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제15장 운명의 그릇/ 7. 우연(偶然)같은 필연(必然)
작성일
2017-04-12 09:24
조회
3254
[172] 제15장 운명(運命)의 그릇
7. 우연(偶然)같은 필연(必然).
=======================
다음 날. 아침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서 노산의 풍경이 상큼한 모습으로 나들이를 유혹하는 날이었다. 우창은 문득 어제 고월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게 된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학문에 대한 정진으로 일생을 보낸다는 것에서도 외부의 개입이 일어날 수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면서 길을 걷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전에 가본 적이 없었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우거진 숲속을 바라보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친걸음에 좀 더 올라갔다.
그러자 숲속에서 문득 전각이 나타나자 정신을 차리고 편액을 살펴보니, 「몽유원(夢遊院)」이라고 쓰여 있었다.
‘꿈속에서 노니는 집?’
이런 곳에서는 어떤 고인이 살고 있을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뜰을 거닐면서 인기척이 있는지 청력(聽力)을 돋웠다. 그러자 안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그네는 들어오셔도 좋아요~!”
우창이 놀란 것은 그 소리의 주인이 여인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다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인이 나타났다. 인상은 온화(溫和)해 보였다.
“한가로운 선비님이시면 들어와서 차 한 잔 드시지요.”
“아, 저 말입니까? 아닙니다. 괜히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폐라니요. 오늘 귀한 손님이 나들이한다는 통보를 받고 진작부터 물을 끓이는 중이랍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귀한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혼자서 기거하는지 정갈한 실내는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고, 싫지 않은 향이 은은하게 풍겨서 기분이 묘했다.
“처음 뵙습니다. 소생은 우창이라 합니다.”
“잘 오셨어요. 반가워요.”
“우연히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이렇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는 산천의 풍광이 좋아서 인연 따라 잠시 노산에 머물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는 모습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모과를 끓는 물에 꿀 한 숟가락을 넣어서 앞에 내미는 것을 받았다.
향긋한 모과 향이 코를 자극했다.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생각지도 못한 여인에게 차를 얻어 마시자니 마음이 약간 야릇했다. 뭐에 홀린 것도 같고 해서 내심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분위기를 살피게 되었다.
“얼떨떨하시지요? 염려 마시고 편히 쉬세요. 모두 인연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랍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올 줄을 미리 알고 계셨던 듯싶은데 그렇습니까?”
“예. 맞아요. 아침에 귀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아침에 점신(占神)의 가르침이 있어서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다시 미소를 짓는다. 다시 바라보니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으로 되어 보이는데 단아(端雅)한 기품이 느껴졌다.
“귀인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그 기다리신다던 귀인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예정되었던가 싶습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오신 것이 맞아요.”
우창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잠시 참았다. 서투르게 사람을 놀릴 것처럼 보이지를 않아서 잠시 기다리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참, 들어오다가 보니까 편액에 몽유원이라고 되어 있던데요.”
“그건 제가 붙인 것은 아니고요. 원래 그렇게 되어 있었답니다. 아마도 누군가 머물면서 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나 봐요.”
“아……. ”
다시 침묵이 흘렀다. 딱히 뭐라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차만 홀짝이면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인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궁금하신 것이 많으시죠? 저의 이름은 상인화(尙印和)라고 해요. 실은 오라버니께서 역학(易學)에 공부가 있어서 어깨너머로 약간의 역리(易理)를 이해하고 있답니다.”
“아, 그러십니까? 상 아주머니셨군요. 반갑습니다. 오빠가 되시는 분의 존함을 여쭤봐도 될지요?”
“예, 오라버니는 상병화(尙秉和)라고 하세요.”
“상병화 선생이라면, 「초씨역고(焦氏易詁)」를 쓰신 고인이신가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우창은 고월에게서 언뜻 듣기에 초연수 선생의 제자로 상병화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아는 체를 했다.
“인연이 있어서 존대성명(尊大姓名)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인연을 이렇게 뵈오니 또한 하늘의 뜻인가 싶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법이니까요. 실은 아침에 오라버니께서 태산으로 가시면서 귀인이 찾아올 것이니 잘 접대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이렇게 감읍할 데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남기셨는지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아침에 여장을 꾸미면서 문득 점괘가 동했다면서 말씀하셨어요. 진실한 학자 한 분이 찾아 올 테니 맞아들이고 차를 대접하라고요. 그러면서 대략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우창 선생을 보는 순간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그 점괘는 잘못 나온 것인가 싶습니다. 소생은 학자도 아니고 이제 겨우 학문을 시작한 것을요.”
