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제10장 간지의 세계/ 16. 자원(慈園)의 옛 추억(追憶)

작성일
2017-02-2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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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제10장 간지(干支)의 세계(世界)

16. 자원(慈園)의 옛 추억(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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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싸부와 작별을 한 조은령은 왠지 모를 마음속의 변화를 느끼게 되자 심란(心亂)하여 숙소로 돌아가던 발길을 노산의 입구로 향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는 깊어지는 학문의 세계와는 별개로 또 다른 마음이 자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을 연모(戀慕)라고 생각해도 되겠다는 느낌이 든 것은 이미 천진에서 겪어 본 경험에 의해서였다. 하북원에서 있을 적에 알게 된 중년의 도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노산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우창을 만나면서 다시 마음의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괴롭기도 했다. 산문의 입구에 다다르자 우창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적한 곳에 앉아서 점점 초록이 짙어지고 있는 산의 중턱을 바라본다. 멀리 보이는 중턱의 바위가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그 손짓은 우창의 모습으로 변해서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문득 하북원에서 연모했던 엄군평(嚴君平)의 모습으로 바뀌어서는 늠름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자 지난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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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의 가을이었다. 그날도 조은령은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도사들이 먹을 찬거리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밭에서 채소를 뽑고 있었다. 그때 한 도사가 다가와서는 무겁게 안고 있는 무 다발을 가볍게 둘러메고는 터벅터벅 걸어서 주방의 앞에다가 내려놓고는 휘적휘적 가버리는 것이었다.

“도사님, 고맙습니다~!”

힘든 일을 거들어준 도사에게 인사를 했지만, 오른손을 들어서 흔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또 일에 휩싸여서 이내 잊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쓸고 있는데 또 불쑥 나타난 사람이 있어서 자세히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말도 없이 빗자루를 빼앗아서는 휙휙 마당을 쓸어주고는 또 휭하니 사라졌다.

이번에는 조은령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뒤를 따랐는데, 걸음이 하도 빨라서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렇게 걷던 사람은 연못의 정자에 올라가서는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용기를 내어서 다가갔다.

“저어~! 도사님 번번이 도와주셨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소녀는 조은령이라고 해요. 고마워요.”

그 남자는 얼굴을 돌려서 바라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고는 연못에서 놀고 있는 잉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싶기도 했는데 얼굴을 막상 가까이서 바라보니 영준(英俊)하게 생긴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혹시 괜찮으시면 존함이라도…….”

“아, 난 엄군평(嚴君平)이오~!”

“그러셨군요. 엄 도사님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포권으로 감사를 표하자 그도 일어나서는 마주 인사를 했다. 합장하는 것으로 봐서 무림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엄 선생님은 어느 도관에서 기거하시는지요?”

“나는 무극자의 도법(道法)을 따라서 태극원(太極院)에서 도학을 배우고 있소이다.”

“엄머~! 도학이라고요? 소녀도 그러한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혹 괜찮으시면 한 수 알려 주실 수 없으세요?”

이렇게 말을 붙이면서 옆에 앉았다. 엄군평도 소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는지 눈웃음을 지으면서 동의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엄사부님, 도학에서는 무엇을 공부하는 거예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소이다.”

“자연과 인간이라고요? 뭔가 근사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조금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근데, 조 낭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소?”

“소녀는 아직 공부할 자격을 얻지 못하여 도사님들 식사를 담당하고 있답니다.”

“아, 그러셨군. 그래 무엇을 배우고 싶소?”

“마음 같아서는 다 배우고 싶지만, 지금은 선배들로부터 의학에 대해서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좋은 공부를 하시는군.”

“그렇긴 한데 너무 어려워요.”

“세상에 어렵지 않은 공부가 어디 있겠소.”

“그래도요~! 일하랴 심부름하랴 공부를 할 시간도 별로 없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오이다. 그러나 어쩌겠소. 겪어야 할 것은 겪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엄사부께선 무엇을 배우시는지요? 이미 많이 배우셨겠죠?”

“태극원에서는 도(道)와 덕(德)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소이다.”

“그래요? 도는 무엇이고 덕은 무엇이길래요?”

“도는 뿌리가 되고 덕은 잎이 되는 것이라오.”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로 답을 하자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도의 뿌리를 어떻게 공부하는 거예요?”

“봐하니 조 낭자는 무예로 몸을 단련하신 것 같은데.”

“어머~! 알아보시네요. 사실 강호에서 제 한 몸이라도 지킬 요량으로 태극검(太極劍)을 틈나는 대로 익히고 있사옵니다.”

“오~! 태극검이라.”

“엄사부님도 아시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 좀 익혔더랬소.”

“그런데 왜 무림에는 발을 들이지 않으셨어요?”

“그건 내 천성과 맞지 않아서라오.”

“아, 그러셨어요? 조금만 설명해 주세요.”

“태극검을 시작하려면 제일 먼저 뭘 하오?”

“그야 마음을 모아서 태극(太極)의 변화(變化)를 떠올리는 명상(瞑想)을 하잖아요.”

“그렇소.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지.”

“마음을 지배한다고요?”

“마음은 여우와 같아서 이익은 탐하고, 손해는 피하는 간교(奸巧)한 존재인 까닭이오.”

“원래 그게 사람이잖아요?”

“그러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도문(道門)으로 들어갈 수가 없소.”

