 뜻이 조금 보이는 것 같으면 여백에 메모했다. 붉은색으로도 쓰고 푸른색으로도 썼다. 책은 점점 지저분해졌지만 내 눈에는 그보다 재미있는 책이 없었다.
낮에 나무를 하면서도 전날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물을 긷다가도 오행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배워두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한다는 믿음도 그때부터 생겼던 것 같다.
세월이 흘렀다.
그 책을 읽던 젊은이는 명리를 가르치게 되었고, 책도 쓰게 되었다. 《적천수》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세 권으로 된 《적천수강의》도 만들었다.
당시의 나에게 《적천수》는 거의 명리학의 깊은 우물과 같았다.
파면 팔수록 물이 나왔다.
짧은 원문 하나에 임철초가 붙인 명조와 설명을 읽으며 감탄하기도 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몇 날을 붙잡기도 했다. 어떤 대목은 강의하면서 다시 깨달았고, 어떤 대목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뜻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 임철초를 내가 어찌 낯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래 읽었다고 해서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혼자 웃음이 나는 일이 있다.
《적천수강의》 초판을 만들면서 權相和珅이라는 글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엉뚱하게 ‘권상화’라고 읽었다. 나중에 잘못된 것 같아 2002년 2쇄에서는 다시 고쳤는데, 이번에는 서낙오의 글에 나온 淸和珅을 보고 또 엉뚱하게 ‘청화곤(淸和坤)’이라고 고쳐놓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그러다가 훗날 기효람과 화신(和珅)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그제야 알았다.
‘아이고, 저 화신이 그 화신이었구나.’
혼자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잘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새삼 배웠다.
글자는 읽었다.
사주는 보았다.
그런데 사람을 몰랐다.
그 작은 경험은 세월이 흐르면서 내 공부의 태도에도 조금씩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이번에 임철초 편을 쓰면서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적천수》를 다시 펼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에는 감탄하면서 지나갔던 곳에서 자꾸 발이 멈췄다.
‘왜 그렇지?’
‘정말 그런가?’
‘이것은 실제로 확인된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음간의 장생은 왜 거꾸로 돌아야 하는가.
화토동궁(火土同宮)은 어디까지 타당한가.
지장간의 구성은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담고 있는가.
천간합은 정말 두 기운이 만나 다른 오행으로 변화하는 것인가.
사주를 보고 질병을 알아낸 것과, 질병을 먼저 알고 사주에서 그 까닭을 찾아낸 것은 같은 일인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운에까지 이르렀다.
왜 대운은 월주에서 시작하는가.
월주가 계절의 기운을 나타내기 때문이라면 실제 계절은 언제나 앞으로 흐르는데 왜 어떤 사람의 대운은 거꾸로 흘러야 하는가.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 순운과 역운을 정한다면, 남녀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어느 방향으로 운을 돌려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대운은 정말 존재하는가.
자연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흐름을 옛사람이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사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모형을 수백 년 동안 우리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사람이 만든 틀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짓은 아니다.
지도는 사람이 그리지만 산과 강은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운이라는 지도가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먼저 지도를 그려놓고 세상을 그 지도에 맞추어 바라보고 있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책에는 조창(趙昌)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창은 임철초를 무너뜨리기 위해 등장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임철초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 맡은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내가 젊은 시절의 나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을 대신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창은 계속 묻는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전해진 법입니까, 확인된 법입니까?”
“맞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열 번 가운데 다섯 번이 맞는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절반이나 맞았다’가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반이나 틀렸다’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한 글자가 남았다.
驗.
확인할 험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대단히 새로운 말도 아니다.
학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명리를 오래 공부하다 보면 의외로 이것이 쉽지 않다.
결과를 알고 난 뒤 사주를 보면 이유가 너무 잘 보인다.
부자가 된 사람의 사주를 보면 부자가 될 이유가 보이고, 벼슬한 사람의 사주를 보면 벼슬할 까닭이 보인다. 병든 사람의 명조를 보면 병이 보이고, 패가한 사람의 팔자를 보면 망할 까닭이 보인다.
문제는 결과를 모를 때다.
이름도 모르고 살아온 내력도 모르는 사람의 여덟 글자만 앞에 놓았을 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번 책을 쓰면서 나는 그 차이를 자꾸 생각했다.
결과를 설명하는 능력과 결과를 미리 알아내는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둘을 섞으면 어떤 이론도 틀리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대운이 나빠서 일이 나빴다고 한다.
대운이 좋은데 일이 나쁘면 세운이 나빴다고 한다.
대운도 세운도 좋으면 원국의 충합에서 다시 원인을 찾는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에 맞는 까닭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이론은 도대체 언제 틀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도 아프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공부했고,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적천수》를 버리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아직도 이 책을 좋아한다.
십간과 십이지의 생극제화, 왕쇠와 진퇴를 바라보는 임철초의 안목에는 지금 다시 읽어도 감탄하게 되는 곳이 많다. 복잡한 격식보다 기의 흐름을 보려 했고, 책에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이 예언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숨기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더 물을 수 있었다.
임철초 자신도 옛 학설을 의심했는데, 후세인 우리가 임철초를 의심해서는 안 될 까닭이 무엇인가.
스승을 존경한다는 것이 스승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이라면 학문은 스승의 자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스승에게서 질문하는 법을 배운다면 학문은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철초가 창에게 한 말을 나는 좋아한다.
전승은 스승에게서 받을 수 있지만 진실까지 스승에게서 받아 적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만든 말이지만, 내가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얻은 생각이기도 하다.
이번 책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적천수》를 바라본다.
젊은 날에는 이 책에서 답을 얻고 싶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이 책의 뜻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책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도 공부의 한 과정일 것이다.
처음에는 믿는다.
다음에는 이해한다.
그다음에는 의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확인하려 한다.
그래도 알 수 없으면?
모른다고 남겨두면 된다.
예전 같으면 그것이 패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오히려 그 자리가 다음 공부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철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탄식했다.
“아아, 명 아닌 것이 무엇이랴.”
그 마음도 이해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가.
태어날 부모를 고를 수 없고, 시대를 고를 수 없으며, 전쟁이나 질병을 모두 피해 갈 수도 없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고르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과, 내 삶의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주가 있다고 해서 삶이 여덟 글자보다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명리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을 명리 안에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이번 《사주학명인전⑥ 임철초》를 쓰면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산골 암자의 밤에 낡은 《적천수징의》를 펼쳤던 젊은이에게 지금의 내가 한마디를 해준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많이 읽어라.
마음껏 감탄해라.
틀려도 괜찮으니 생각해라.
그러나 책보다 사람을 먼저 보고,
오래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질문을 멈추지는 마라.
그때 여백에 붉고 푸른 글씨를 빼곡하게 적었던 젊은이는 알지 못했다.
그 질문들이 수십 년을 건너 다시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올 줄을.
이제 임철초 편을 덮는다.
《적천수》에 대한 나의 공부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예전에는 답을 찾기 위해 펼쳤던 책을,
이제는 질문하기 위해 다시 펼쳐놓는다.
그리고 책상 한쪽에는 여전히 한 글자를 남겨둔다.
驗.
확인해 볼 일이다.
2026년 병오(丙午) 초가을
낭월 박주현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