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제12장 풍수지리(風水地理) / 2.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차원(次元)

작성일
2017-03-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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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제12장 풍수지리(風水地理)

2.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차원(次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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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물어보세. 천지에는 신명(神明)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자원이 물었다.

“잘 몰라서 여쭙는데, 신명은 무엇인가요? 신령(神靈)과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싶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요.”

자원의 말에 경순이 웃으면서 답을 했다.

“아, 그것은 영적(靈的)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조화(造化)를 의미하는 것이라네.”

“흔히 말하는 하늘의 뜻도 그런 의미인가요?”

“그렇지. 실재하는 옥황상제가 뭘 어떻게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면 되겠네.”

“아, 오해할 뻔했어요. 행여 창조주(創造主)와 같은 신령을 의미하는가 싶어서 그게 궁금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신명이란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었군요.”

“아니,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군.”

“예? 그럼요?”

“자연의 이치와 초자연의 이치를 포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네.”

“아하~!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설명은 할 수가 없더라도 뭔가 특별한 작용은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지. 그 정도만 이해해도 된다고 보겠네.”

“고마워요.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호호~!”

경순은 다시 고월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신명이 있어서 효자의 딱한 상황을 이해했다면 어떻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겠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 부근을 지나가게 되어있는 왕의 발걸음을 효자가 있는 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에는 또한 문제가 있을까?”

“어쩌면 그것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효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장사도 후히 지냈을 뿐만 아니라 효자에게는 벼슬도 내린다면 그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형님의 말씀인즉, ‘천지신명이 돌보는 작용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야 한단 말씀인 것이지요?”

“당연하지.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이차원(異次元)이 어찌 없다고 단정을 하겠는가?”

“다른 차원(次元)이라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지금 그대가 공부하는 것은 무엇인가?”

“적천수입니다.”

“적천수는 몇 차원인가?”

“예? 차원이 아니라 삼원(三元)이죠.”

“그렇다면 현세(現世)는 원(元)이 세 가지가 있단 말이 아닌가?”

“아, 그런 뜻이 됩니까? 듣고 보니까 일리가 있습니다. 삼원(三元)을 삼차원(三次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차원(次元)이 있을 수도 있을까?”

“미뤄서 짐작은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삼원(三元)보다 더 많은 원은 무엇일까?”

“그야 사원(四元)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차(次)를 넣으면 어떻게 되나?”

“삼차원(三次元)과 사차원(四次元)이 되겠습니다.”

“삼차원은 뭐라고 이해를 할까?”

“그야 땅과 하늘과 사람입니다.”

“잘 말했네. 여기에다가 영적(靈的)인 상황을 추가하면 사차원이 되는 것이라네.”

“아하, 그렇다면 오차원도 있습니까?”

“왜 없겠는가?”

“그것은 어떤 상황으로 이해를 합니까?”

“우리가 지금 논의(論議)하는 것은, 겨우 영적인 현상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말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상황에서 그다음의 차원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을까?”

“아, 그렇기도 합니다. 과연 이해할 지혜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그 현상을 수용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時間)이라고도 한다네. 즉 공간(空間)에 대비한 시간이란 말이지.”

“시간(時間)은 영적(靈的)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영적인 존재는 빛과 같은 존재이고 시간도 빛과 같은 존재이거든.”

“오호~! 정말 형님의 탁견(卓見)은 상상을 초월(超越)합니다. 그러한 세계관(世界觀)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가? 그야 아우가 깨달음의 마음으로 귀를 열어두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묘(墓)도 쓰기 전에 발복하는 것은 사차원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말씀이잖습니까?”

“당연하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해석이 안 되지만 시공을 뛰어넘어서 바라보게 되면 그러한 것도 이해가 된다네.”

“정말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벌써 그런 말씀을 하는가? 아직 출발도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하~!”

“그렇지요? 그러니 얼마나 갈 길이 멀었겠습니까. 하하~!”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못된 짓을 하면 어떨까?”

“그 대상자는 모를지라도 천지신명이 먼저 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냥 자기암시(自己暗示)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학습의 효과에 의해서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지.”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자연은 눈과 귀가 없을까요?”

“그게 논리적으로 가능할까?”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이치적으로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만하면 되었네. 도를 잘 닦고 있다고 해도 되겠어.”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은 취현이 나섰다.

“사부님, 고월선생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시하관에 사시발복이 풍수와 연관시켜서만 이해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네. 모든 자연의 이치는 서로 얽혀있음이지.”

“하나만 잘 알아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모두 눈코를 쥐어뜯고 학문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이해가 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풍수 이야기를 해 볼까?”

“예, 그런데 상청궁에서 방문한 손님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다음에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그러자, 우창이 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무슨 이야기든 신기하고 새로울 따름입니다. 부디 저희들을 위해서라도 풍수이야기를 계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회에 귀한 견문(見聞)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고월과 자원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모습을 본 경순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로 풍수 이야기를 나눌 테니 젊은 학도들은 참고가 할 것이 있으면 참고하시게나.”

취현이 경순을 향해서 물었다.

“스승님께 다시 여쭙습니다. 땅의 모습을 보고서 보통 말하기를 형체에 따라서 소, 용, 호랑이, 봉황 등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타당한 것입니까?”

“취현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제자의 소견으로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말해 보게나.”

“가령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은 ‘여인이 거문고를 켜는 형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름이 있지요?”

“물론이네.”

“그리고 또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옥녀가 화장하고 있는 형세’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도 있지요?”

“그렇다네.”

“그런가 하면 ‘옥녀세발형(玉女洗髮形)’이라고 해서, ‘옥녀가 머리를 감는 형세’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또한 틀림없는 말이네.”

“자, 그럼 여쭙겠습니다. 이러한 형세에 따른 각각의 이름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근거가 되는지요?”

