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제10장 간지의 세계/ 17. 홍고량(紅高粱)에 취하다.

작성일
2017-02-2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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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제10장 간지(干支)의 세계(世界)

17. 홍고량(紅高粱)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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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령의 그 말을 듣고서는 너털웃음을 웃는 엄군평이었다.

“맞는 말씀이오. 하하하~!”

“뭐가요?”

“방어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소?”

“그래요. 아, 지금 방어를 하셨단 말이죠?”

“그렇소이다.”

“음…….”

조은령은 놀림을 당한 것 같아서 화도 치밀고, 꼼짝없이 당했으니 창피스럽기도 해서 마음이 산란했다. 그것을 아는지 엄군평이 혈도를 풀어주고는 다시 앉았다.

“앉으시오. 수고하셨소이다.”

“칫~!”

“이제 아셨소?”

“뭘 알아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상대의 검을 마주해도 여간해서는 잘 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오.”

“잉~! 화는 나지만 인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네요. 맞아요.”

갑자기 엄군평이 큰 소리로 말했다.

“시주께서는 무슨 가르침이 계신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진작부터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조은령은 몰랐다. 문득 엄군평이 말을 해서 비로소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멀찍이 있는 고목나무 뒤에서 장검을 등에 멘 한 남자가 나타났다.

“과연 예리한 안목을 가지셨소이다. 껄껄껄~!”

“혹 무슨 가르침이라도 계신 것이오?”

엄군평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감정이 없는 말투로 대꾸를 했다.

“여리디 여린 소녀와 칼 장난을 하는 것이 하도 재미있어서 지켜보고 있었소이다. 괜찮으시다면 이 방랑검(放浪劍)도 한 번 받아 주시겠소?”

“아,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나 했더니 고작 싸움을 걸어오신 것이오?”

“시끄러운 아가리를 닥치고 어디 한번 받아봐라. 주둥이로만 천하를 제패한다는 너 같은 놈들을 제일 싫어하는 방랑검이다.”

“음…….”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殺伐)해졌다. 그러자 조은령은 괜히 자기 때문에 엄군평에게 어떤 위해(危害)가 생기면 어쩌겠느냐는 두려움이 생겼다.

“어디에서 감히 피비린내를 맡고 싶어서 끼어드느냐~! 소녀가 먼저 고얀 버릇을 고쳐드리겠다. 야잇~!”

막, 검을 들고 달려들려는 순간, 전음술(傳音術)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물러나시오. 저놈은 흉폭(凶暴)한 놈이오.”

조은령은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는 엄군평을 바라보았다. 엄군평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미소를 보이면서 조은령의 검을 받아서는 상대를 향했다.

“하하하~! 오늘은 책만 보다가 진력이 난 서충(書蟲)에게 운동을 시켜주시려고 고인께서 등장하셨으니 감사부터 드리오.”

그리고는 포권을 하고는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예의 그 부채를 들었던 자세 그대로였다. 다만 부채 대신에 조은령의 장검이 들려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방랑검은 눈이 없으니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렸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휘익~!”

다짜고짜로 숨 쉴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이 예리한 검 끝이 가슴의 급소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슥~!”

엄군평은 바람처럼 몸을 비틀면서 공격을 막아냈다.

“이 미꾸리지 같은 놈~!”

그 사내는 다시 몸을 돌려서 바로 달려들었다. 순간, 엄군평의 손에 있던 검이 휙 날았다.

“퍽~!”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엄군평이 던진 칼이 허공을 날아서 사내의 허벅지에 꽂혔다. 그 사내가 허벅지를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조은령이 정신을 차려서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의 검이 사내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선혈이 낭자했다.

“으윽~~!!”

“얼굴을 펴시오, 방랑검객~!”

“이 비겁한 놈이……. 으윽~!”

“하하하~! 세상이 넓다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지 않겠소이까~!”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던지고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표정에는 두려움이 스쳐지나 갔다. 순식간에 주객이 바뀐 모습이었다.