“외람(猥濫)되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신지요?”
“아, 예. 지금은 적천수라고 하는 명서(命書)를 보고 있습니다.”
“과연 오라버니의 점괘는 틀린 적어 없었는데 오늘도 정확하다고 해야 하겠네요. 사실 제가 명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오라버니는 역학을 연구하는지라 명학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질 않아서 말이지요.”
“저도 인연이 되면 역학을 공부해봐야 하겠다고 다짐만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기본이 부족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요.”
“그러셨군요. 그러시다면 서로 가르침을 나누면 되겠네요.”
“그야 대환영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인화가 감사드려야지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여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자태에서 우아하면서도 범접할 수가 없는 기품이 서려있어서 우창도 합장하고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인화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인화 선생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는지요?”
“선생은 가당치 않아요. 그렇지만 마땅히 호칭하기가 적당한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상(尙) 누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어머~! 정말요? 저도 동생이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그렇게 불러 주심 안 될까요?”
우창은 자기도 모르게 느낌에 이끌려서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좀 당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허락을 해 주니 오히려 마음이 기뻤다.
“누님, 부족하지만 동생 노릇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절 받으시고요.”
그러면서 넙죽 허리를 굽혔다. 상인화도 마주 절을 했다. 인연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익혀가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도 있는가 싶은 생각을 했다.
다시 따라주는 모과차를 마시면서 문득 어제 공부한 그릇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저 누님, 사람에게는 타고난 그릇이 있는 걸까요?”
“글쎄요.”
“참 동생을 삼기로 하셨으니 말씀은 하대(下待)를 하셔야지요. 그래야 우창의 마음이 편안하겠지요? 하하~!”
“아 그런가? 해 보질 않아서…… 그렇게 할게.”
“훨씬 좋아요. 이제 상병화 선생께는 형님이라고 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망외소득(望外所得)입니다. 하하~!”
“그런데, 그릇을 내가 어떻게 알아? 다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셨죠?”
“그야. 상법(相法)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니까.”
“상법에서는 뭐라고 나오는데요?”
“고양이의 상과 범의 상으로 태어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갖고 있는 능력은 분명히 다르다고 하잖아? 그렇다면 그것을 그릇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누님께서는 상법과 역학을 공부하신 거지요?”
“맞아. 모두 오라버니 덕분에 인연하게 되었는데 이제 명학에 관심이 생겨서 배울 방법이 없을까 싶었지.”
“이미 상당한 조예(造詣)를 이루셨는데 또 명학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다 보니까 그게 궁금해졌어. 그리고 서로의 역할과 해석이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거든.”
“어떻게 다르죠?”
“역학(易學)을 공부해 보니까, 일정한 주체가 없이 변화의 폭이 너무 커서 가늠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상학(相學)을 공부해 보니까 이건 또 형상에 갇혀서 있는 것만으로 판단하려니까 변화의 폭이 너무 좁은 거야. 그래서 이러한 불평을 오라버니께 했더니, 아무래도 명학(命學)을 공부할 때가 된 모양이라고 하시잖아.”
“아, 그러셨군요. 명학은 오행(五行)을 위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학은 음양을 위주로 하지요. 그러다 보니까 음양은 모두가 상대적으로만 관조(觀照)하는 구조가 되는 까닭에 일정한 형체가 없어서 변화무쌍(變化無雙)하여 그 변화를 터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들었습니다.”
“맞아. 오라버니는 그 어려운 변화를 종횡(縱橫)으로 휘젓고 다니면서 오묘한 해답을 찾아내는데 난 그게 너무 어려워서 망연자실(茫然自失)이지 뭐야.”
“역리(易理)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창도 도무지 안개 같고, 구름 같고, 바람 같아서 가늠되지 않습니다. 하하~!”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이해할 수가 있으니까 시작은 해 보셔봐. 당장은 어렵더라도 하다가 보면 오라버니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익혀야지요. 선현의 지혜인데 어렵다는 이유로 도망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경(易經)」을 읽어보진 않았을 테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이구! 누님도 참. 어디까지가 뭐예요. 완전초보(完全初步)인 걸요.”
