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제12장 풍수지리(風水地理) / 3. 학문(學問)의 의미(意味)

작성일
2017-03-2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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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제12장 풍수지리(風水地理)

3. 학문(學問)의 의미(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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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도 이러한 상황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불안하면서도 궁금하기도 했다. 이것은 고월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원만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인지 마음이 콩닥콩닥했다. 행여라도 강호를 누비던 냉혈마인의 마음에 불을 댕겨서 난동이라도 부리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게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섯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한 방안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취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학문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호기심 충족(充足)이지.”

“불행을 막고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착각(錯覺)이라네.”

“그렇다면 스승님은 왜 학문을 연마하셨습니까?”

“공부하면 뭔가 신통한 것을 알게 되려나 싶어서였지.”

“그래서 신통한 것을 아셨습니까?”

“조금.”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신의 뜻.”

“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아니, 갑자기 귀가 어두워지셨나? 하하하~!”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취현을 놀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경순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오호~! 그럴 리가 있는가. 그대를 놀려서 누굴 즐겁게 하겠는가?”

“그런데 말씀에서 왜 그런 느낌이 듭니까?”

“그야 그대의 마음에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겠지.”

“예…….”

다시 잠시의 고요가 방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경쟁심이 강한 취현이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한 느낌을 관객들은 받을 수가 있었다. 이윽고 취현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그러나?”

“학문의 가치(價値)는 얼마나 됩니까?”

“그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지.”

“잘 배워서 지혜롭게 쓴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만금~!”

“그렇다면 잘못 쓰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기(詐欺)~!”

“그렇게 잘못 사용할 경우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발설지옥(拔舌地獄)~!”

“예? 발설지옥이 뭡니까?”

“불가(佛家)에서 하는 말이네. 죽어서 저승에 가면 받는 벌이 있는데 발설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옥졸들이 죄인을 뉘어놓은 다음에, 혀를 꺼내어서 길게 늘여놓고는 밭을 갈아엎는 쟁기로 혓바닥을 갈아버리는 것이지.”

“그러니까 학문을 그릇되게 쓴다면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죽은 다음에 저승이 없다면 어찌 됩니까?”

“또한 발설지옥.”

“이승에도 발설지옥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구업(口業)을 지어서 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되고, 경계(警戒)하게 될 것이니 결국은 혀로 인해서 굶어 죽겠지.”

“그렇다면 들키지만 않으면 생전에는 발설지옥을 면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이지.”

“들키지 않고 사기를 치는 방법이 없습니까?”

“없네~!”

“평생 잘만 먹고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모르지.”

“아니,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스승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내 생각으로는 몸은 편해도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네.”

“그야 본인이 아니니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른다는 것이네.”

“다만 논리적으로는 신(神)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단 말씀이시지요?”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런데 공부를 하면, 그러니까 학문을 하면 어떤 것을 알게 됩니까?”

“신의 마음”

“예?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것도 안 된다면 왜 애를 써서 공부에 빠져들겠는가?”

“아니, 호기심이라고 하셔서요.”

“그 호기심이 무엇이냐가 중요하겠지.”

“그 호기심이 무엇입니까?”

“신의 마음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라네.”

“아, 호기심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하지. 여인에 대한 호기심. 정치에 대한 호기심. 도박에 대한 호기심, 마약에 대한 호기심.”

“그런데 도학의 호기심은 신의 영역에 다가가는 것이로군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신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군.”

“공부해서 절정의 수준에 도달한다면 신의 마음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 모르지.”

“이론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이론적으로는 3할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드네.”

“겨우 3할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그 이상이라고 한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 정도라도 그냥 행복할 따름이라네.”

“그렇다면 신의 영역에 동참하여 동등하게 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모르지.”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있다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겠지.”

“아, 성불(成佛)하면 신의 영역과 동등하다고 하겠습니까?”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고인들 중에서 그 영역에 접근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모르지.”

“그냥 호기심일 뿐입니까?”

“그렇다네.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이해가 되네만 답을 하고 말고는 내 진심에 달린 것이라네.”

“그렇다면 쓸데없는 것은 여쭙지 않겠습니다. 늦게 배운 학문인지라 왜 이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저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하네. 하하하~!”

“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다면 스승님은 신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셨습니까?”

“난들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여태 공부하셔서 최상승(最上乘)의 수준으로 예측과 예방을 하실 수가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계시는 수준이라면 얼마나 된 것인지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구태여 말을 하자면, 1할?”

“예? 겨우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자연의 이치를 배우지 않고 살아가는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은 신의 뜻을 얼마나 깨닫는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1푼.”

