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제11장 간지의 변화 / 8. 천복지재(天覆地載)의 이치(理致)

작성일
2017-03-13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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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제11장 간지(干支)의 변화(變化)

8. 천복지재(天覆地載)의 이치(理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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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천복지재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우선 천복지재의 뜻을 풀이해 보셔봐.”

“뜻이야 쉽잖아요. ‘하늘에서 덮어주고 땅에서 실어 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풀이도 해 보실 수 있나?”

“하늘은 천간(天干)을 말하겠죠?”

“그렇겠지.”

“그렇다면 천간에서 덮어줘야 한다는 것이니까, 이때의 주체(主體)는 지지(地支)가 되겠어요.”

“옳거니~!”

“지지에서 바라는 것이 있을 적에는, 천간에서 그것에 호응(呼應)해서 따라준다는 의미잖아요?”

“정답이로군.”

“그렇다면 반대로 천간의 입장에서는 지지가 받쳐주기를 바랄 적에는 지지에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잘 설명하셨네.”

“설명은 쉽지만 실제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는 임싸부의 설명이 필요해요.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거죠?”

“그렇겠군. 우선 인(寅)이 있다고 가정(假定)을 해 보게.”

“예. 인이 있어요. 머릿속에 그렸어요.”

“만약에 인이 약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천간에는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인목(寅木)이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천간에는 임수(壬水)가 있어서 임인(壬寅)이 되면 좋겠네요. 계수(癸水)도 되지만 계인(癸寅)의 간지 조합은 없으니까 논외(論外)로 하고서 생각하면 그렇겠는걸요.”

“잘 이해하셨네. 그런데 경(庚)이 있어서 경인(庚寅)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그렇잖아도 의지할 곳이 없는 인에게는 큰 고통이 될 수밖에 없겠는걸요.”

“병(丙)이 있다면?”

“병도 마찬가지로 인에게는 목마름만 더욱 부추길 뿐이잖아요?”

“맞아. 이것이 천복에 대한 의미라네.”

“아하, 그러니까 임인(壬寅)은 천복이지만 경인(庚寅)은 아니라는 뜻이었군요. 항상 이렇게만 기억해 두면 되는 거죠?”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지.”

“예? 그럼요?”

“만약에 지지에 목이 우거져서 금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임인(壬寅)은 도움이 될까?”

“도움이 뭐예요. 더욱 무성하게만 할 뿐이죠. 오히려 경인(庚寅)이 된다면 금극목(金剋木)으로 정리가 될 수 있겠는걸요.”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오행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날이 갈수록 자원의 생각이 예리해지는걸. 하하~!”

“뭐 그 정도 갖고서요. 호호~!”

“이때에도 임인(壬寅)이 천복(天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네요. 이제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았어요. 그러니까 고정관념(固定觀念)이 아니라 항상 경우에 따른 정답이 있다는 말씀이죠?”

“역시 총명한 자원일세. 하하~!”

“그렇다면 지재(地載)도 이치는 같다고 봐야 하겠는걸요.”

“어떻게?”

“천간에서 지지의 도움을 바랄 경우에는 생조(生助)가 있으면 지재가 되는데 오히려 극설(剋洩)이 있으면 지재가 아니라 지부재(地不載)가 되는 것이잖아요?”

“이제 더 이상 해줄 말이 없군. 정확하게 이해했네.”

“아하, 느낌이 와요. 천복지재의 의미는 결국 조화(調和)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었네요.”

“아마도 자원은 명학자의 적성이었던가 보군.”

“간지가 조화로우면 천복지재가 되지만, 서로 괴패(乖悖)하여 어긋나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잖아요.”

“맞아.”

“그러니까 순수(順遂)하다는 것도 결국은 천복지재에 연결이 되어있다고 봐도 되겠어요. 참 재미있는걸요. 임싸부의 가르침은 날이 갈수록 재미를 더해주고 계세요. 호호~!”

“비록 간지의 여덟 글자로 이뤄진 명조(命造)이지만 그 안에서는 또 온갖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네.”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에요. 풍수학보다 제가 느끼기에는 명학이 더 공부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풍수학은 온 산천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데 명학은 글자의 간지만 잘 보고 있으면 되잖아요. 호호~!”

그러자 우창이 한마디 거들었다.

“수상(手相)은 손만 보면 되고, 명학(命學)은 사주만 보면 되는데, 천문(天文)은 하늘을 봐야 하니 구름이 끼면 헛일이고, 지리(地理)는 산천을 봐야 하는데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으니 일이 점점 커진다고 할 수가 있겠는걸.”

“우창은 명학이 재미있는가?”

“당연하지. 여기에서부터 오행의 생극과 음양의 균형을 이해한다면 다른 무엇을 하더라도 밑거름이 튼튼할 것이라는 확신(確信)이 드네.”

“맞는 말이야.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명학(命學)을 배우라고 운산 스승님께서도 말씀하셨다네.”

“아마도 이것이 공부하는 순서에 부합된다고 하겠어.”