“없지.”

“그렇다면 이러한 형국(形局)을 바탕으로 풀이하는 서로 다른 작용력의 차이는 믿을 만하다고 보십니까?”

“아니지.”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마다 보이는 대로 생각한 것이니까 달리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다네.”

“그래서 풍수학은 허망한 학문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모순(矛盾)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큰 맥락에서는 작용도 같다고 보면 되네.”

“그렇다면 화려한 말장난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심지어는 같은 이름이라도 형세는 모두가 제각각인 경우도 허다하다네.”

“예를 들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도 설명해 주시지요.”

“풍수의 형세에서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라는 이름이 있네.”

“들어봤습니다. 산세가 웅장하고 위엄이 서려있는 자리에 붙이는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이름이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은 많이 다르다네.”

“왜 그렇습니까?”

“그야 형세(形勢)보다는 형기(形氣)에 비중을 두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모양보다는 서려있는 기운이 중요하다는 뜻이로군요.”

“그렇다네. 그렇지 않고서야 똑같은 장군대좌형이 세상에 어찌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경우의 물형(物形)에 따른 이름들도 그냥 느낌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지.”

“이렇게 대입한다면 풍수학의 이론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당연하지.”

“그러면 어떻게 학문으로 존재를 할 수가 있습니까?”

“원래 하나의 학문 속에서도 다양한 학문의 수준이 존재하는 것임을 모르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묘지는 한 번 장사를 지내고 나면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인지라 다른 경우와는 다르다고 생각이 됩니다.”

“초등(初等)의 수준에 해당하는 풍수는 물형(物形)으로 풍수를 논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

“이름에서도 이해가 됩니다.”

“가령,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라는 이름의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세’는 먹을 것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그 사례가 되겠네.”

“아하, 참으로 서민적입니다.”

“원래가 평민들의 수준은 그 정도에서 머물러 있다네. 그래서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하기도 어렵고 또 그럴 마음도 없다고 해도 되겠지. 그냥 말로 이해하기 쉬우니 그대로 적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네.”

“문제는 실제로 그러한 작용이 있느냐는 것이 아닙니까?”

“그야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있으나 마나 한 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지각(知覺)이 있는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見解)라네.”

“그렇다면 전문적인 식견(識見)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풍수론은 웃음거리로만 작용한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물론, 그중에서 제대로 전문가의 관점에서 판단한 다음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문득, 경순이 고월에게 말했다.

“고월은 명학을 연구하니까 신살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신살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야 학문적으로는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럼 버려야 하겠는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이 방면에 지식이 부족한 일반 사람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사주에서 떠돌아다닐 암시가 있으면 역마살이 들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역마살이 없으면 어쩌지?”

“그때는 지살(地殺)이 있다고 하면 됩니다.”

“지살도 없으면?”

“충살(衝殺)이 있다고 하면 됩니다. 여하튼 그 사람에게 불안정하게 유랑(流浪)을 할 암시가 있음을 전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라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옥녀가 거문고를 켜든, 머리를 빗든, 좋은 기운이 나온다는 것만 설명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라네. 이것을 미신이라거나 혹세무민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물형론(物形論)의 풍수에 대한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경순이 다시 취현에게 말했다.

“어떤가? 그러한 경우에는 실제의 상황에 대한 작용도 맞을 가능성이 높겠지?”

“생각해보니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명학의 신살과 지학의 물형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비교적 적은 경우라고 하겠고, 대부분은 말솜씨 좋은 동네풍수들의 한담(閑談)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

“그렇다면, 풍수학의 위에는 천지신명이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모든 학문의 정점(頂點)에는 천지신명, 그러니까 초월적(超越的)인 영역(領域)이 존재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네.”

“그렇다면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해서 감응을 입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틀림없는 말이네.”

“그런데 왜 이렇게도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호기심(好奇心)이지.”

“예?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이론에 매달려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신령(神靈)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건, 학문의 존재감이 허약한 것이 아닐까요?”

“왜 아니겠나.”

“아니, 스승님 지금 제자를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하산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원, 그럴 리가 있나. 그대가 물으니 내 본심을 말해주는 것이라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많은 세월을 학문과 이론과 글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다 뭡니까?”

“문자놀이를 하는 사람들이지.”

“음…….”

“말하자면, 배우(俳優)라고 할 수가 있겠군.”

“예? 배우라니요? 어릿광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점점 갈수록 학문이 하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네. 하찮기로 본다면 떨어져서 길가에 버려진 짚신과 같다고도 할 수가 있지.”

“이건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뭐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제왕도 마다하고 학문의 길로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하찮은 공부라니요.”

“원래 그런 것을 난들 어쩌겠나.”

“뭐가 잘못된 거지요? 오늘 스승님의 말씀은 다른 날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학문은 진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어제인데 오늘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어린 제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춥니까?”

“오늘은 관객이 더 늘었지 않은가? 하하하~!”

“예? 아, 상청궁에서 올라온 세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관객이 늘었다고 해서 학문이 널뛰기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래 배우는 관객의 숫자에 따라서 흥이 달라진다네.”

“그렇다면 스승님도 광대이십니까?”

“당연하지.”

“학문은 뭡니까?”

“연극(演劇)의 대본(臺本)이지.”

“점점 갈수록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그런가? 난 매우 정상으로 보이는데.”

“스승님.”

“왜 그러나?”

“그러지 말고 성의 있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가 지금 성의가 없어 보이는가?”

“제자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언어유희(言語遊戱)를 하시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좀 안 좋습니다. 진지(眞摯)한 질문에 건성으로 답변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과연 취현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묻고 또 묻다가 급기야 폭발하기 직전(直前)이었다. 이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기려나 싶어서 고월 등도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