“근데, 동생.”
“예 누님.”
“누님보다 누나가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말도 누나에게 하듯이 경어(敬語)를 쓰지 않았으면 더 가깝게 느껴질 것도 같은걸. 어떻게 생각해?”
“고마운 말씀이지만, 우창은 이게 더 편하니까 맘대로 할랍니다. 하하~!”
“그게 더 편하다면 좋을 대로 해.”
“소중한 공부를 이렇게 얻게 되었으니 복이 넘칩니다. 누님.”
“이 누나가 아는 대로 가르쳐 줄 테니까 동생도 내게 명학의 진수(眞髓)를 잘 가르쳐 줘봐.”
“이거야말로 수지맞는 사업인걸요. 하하~!”
“뭐가 수지맞았다고 그래?”
“아니, 생각해 봐요. 공짜로 역학을 공부하게 생긴 것도 감지덕지인데 멋진 누님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이보다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하~!”
“그런가? 그렇담 나도 장사를 잘한 거지. 멋진 동생에다가 명학을 배우게 생겼으니 우린 쌍승(雙勝)이네.”
“그렇구나.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에게도 자랑해야 하는데요.”
“아, 도반들이 있었구나. 나도 동생이 어떤 사람들이랑 수학(修學)하고 있는지 궁금하잖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와 동갑인 고월(古越) 임원보(林元甫)라고, 매우 열정적으로 명학을 공부하는 선생이고, 또 하나는 몇 살 어린 여인인데 조은령(趙銀鈴)이라고 해요. 초보자라서 누님이 조금만 노력하면 열심히 쫓아올 겁니다.”
“그래? 그렇담 머지않아서 또 만나겠구나. 궁금하다.”
“같이 공부하도록 하십시다.”
“우선 차 좀 더 마셔. 아무래도 역학에 대한 기초를 좀 가르쳐 주고 내가 사주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해야 체면이 서겠지?”
“당연하지요~! 하하~!”
다시 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상인화가 역학에 대해서는 초보인 우창에게 주역의 기초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7. 우연(偶然)같은 필연(必然).
=======================
다음 날. 아침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서 노산의 풍경이 상큼한 모습으로 나들이를 유혹하는 날이었다. 우창은 문득 어제 고월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게 된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학문에 대한 정진으로 일생을 보낸다는 것에서도 외부의 개입이 일어날 수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면서 길을 걷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전에 가본 적이 없었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우거진 숲속을 바라보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친걸음에 좀 더 올라갔다.
그러자 숲속에서 문득 전각이 나타나자 정신을 차리고 편액을 살펴보니, 「몽유원(夢遊院)」이라고 쓰여 있었다.
‘꿈속에서 노니는 집?’
이런 곳에서는 어떤 고인이 살고 있을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뜰을 거닐면서 인기척이 있는지 청력(聽力)을 돋웠다. 그러자 안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그네는 들어오셔도 좋아요~!”
우창이 놀란 것은 그 소리의 주인이 여인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다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인이 나타났다. 인상은 온화(溫和)해 보였다.
“한가로운 선비님이시면 들어와서 차 한 잔 드시지요.”
“아, 저 말입니까? 아닙니다. 괜히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폐라니요. 오늘 귀한 손님이 나들이한다는 통보를 받고 진작부터 물을 끓이는 중이랍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귀한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혼자서 기거하는지 정갈한 실내는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고, 싫지 않은 향이 은은하게 풍겨서 기분이 묘했다.
“처음 뵙습니다. 소생은 우창이라 합니다.”
“잘 오셨어요. 반가워요.”
“우연히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이렇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는 산천의 풍광이 좋아서 인연 따라 잠시 노산에 머물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는 모습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모과를 끓는 물에 꿀 한 숟가락을 넣어서 앞에 내미는 것을 받았다.
향긋한 모과 향이 코를 자극했다.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생각지도 못한 여인에게 차를 얻어 마시자니 마음이 약간 야릇했다. 뭐에 홀린 것도 같고 해서 내심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분위기를 살피게 되었다.