우창이 이해하고 있다는 뜻을 고월에게 전했다. 고월도 그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지. 참으로 중요한 공부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게 된다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의 사주가 순수(順遂)하고 정수(精粹)할까?”

“극히 일부분이라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대부분은 괴패(乖悖)하고 혼란(混亂)한 사주를 타고나겠지?”

우창이 다시 고월의 말에 동의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자원은 이야기의 내용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지 아까부터 조용하게 앉아서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골몰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본 우창이 이야기 속으로 자원을 끌어들여줬다.

“아니, 자원은 정리가 잘되지 않는 모양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흡사 관음보살이 입정(入定)에 드신 모습이네. 하하하~!”

“아, 진싸부 뭔가 엉켜있는 실타래의 한가운데 발을 놓은 것 같아서 자칫하면 얽히게 될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뭐가 이렇게 복잡하죠?”

“자원은 바둑판을 본 적이 있겠지?”

“물론이죠. 천진에 있으면서 도사들의 바둑 두는 것도 많이 봤잖아요.”

“배워보지는 않고?”

“조금 배우긴 했는데 너무 복잡해서 그만뒀어요. 시간도 아깝고요. 그래서 겨우 바둑판에서 하는 이야기나 알아들을 정도랍니다. 진싸부님도 바둑을 좀 아시나 봐요?”

“나도 딱 그 정도의 수준이지 싶네. 그런데 바둑판의 줄은 몇 개던가?”

“그야 19줄이잖아요? 그래서 바둑돌을 놓을 자리는 361군데고요.”

“맞아, 그렇게 작은 바둑판에서의 변화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라잖아?”

“태고 이래로 같은 바둑을 둔 적이 없다고 하는 걸로 봐서 그렇겠어요.”

“지금 명학을 공부하다가 보니 문득 바둑판 생각이 나서 말이네.”

“왜요? 복잡해서요?”

“바둑판은 기반(棋盤)이라고 하잖아?”

“맞아요.”

“명학의 팔자는 명반(命盤)이라고 하니까 서로가 닮았다는 말이지.”

“그래도 바둑보다는 쉽지 않을까요?”

“바둑은 판이나 크지, 명반은 기껏 사간사지(四干四支)일 뿐인데 그 변화가 이렇게나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뭔가. 하하~!”

“아항~! 진싸부도 그렇게 생각하셨구나. 완전 동감이에요. 호호호~!”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월이 끼어들었다.

“바둑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명반은 바둑판보다는 장기판(將棋板)을 닮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

 

 

“장기판? 그건 왜 그런가?”

“바둑판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그것은 흡사 세상에 태어난 한 생명이 삶을 살아가는 여정(旅程)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그럼 장기판은?”

“장기판은 미리 15개의 말이 놓여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유(有)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다르지. 이미 태어나면서 저마다 주어진 간지의 조합을 놓고서 그 순간부터 해석을 하고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서 혼자 두는 장기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아, 맞다. 그렇지. 명반에도 미리 여덟 개의 말이 놓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군. 다만 장기판은 그 배치가 서로 동등하게 시작하지만, 명반에서는 상대가 없고 혼자서 세상을 헤쳐 간다는 것이 다르겠군. 일리가 있네. 하하~!”

“진싸부의 말씀으로 머리가 훨씬 맑아졌어요. 고마워요. 호호~!”

자원의 긴장이 풀리고 다시 평온해 보이자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릴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훨씬 많겠지.”

“기왕지사(旣往之事) 그렇게 타고난 사람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가 있겠는가?”

“아, 팔자를 고친단 말인가? 그게 가능할까?”

고월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우창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말했다.

“사람이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물론 노력을 하면 되기야 하겠지. 다만 그 노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네.”

“그렇게 타고난 팔자를 고치는 것이 어려운가?”

“오죽하면, ‘팔자 도둑질은 못한다.’고 하지 않은가. 그만큼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지.”

“혹, 괴패(乖悖)하고 혼란(混亂)한 사주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 수행을 한다면 그래도 안 될까?”

“그렇게 한다면 벗어날 수도 있겠지.”

“내 말이 그 말이잖은가? 그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론적으로만 그렇단 말이네.”

“왜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사실, 팔자를 혼란(混亂)스럽게 타고난 사람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다스리려는 마음이 있을까?”

“오호~! 심리학으로 본다면 그 말이 맞겠는걸.”

“유심론(唯心論)이 명학(命學)이라네.”

“마음을 떠나서 논할 수가 없단 이야기지?”

“당연하지. 혹자는 사주를 보면 건강이 보인다고도 하고 수명이 보인다고도 하는데 모두가 황설(荒說)일 뿐이라네.”

“나도 전에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은걸.”

“가능한 것과, 가능성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지 자칫하면 미신(迷信)에 휘둘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네.”

“그렇군. 매우 귀중한 말씀을 해 주셨는걸. 명심(銘心)해야 하겠네.”

“명학(命學)은 오로지 심리학과 맞닿아 있다네. 그렇게 놓고 보면 재미있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네.”

“마음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도 가능하겠는걸.”

“바로 그 말이라네. 그야말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지.”