잠시 바라보고 있던 엄군평이 그 사내에게 다가가서 출혈을 멈추도록 혈도를 짚었다. 쏟아지는 피가 멈추자. 정신이 돌아왔는지 다시 엄군평을 노려볼 뿐 말은 없었다.

“아무 곳에서나 검광을 뿌리다가 조상님이 주신 씨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을 것이외다. 어서 의원이나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시오.”

그렇게 말을 하고는 검을 뽑아서 사내의 옷에다가 쓱쓱 문지른 다음에 칼집에 꽂아서 조은령에게 넘겨줬다.

그 사이에 이미 방랑검은 절뚝이면서 사라져갔다.

“아니, 엄사부는 글만 읽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수법을 쓰신 거예요?”

“그냥, 가끔은 무례한 사람들에게 혼을 내어 줄 만큼의 잔재주라오. 하하하~!”

“그런데 검을 던지면 어떻게요? 그러다가 빗나가면 목숨이 위태롭잖아요?”

“한 자루의 장검이, 때론 검이 되고 또 때론 표창도 된다오. 검은 검이어야만 할 이유라도 있소?”

“예? 뭐, 그건 아니지만.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이름은 이름일 뿐이오. 아무렇게라도 까부는 놈들에게 가르침만 주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하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검법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아, 허허실실검(虛虛實實劍)이라고 한다오.”

“예? 듣느니 첨인데요?”

“그럴 거외다. 나도 첨으로 말을 해 본 것이라서. 하하하~!”

“에잉~! 소녀를 놀리신 거예요?”

“이제 아셨소?”

“예? 뭘요?”

“마음이 안 움직이면 이긴다는 것을 말이오.”

“아하~! 무슨 말씀인지 이제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전음술까지 펼칠 정도면 강호에서도 이름을 떨쳤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용이겠소. 도를 닦고 덕을 베푸는 것이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뿐이라오.”

“원래 무당파(武當派)의 제자셨지요?”

“그렇소이다. 눈이 꽤 매운 낭자시오. 하하~!”

“저에게도 한 수 가르쳐 주세요.”

“난 검과는 친하지 않다오.”

“그래도 꼭 한 수 배워야 하겠어요.”

“그럼 간단히 몇 수 알려드리리다. 하하~!”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허허실실검법을 전수 받을 수가 있었던 조은령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기술보다는 내공이 중요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해의 겨울이 다 가도록 검술(劍術)과 심술(心術)을 배우면서 가까이하는 동안에 어느 사이에 연모하는 마음이 생겨버린 조은령이었다. 따뜻한 봄날의 분위기 좋은 날에 진심을 다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좋아한다.’는 고백(告白)을 했지만 웃기만 하던 엄군평은 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눈치를 채고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고, 뱉은 말은 담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못 잡고 검술만 연마하다가 비로소 수련기간이 끝나자 추억이 많은 하북원을 떠나고 싶어서 노산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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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의 바위가 엄군평으로 보이자, 문득 지난 시절의 가녀린 마음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쓰디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 노산에서도 이렇게 마음을 뒤흔드는 우창을 만나게 되었으니 또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애써 본심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도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산문 밖으로 나왔으나 오히려 마음속은 더욱 헝클어진 실타래 같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여기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거지?”

귀에 익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우창이 산책을 나왔는지 자신을 보고는 다가왔다.

“아, 오라버니 산책 나오셨어요?”

“그래.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 뭘 하는 거지?”

“풍경이 하도 좋아서요. 오라버니는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며칠을 공부만 죽으라고 했더니 멀미가 나서~! 하하~!”

“그럼 마을로 내려가서 술 한 잔 마시는 건 어때요?”

“아니, 자원이 술 생각이 났단 말이야? 나도 마침 목이 컬컬했는데 잘 되었군. 그러지.”

“한 모금만 마시고 싶어졌어요. 어서 가요~!”

주막에는 한가로이 주모가 파리를 쫓고 있다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는 반겨 맞는다.

“어서옵~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제비 같구먼~!”

