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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⑮ 학포항 암벽석각 -작성중

울릉도⑮ 학포항 암벽석각(巖壁石刻)

(방문일: 2026년 6월 1일 월요일)

항포항은 이번 일정에 없었다. 그런데 울릉도 지도를 보다가 맘에 드는 명칭이 보여서 추가했다.


일부러 갈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나는 길이라면 들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 길을 바꿨다.


버섯바위에서 학포항까지는 4.2km에 8분 거리다.


도로가 공사중이라서인지 외길신호등이 멈추란다. 몇몇 군데에서 이러한 상황이 있었다.


학포에 대한 전설을 유람선에서 들었나?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어디 전시관에서 들었나 싶기도 하고. 기억이 신통치 않아서 옮기기는 어렵겠구나. 그냥 흔히 있는 상투적인 이야기였던 것으로만 기억이 된다.


임오각석은 학포항의 왼쪽으로 가면 끝 부분에 있었다.

 

임오명 각석문(壬午銘 刻石文)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412호 소재지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 산 196(학포마을)

이 각석문은 고종 19년(1882년 임오) 5월 8일(음)에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 일행이 울릉도를 답사하고 체류기간 중에 새긴 것이며, 임오년의 연호를 붙여 ‘임오명 각석문’ 으로 부른다.

울릉도는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 피해를 입자 조선 태종(太宗) 때 사람이 살지 못하는 정책으로 결정하고 강원도 삼척 관리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하여 울릉도 섬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시행하였다.

숙종(肅宗) 19년(1693년)에는 부산 동래의 어부 안용복(安龍福) 일행이 울릉도에 고기잡이하러 왔다가 일본인들이 어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따라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자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문제가 되어 숙종은 영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원도 삼척진영장(三陟鎭營將) 장한상(張漢相)을 수토관으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수토(搜討: 수색하고 토벌하는 일)하도록 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정기적으로 울릉도 수토를 지시하여 구한말까지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고종(高宗) 18년(1881년)에는 수토관 일행이 울릉도를 수토할 때 도방청(道方廳:도동마을)에서 수십명의 일본인이 벌목하는 것을 적발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되자 고종은 대마도도 과거 우리땅이나 왜인에게 빼앗겼는데 울릉도마저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사람이 사는 것만이 섬을 지키는 것이라 인식하고 울릉도에 사람을 거주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먼저 섬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중앙관리인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 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조사케 하였다.

이규원은 선박 3척에 102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고종 19년(1882년) 4월 28일 강원도 평해군 구산포를 출발, 다음날 이곳 소황토구미(학포마을)에 도착하여 육로와 수로를 통해 울릉도를 답사하고 돌아가서 지도와 복명서를 작성하여 고종께 보고하였다. 고종은 이규원이 복명한 울릉도지도와 보고서를 통해 울릉도 실정을 파악한 후 쇄환정책을 철회하고 사람이 거주하는 개척정책(開拓政策)을 실시하여 고종 20년(1883년) 4월부터 7월까지 16가구 54명이 정부에서 지원한 선박과 농기구, 종자 등을 가지고 첫 이주민이 들어오게 되어 울릉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규원 검찰사는 울릉도에 처음 도착한 소황토구미 마을에서 선박을 정박시킨 후 황토구미마을(태하)과 흑작지(현포마을) 추봉(추산마을), 천부, 홍문동 나리마을을 거쳐 성인봉에 올라가서 저포(저동), 도방청(도동), 장작지포(사동마을)를 지나 곡포(남양마을)와 산막을 거쳐 다시 학포로 돌아와서 이곳 자연 암벽의 평탄면에 울릉도(鬱陵島)라는 도명과 본인의 직성함인 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奎遠), 년월(壬午 五月)과 동행인 유연호(劉淵祜) 고종팔(高宗八) 심의완(沈宜琓) 박기화(朴基華) 서상학(徐相鶴)의 성명과 울릉도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생원 전석규(全錫奎)의 이름을 각자하였다. 글자의 크기는 10cm내외이다.

이 각석문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영토수호를 위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재개척 의지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현재 당시의 기록인 『울릉도검찰일기』와 지도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수토관 각석문은 도동리 향토사료관에 있는 신묘명(辛卯銘) 각석문과 태하리 광서명(光緖銘)각석문이 도지정 문화재로 함께 보호되고 있으며, 태하리 해변에도 김취환(金聚煥) 이보국(李輔國) 각석문이 남아 있다.


문자충(文字蟲)이라서 어디에 글자가 있다고 하면 그게 보고 싶어서 궁금한 것도 병이라면 병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데 각석문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기웃기웃...

 

 

 


 

 


 

 


아, 이건가 보다. 안내문에 비해서 내용은 빈약하구나. 이게 전부라고?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임오명 각석문을 발견했으니까 목적은 달성한 것으로 하면 되겠다.


여기에는 울릉도(蔚陵島)라고 쓴 모양이다. 지금은 鬱陵島로 쓰지만 당시에는 이렇게도 썼던 모양이다. 풀이름울(蔚)이다.


기왕 왔으니 해안 풍경도 둘러본다. 지질도를 봐야지. 지질탐사 중이니까. 


 

 


여기는 산막조면암이구나. 그래 바위가 조면암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위 틈으로 바다가 보여서 들여다 봤다. 그게 다이다. 더 볼 만한 것이 없구나.


 

 


이건... 심의완?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사람 이름이겠구나.


 

 


 

 


저 바위 끝에 보이는 바위가 학이라는 말도 있더라만 그냥 그렇겠거니 하면 된다.

절벽의 모양이 왼쪽과는 사뭇 달라 보여서 지질도를 더 넓게 찾아 봤다.


 

 


여긴 태하조면암이구나. 왼쪽은 산막조면암이더니 이름이 좀 달라졌다. 조면암이라고 해도 포함된 성분들이 서로 달라서 따로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이 정도면 서운치 않을 만큼 둘러 봤구나. 다시 길을 재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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