“그렇다면 불교(佛敎)는 대단한 심리학인걸.”

“여부가 있겠나. 고등(高等)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렇겠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모든 것은 뜬구름 같다고 했으니 불가(佛家)의 고승(高僧)들이야말로 고도(高度)의 심리학자들이었군.”

“맞는 말이네. 명학(命學)은 심리의 구조를 익히는 것이니 의학으로 보면 해부학(解剖學)에 해당하고, 불학(佛學)은 심리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니 의학으로 보면 정신의학(精神醫學)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정신의학은 두뇌의학(頭腦醫學)과 비슷하다고 볼까?”

“아니지. 기능적인 두뇌이지만 능력은 또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

“뇌(腦)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만은 아닐 것으로 보는 것이 정신(精神)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냔 생각을 한다네.”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이야기로군.”

“비록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도 그 현상은 두뇌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구분해야 할 것이네. 왜냐면 뇌도 생각하지만 몸의 구석구석에 있는 기능들도 모두 생각을 할 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냔 생각이 드는 거지.”

“엉? 그게 가능한가? 모든 것을 감지하고 지시하는 기능은 두뇌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만도 아니라네. 심장(心臟)도 생각한다는 말도 있다네.”

“첨 듣는 말인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

“예전에 신의(神醫)라고 하는 화타(華陀)가 있었다네. 외과(外科)의 기술에 대한 명의(名醫)였지.”

“소문에 관운장(關雲長)을 치유했다는 그 사람인가?”

“그렇다네. 그가 심장이 멈춘 사람에게 방금 명이 끊어진 사람의 심장을 옮겼던 적이 있었다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야 모르지 전설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그 사람이 살아났다지 않은가.”

“과연 대단한 화타로군.”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네.”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의 행동에 이상스러운 점이 발견되었다지 않은가.”

“아니, 심장 주인의 행동이라도 했더란 말인가?”

“맞았네. 그래서 화타도 놀랐다고 하더군.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고관대작의 부인이었고, 그래서 행실이 요조숙녀였다지 뭔가. 그런데 심장을 이식하고 나자 그다음부터는 말을 타고 초원을 내달리는 것을 그렇게 즐겨 했다고 하네. 이런 이야기를 본다면, 결코 기억은 두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관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

“그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렇다면 원래 심장의 주인은 무인(武人)이었던가?”

“연무장에서 훈련하다가 병사가 잘못 쏜 화살을 맞고 급사하는 바람에 그러한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심장에도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널리 보고 듣는 것도 공부라고 하지 않는가. 하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군. 두뇌와 정신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가 있겠네.”

“사주를 통해서 그 사람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을 유추(類推)하고 불가(佛家)의 수행을 통해서 단점을 고쳐간다면 도덕군자가 되지 않을 사람도 없을 것이네.”

“물론 그러한 결과가 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겠지?”

“당연하리라고 보네. 괴패(乖悖)하고 혼란(混亂)된 사주라면 아마도 그러한 노력을 하려는 마음조차도 먹을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봐야지.”

“그렇다면 숙명(宿命)은 고치기가 극히 어렵다고 봐야 하겠군.”

“아마도~!”

“다만,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 정리를 하면 되겠지?”

“그야 여부가 있겠나. 그로 인해서 사람들이 수행(修行)의 길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겠네.”

“정말 일일이 모두가 다 옳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

자원도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말을 했다.

“전에 있는 곳에 항상 우울한 도사가 있었어요.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우울해지거든요. 어쩌면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도 철저하게 우울한 방향인지 참으로 놀라웠어요.”

그 말에 우창도 동의했다.

“당연히 그런 사람도 있어.”

“나중에는 저도 포기하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만 말을 하니까 결국에는 이야기를 할 마음도 사라지고 없었어요.”

“당연한 일이지. 메아리가 있어야 재미가 있을 텐데 메아리가 없으면 흥도 사라지고 마는 법이니까.”

“결국, 그 사람은 벼랑에서 떨어져서 삶을 마감했어요.”

“죽으려는 사람은 죽을 길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또 활로(活路)를 찾아내게 되는가 봐요.”

“생각해 보니까, 사주에 천복지재로 잘 구성이 되어 있어서 순수(順遂)하고 정수(精粹)한 사람은 생각도 반듯하고 희망적이고 낙관적(樂觀的)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할 것이고, 그가 만나는 사람을 대하지 싶군.”

그 말에 고월이 동조를 한다.

“왜 아니겠나.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라네.”

“아, 첫인상 말인가?”

“처음에 그 사람을 봤을 적에 만나게 되는 것은 마음이거든. 마음에서 서로 호감이 생긴다면 이야기를 나눠도 좋지만 첫인상에서 거부감이 된다면 조심해야 한다고 보면 될 걸세.”

“맞아. 사람은 첫 순간에 모든 것을 파악한다고 봐도 되겠어.”

“맞는 이야기라고 보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말은 만고(萬古)의 진리(眞理)라고 정리를 하면 되겠지?”

“우창은 동의하네.”

“자원도 동의해요.”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면서 통쾌하게 한바탕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