“아, 그렇군요.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버릴 수가 있죠?”

“검을 익히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야 약자(弱者)를 구하고, 폭력(暴力)을 다스리기 위함이지요.”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란 말이오.”

“왜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통해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드는 것이 무림의 본분(本分)인데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럼요~! 절정(絶頂)의 고수가 되어서 강호를 누비면서 악도(惡徒)를 쓸어버리면 되잖아요?”

조은령의 그 말에 엄군평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지금 소녀를 비웃으신 거예요?”

“아, 아니오~! 너무나 천진한 답을 들이니까 갑자기 웃음이 나왔을 뿐이오. 오해는 마시오. 하하하~!”

“뭐가 우스우신 거예요?”

“억울한 자를 구제(救濟)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음이 나오곤 한다오.”

“어머~? 왜요?”

“누굴 위해서 뭘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도(道)로부터 멀어지는 생각일 뿐이오.”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거예요?”

“실로 세상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점점 알 수가 없는 말씀만 하시네요.”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오.”

“에구~! 무슨 도가 그래요? 그냥 ‘놀고먹겠다.’는 심보로군요.”

문득 화가 나서 톡하고 쏘아붙였다.

“아하하하~! 화가 나셨군. 하하~!”

“왜 아니겠어요. 무슨 공부가 좀 되어있는 분이신가 했는데 결국은 건달이시잖아요. 쳇~!”

“낭자를 보니 세상의 악은 모두 사라지고 평화로운 날이 오겠소이다.”

“왜요? 안 될 것 같아요?”

“왜 안 되겠소. 노력하시오. 하하~!”

“그럼 공부는 왜 하시는 거예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해하고 자신도 그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리된다는 이치라오.”

 

“무슨 말씀이세요? 자연은 부단히 가꾸고 잡초도 뽑고 노력을 해야 입에 들어갈 밥도 얻고 찬도 얻는 법이라고요.”

“아, 오해하지 마시오. 잡초를 뽑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잡초를 잡초로 보고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뽑는 것을 탓하는 것이라오.”

“말로만 번드레하게 하시네요.”

“자연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춘하추동을 만들었으니 인간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볍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것이라오.”

“예? 알쏭달쏭하네요.”

“검을 뽑아 들고 상대를 마주하고 있을 적에는 무슨 마음이 들겠소?”

“그야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일합(一合)에 끝낼 급소(急所)를 찾을 마음뿐이지요. 그래야 승리를 거둘 수가 있으니까요.”

“왜 이겨야 하오?”

“이기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요.”

“그렇다면 애초에 싸우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오?”

“예? 뭐라고요?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가 죽지 않으려면 검을 뽑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냔 말이오.”

“참, 이상한 논리시네요. 그럼 강호의 악은 누가 제거해요?”

“왜 남의 일에 걱정한단 말이오?”

“그게 왜 남의 일이예요?”

“무심(無心)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도란 말이오.”

“무심으로 돌아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냔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질문을 잘하시오.”

“예?”

“그렇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란 말이오. 하하하~!”

“쳇, 그러죠. 그럼 엄사부는 상대를 앞에 두고 검을 뽑았을 적에 어떻게 할 건데요?”

“무심(無心)~!”

“예? 무심이라뇨? 마음이 없단 말이에요?”

“그렇소. 무심~!”

“어떻게 무심일 수가 있죠? 그러고 무심이란 어떤 것을 말하죠?”

“당연히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무심이 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인데요?”

“무념무상(無念無想)~!”

“무념무상이라면, 생각도 말고 아무것도 떠올리지 말라고요?”

“그렇소. 자 검을 뽑아 보시오.”

“잠시만요. 얼른 다녀올게요.”

조은령은 이렇게 재미있고 진지한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듯이 처소로 달려가서 자신의 장검(長劍)을 들고 뛰어왔다. 혹시라도 엄군평이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여전히 잉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검 가져왔어요.”

“자, 나는 이 부채를 검으로 사용할 테니 한 번 공격해 보시오.”

“알았어요.”

“채앵~!”

조은령이 검을 뽑자 서늘한 검광(劍光)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고쳐 잡고는 엄군평에게 향했다.

“어서 준비하세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언제든지 공격해도 좋소.”

한 손으로 부채를 들고 대수롭지 않게 마주 선 모습이 한칼에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완전 무방비(無防備)의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것이 얄미워서 태극검의 매운맛을 보여주려고 칼을 뽑았는데, 막상 공격하려니 상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공격도 아니고 방어도 아닌 저런 자세는 본 적이 없었던 조은령인지라 문득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딘가 빈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계속 걸음을 옆으로 움직여서 빙빙 돌면서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곳으로도 치고 들어갈 틈이 나오지 않았다.

“자, 제 검을 받으세요~!”

언제까지 틈만 노리고 있을 수가 없었던 조바심으로 아무 곳이나 찌르고 들어가는 조은령. 그 순간 뒷덜미가 시큰하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견정혈(肩井穴)이 막혀서 칼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소이다. 하하하~!”

“소녀의 혈도(穴道)를 짚으셨잖아요? 이건 반칙(反則)이란 말이에요. 반칙~!”

“반칙이라뇨? 그럼 정칙(正則)은 무엇이오?”

“공격에는 방어를 해야지 비겁하게 혈도를 짚으면 어떡해요~!”

조은령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