“예?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아도 1푼의 깨달음은 알고 산다는 말입니까?”

“공부는 꼭 글을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야 아닙니다.”

“그렇다네. 나름대로 자연의 뜻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도 신의 뜻을 1푼, 그러니까 10분의 1할은 알고 산다고 해야 하겠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스승님의 1할도 적다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런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즐거우면 되는 일이지.”

“그럼 이 제자도 지금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님께서 1할은 깨친 것입니까?”

“당연하지. 다만 그것이 또 잠시 후에는 사라질까 염려를 할 뿐이라네.”

“그렇다면, 학문으로 어디까지 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상승(最上乘)의 지혜로운 능력자가 일생을 바쳐서 자연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연구한다면 7할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해 봤네.”

“그렇다면 스승님의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입니까?”

“말해서 뭘 하겠는가?”

“좀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제자가 생각하기에는 7할은 몰라도 5할은 얻으신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망발(妄發)~!”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음양오행의 각 방면에서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신과 맞겨뤄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1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야 아무렇게나 생각하시게. 사실 그대의 관점에서야 내가 얻은 깨달음이 1할이든 9할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렇긴 하겠습니다.”

“신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지.”

“신은 무엇입니까?”

“자연(自然)~!”

“자연이라면, 꽃 피고 비 오고 단풍 들고 눈 내리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맞아.”

“그 이치를 다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바람이 동풍으로 얼마나 강하게 불다가 몇 시에 다시 방향을 바꿔서 남풍이 되었다가 밤이 되면 사라지는데, 하늘에는 구름이 5할로 덮여 있다가 그 바람에 흩어져서 1할만 남아서는 남으로 흘러가게 되고, 다시 날씨는 폭염으로 개의 혀가 많이 길어졌다가 언제 다시 비가 내려서 시원하게 된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겠지.”

“그런 것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습니까?”

“신이 되면 알겠지.”

“아, 이제 서야 이해가 됩니다.”

“뭐가 말인가?”

“신의 영역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물론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네만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제자도 그 의미를 헤아리겠습니다.”

“그렇다면 학문을 할 적에는 무슨 마음으로 해야 할까?”

“자연의 이치를 알아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주 좋은 생각이네. 그다음에는?”

“예? 다음에 또 뭐가 있습니까?”

“이것을 배워서 뭘 하겠다는 생각도 하면 좋지 않을까?”

“그야 잘 배워서 필요한 사람에게 지혜를 나눠주는 마음으로 써먹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멋지군. 그럼 되었네.”

“이런 마음으로 학문에 임해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당연하지. 그래야 천지신명께서도 신명이 나셔서 더 열심히 가르쳐 줄 것이 아니냔 말이지.”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대로만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이를 말인가.”

“당연하다고 하면 초학자는 혼란도 많이 겪겠습니다. 이론대로 될 줄로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좌절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걸러내고 제대로 공부를 할 사람만 키우는 것도 어미 사자가 새끼 고르듯 하는 것이라고 봐야지.”

“참으로 심오한 말씀이십니다.”

“걸러지기 싫으면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네.”

“공자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열심히 했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모든 세계에는 또 하나의 최상과 최하가 있고 그 중간이 있는 법이라네.”

“그렇습니까? 훌륭한 스승에게는 어리석은 제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스승이 잘 가르치니까요.”

“그렇다면 염구(冉求)가 왜 나왔겠는가.”

“염구가 누구입니까?”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분이지 않은가.”

“아니, 공문십철이면 공자 문하의 십대제자(十大弟子)가 아닙니까?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그런 분이 어떻게 유명한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공부하다가 그만두겠다고 해서 쫓겨났다더군.”

“그만하겠다고 하면 달래서 하도록 해야 하는 것도 스승의 몫이 아닙니까? 너무 냉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잘하신 거지.”

“그럴까요?”

“이미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데 열심히 하라고 해서 될 일인가?”

“아, 그것까지도 읽으셨군요. 그렇다면 잘하신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 제자는 가르치고, 안 할 제자는 내보내는 것도 스승의 할 일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하겠지.”

“행여 제자에게는 그런 말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떠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부가 있는가. 다만 때가 되면 가지 말라고 잡아도 뿌리치고 갈 것이네.”

“그것이 인연이란 것입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처음 시작을 한 풍수 공부가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진전이 되기도 합니다.”

“당연하지. 공부도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시작은 하더라도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는 바람과 지면에 따라서 또 달라지기 마련이라네.”

“그나저나 오늘 모처럼 나들이하신 길손들이 지루할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