창가의 탁자에 앉아서 술을 시켰더니 두부와 빈대떡을 안주로 내어 왔다. 그리고 ‘동파육(東坡肉)도 맛있다.’고 하는 주인 여인의 소릴 듣고 그것도 시켰다.

“자, 시원하게 한 잔 들자~!”

살짝 들뜬 소리로 우창이 잔을 들었다.

“오라버니의 행운을 빌어요~!”

“나도~!”

두 사람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마주 보면서 유쾌하게 웃는다.

“자, 또 한 잔~!”

이렇게 술 한 근은 이내 바닥이 나고 다시 또 한 근을 시켜서 마시다 보니 우창은 기분이 흐뭇해졌다. 자원의 얼굴도 발그레한 것이 더욱 예뻐 보였다.

“오라버니~!”

“으응?”

“술은 오행이 뭐예요?”

“술의 오행? 뭐 같아?”

“목(木)이요.”

“왜?”

“술이 들어가면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오르잖아요.”

“그런가? 그럼 목생화(木生火)란 말이군. 나는 물 같은걸.”

“어머, 왜요?”

“마음의 갈증이 시원하게 풀리니까. 하하~!”

“그럼 수생금(水生金)이란 말씀이시죠? 마음은 금(金)이니까요. 호호~!”

“오호~! 요즘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했더니 나날이 실력이 배가(倍加)하는 군.”

“쳇~!”

“쳇이라니?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자, 더 마셔요. 갈증이 풀렸으면 이제부터 마시는 술은 수생목(水生木)이 될 거예요.”

“엉, 무슨 말이지?”

“나는 가슴이 달아올랐는데, 오라버니는 갈증만 풀렸더니 아직도 술이 부족하단 말이잖아요. 자요~!”

“건배(乾杯)~!”

그렇게 잔에 고량주(高粱酒)를 가득 붓고는 어서 마시라고 재촉했다.

“알았어. 까짓것 마시지 뭐. 하하~!”

붉은 고량의 향긋한 술기운이 온몸을 감싸고돌아서 정신을 어지럽힌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안주가 떨어지면 다시 안주가 나오고, 술이 떨어지면 또 술이 나온다. 그렇게 다섯 근의 술을 마시다 보니 그야말로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술을 마신 김에 오라버니가 좋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그랬어? 그런 말은 술을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해야지 술기운을 빌려서 말하는 것은 무효야~!”

“술은 누가 마셨다고 그래요~!”

“다섯 근의 술이 다 어디로 갔지?”

“그야 모르죠. 호호호~!”

“내가 다 마셨나?”

“자원이 술을 마셨지만 오라버니가 좋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호호~!”

“그랬어? 내 맘과 같았던 모양인걸.”

“어머~! 그러셨어요? 아이, 좋아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른단 말이야.”

우창은 비로소 자원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부로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야 해야 하는 장면이 되었으니 미뤄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돌려서 눈치가 백단인 자원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만을 바랐다.

“열성적으로 지도해 주시고 하나라도 깨닫게 해 주시려는 노력에 늘 감동이에요. 이렇게 오붓하게 술을 마시니 너무 좋아요.”

“고마워. 부족하지만 열심히 가보자구. 하하~!”

“오래도록 함께하면서 많이 배울 거예요.”

“그러지. 하하~!”

자원은 이렇게 한참을 속에 숨겨 놓은 한마디의 말은 드러내지 못하고 화답을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 수가 있었다. 마음으로 소통함을 느끼면서 어둠이 내리는 도관을 향해서 나란히 걸었다.

이미 술의 취기가 거나해서 저녁 식사에는 동참하지 않기로 하고 우창의 처소에서 작별한 자원이 자기 처소로 돌아왔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뒤엉킨 묘한 심정을 느끼면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아무렴, 저마다 사정은 있는 법이고, 또 싸부에게도 자신의 마음이 있는 것이니깐 이렇게나마 마음을 전했으니 오히려 속이 후련하네. 이제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문득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우창도 싫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엄군평처럼 달아나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도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서 마음의 표현을 잘했던 것이라고 애써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