“얼떨떨하시지요? 염려 마시고 편히 쉬세요. 모두 인연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랍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올 줄을 미리 알고 계셨던 듯싶은데 그렇습니까?”
“예. 맞아요. 아침에 귀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아침에 점신(占神)의 가르침이 있어서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다시 미소를 짓는다. 다시 바라보니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으로 되어 보이는데 단아(端雅)한 기품이 느껴졌다.
“귀인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그 기다리신다던 귀인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예정되었던가 싶습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오신 것이 맞아요.”
우창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잠시 참았다. 서투르게 사람을 놀릴 것처럼 보이지를 않아서 잠시 기다리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참, 들어오다가 보니까 편액에 몽유원이라고 되어 있던데요.”
“그건 제가 붙인 것은 아니고요. 원래 그렇게 되어 있었답니다. 아마도 누군가 머물면서 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나 봐요.”
“아……. ”
다시 침묵이 흘렀다. 딱히 뭐라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차만 홀짝이면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인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궁금하신 것이 많으시죠? 저의 이름은 상인화(尙印和)라고 해요. 실은 오라버니께서 역학(易學)에 공부가 있어서 어깨너머로 약간의 역리(易理)를 이해하고 있답니다.”
“아, 그러십니까? 상 아주머니셨군요. 반갑습니다. 오빠가 되시는 분의 존함을 여쭤봐도 될지요?”
“예, 오라버니는 상병화(尙秉和)라고 하세요.”
“상병화 선생이라면, 「초씨역고(焦氏易詁)」를 쓰신 고인이신가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우창은 고월에게서 언뜻 듣기에 초연수 선생의 제자로 상병화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아는 체를 했다.
“인연이 있어서 존대성명(尊大姓名)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인연을 이렇게 뵈오니 또한 하늘의 뜻인가 싶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법이니까요. 실은 아침에 오라버니께서 태산으로 가시면서 귀인이 찾아올 것이니 잘 접대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이렇게 감읍할 데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남기셨는지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아침에 여장을 꾸미면서 문득 점괘가 동했다면서 말씀하셨어요. 진실한 학자 한 분이 찾아 올 테니 맞아들이고 차를 대접하라고요. 그러면서 대략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우창 선생을 보는 순간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그 점괘는 잘못 나온 것인가 싶습니다. 소생은 학자도 아니고 이제 겨우 학문을 시작한 것을요.”
“외람(猥濫)되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신지요?”
“아, 예. 지금은 적천수라고 하는 명서(命書)를 보고 있습니다.”
“과연 오라버니의 점괘는 틀린 적어 없었는데 오늘도 정확하다고 해야 하겠네요. 사실 제가 명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오라버니는 역학을 연구하는지라 명학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질 않아서 말이지요.”
“저도 인연이 되면 역학을 공부해봐야 하겠다고 다짐만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기본이 부족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요.”
“그러셨군요. 그러시다면 서로 가르침을 나누면 되겠네요.”
“그야 대환영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인화가 감사드려야지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여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자태에서 우아하면서도 범접할 수가 없는 기품이 서려있어서 우창도 합장하고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인화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인화 선생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는지요?”
“선생은 가당치 않아요. 그렇지만 마땅히 호칭하기가 적당한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상(尙) 누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어머~! 정말요? 저도 동생이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그렇게 불러 주심 안 될까요?”
우창은 자기도 모르게 느낌에 이끌려서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좀 당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허락을 해 주니 오히려 마음이 기뻤다.
“누님, 부족하지만 동생 노릇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절 받으시고요.”
그러면서 넙죽 허리를 굽혔다. 상인화도 마주 절을 했다. 인연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익혀가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도 있는가 싶은 생각을 했다.
다시 따라주는 모과차를 마시면서 문득 어제 공부한 그릇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저 누님, 사람에게는 타고난 그릇이 있는 걸까요?”
“글쎄요.”
“참 동생을 삼기로 하셨으니 말씀은 하대(下待)를 하셔야지요. 그래야 우창의 마음이 편안하겠지요? 하하~!”
“아 그런가? 해 보질 않아서…… 그렇게 할게.”
“훨씬 좋아요. 이제 상병화 선생께는 형님이라고 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망외소득(望外所得)입니다. 하하~!”
“그런데, 그릇을 내가 어떻게 알아? 다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셨죠?”
“그야. 상법(相法)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니까.”
“상법에서는 뭐라고 나오는데요?”
“고양이의 상과 범의 상으로 태어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갖고 있는 능력은 분명히 다르다고 하잖아? 그렇다면 그것을 그릇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누님께서는 상법과 역학을 공부하신 거지요?”
“맞아. 모두 오라버니 덕분에 인연하게 되었는데 이제 명학에 관심이 생겨서 배울 방법이 없을까 싶었지.”
“이미 상당한 조예(造詣)를 이루셨는데 또 명학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다 보니까 그게 궁금해졌어. 그리고 서로의 역할과 해석이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거든.”
“어떻게 다르죠?”
“역학(易學)을 공부해 보니까, 일정한 주체가 없이 변화의 폭이 너무 커서 가늠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상학(相學)을 공부해 보니까 이건 또 형상에 갇혀서 있는 것만으로 판단하려니까 변화의 폭이 너무 좁은 거야. 그래서 이러한 불평을 오라버니께 했더니, 아무래도 명학(命學)을 공부할 때가 된 모양이라고 하시잖아.”
“아, 그러셨군요. 명학은 오행(五行)을 위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학은 음양을 위주로 하지요. 그러다 보니까 음양은 모두가 상대적으로만 관조(觀照)하는 구조가 되는 까닭에 일정한 형체가 없어서 변화무쌍(變化無雙)하여 그 변화를 터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들었습니다.”
“맞아. 오라버니는 그 어려운 변화를 종횡(縱橫)으로 휘젓고 다니면서 오묘한 해답을 찾아내는데 난 그게 너무 어려워서 망연자실(茫然自失)이지 뭐야.”
“역리(易理)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창도 도무지 안개 같고, 구름 같고, 바람 같아서 가늠되지 않습니다. 하하~!”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이해할 수가 있으니까 시작은 해 보셔봐. 당장은 어렵더라도 하다가 보면 오라버니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익혀야지요. 선현의 지혜인데 어렵다는 이유로 도망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경(易經)」을 읽어보진 않았을 테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이구! 누님도 참. 어디까지가 뭐예요. 완전초보(完全初步)인 걸요.”
“근데, 동생.”
“예 누님.”
“누님보다 누나가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말도 누나에게 하듯이 경어(敬語)를 쓰지 않았으면 더 가깝게 느껴질 것도 같은걸. 어떻게 생각해?”
“고마운 말씀이지만, 우창은 이게 더 편하니까 맘대로 할랍니다. 하하~!”
“그게 더 편하다면 좋을 대로 해.”
“소중한 공부를 이렇게 얻게 되었으니 복이 넘칩니다. 누님.”
“이 누나가 아는 대로 가르쳐 줄 테니까 동생도 내게 명학의 진수(眞髓)를 잘 가르쳐 줘봐.”
“이거야말로 수지맞는 사업인걸요. 하하~!”
“뭐가 수지맞았다고 그래?”
“아니, 생각해 봐요. 공짜로 역학을 공부하게 생긴 것도 감지덕지인데 멋진 누님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이보다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하~!”
“그런가? 그렇담 나도 장사를 잘한 거지. 멋진 동생에다가 명학을 배우게 생겼으니 우린 쌍승(雙勝)이네.”
“그렇구나.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에게도 자랑해야 하는데요.”
“아, 도반들이 있었구나. 나도 동생이 어떤 사람들이랑 수학(修學)하고 있는지 궁금하잖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와 동갑인 고월(古越) 임원보(林元甫)라고, 매우 열정적으로 명학을 공부하는 선생이고, 또 하나는 몇 살 어린 여인인데 조은령(趙銀鈴)이라고 해요. 초보자라서 누님이 조금만 노력하면 열심히 쫓아올 겁니다.”
“그래? 그렇담 머지않아서 또 만나겠구나. 궁금하다.”
“같이 공부하도록 하십시다.”
“우선 차 좀 더 마셔. 아무래도 역학에 대한 기초를 좀 가르쳐 주고 내가 사주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해야 체면이 서겠지?”
“당연하지요~! 하하~!”
다시 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상인화가 역학에 대해서는 초보인 우창에게 주역의 기초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