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제9장 천간(天干)의 소식(消息) / 1. 삿갓을 쓴 낭인(浪人)

작성일
2017-01-22 08:1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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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제9장 천간(天干)의 소식(消息) 


1. 삿갓을 쓴 낭인(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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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우창은 조은령과 대화를 하면서 얻은 인체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다가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보냈다. 마침 그녀도 방문하지 않아서 더구나 정리에 몰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적천수 생각이 들었다. 고월이 돌아와야 공부를 계속할 수가 있겠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화창한 날씨에 이끌려서 밖으로 나온 우창은 산 아래로 바람을 쐬러 나가보고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산문 밖으로 천천히 걸었다. 녹음(綠陰)은 우거졌고 햇살이 따뜻한데 하늘은 구름도 한 점 없는 쾌청(快晴)한 풍경이 마음조차 상쾌하게 만들었다.

산문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싸부~!”

돌아다보니 며칠간 보지 못했던 조은령이 바람처럼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나풀대는 햇볕가리개 모자는 연한 하늘색으로 오늘의 풍경과 썩 잘 어울렸다.

“어쩐 일이야? 잘 있었지?”

“당연하죠~! 이렇게 화창한 날에 싸부께 차나 마시려고 갔다가 나들이하신 것을 보고는 얼른 쫓아 나왔어요.”

“이 넓은 노산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쫓아 나와~!”

“뭘요. 싸부는 뛰어 봤자 령아의 안중(眼中)을 벗어나지 못하신단 말이에요. 호호호~!”

모처럼 쾌활한 조은령의 목소리는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잘했어. 마침 날씨가 하도 좋아서 바깥바람이라도 쐬려고 나가려던 참이야.”

“저두요~!”

“그럼 동행하지.”

“옙~!”

산문의 입구는 다소 소란스러웠다. 노산의 풍경을 감상하러 온 상춘객(賞春客)과 수도하는 도사들이 서로 뒤섞여서 마치 마을에 장이 선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할 만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상인(商人)도 찾아들기 마련이었다. 워낙 출입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작은 성시(城市)를 이루고 있는 풍경은 처소에서 머무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맛이 있었다.

“싸부~! 풍경이 바뀌니까 마음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좋은데요~!”

모처럼 바깥나들이를 한 소녀처럼 까르르대면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우창도 즐거웠다.

“나들이도 해볼만하군.”

산문 밖에서는 이미 노산이 아닌 것처럼 산문을 경계로 삼아서, 안과 밖이 이렇게도 차이가 나는가 싶은 지경이었다.

“어머, 맛있겠다~! 저거 사 먹어요~!”

조은령이 끄는 곳을 바라보니 동해에서 잡은 듯한 게를 쪄서 파는 간이식당이 있었다.

붉은색으로 잘 익은 게의 탐스러운 모습이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럴까? 그럼 어디~!”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잡고 앉았다.

“여기 두 마리요~!”

성격도 급한 조은령이 벌써 주문을 한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를 바라보게 되었다.

우창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무사인 듯싶은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그의 오른손이 없는 모습이어서였다. 그런데 실내의 그늘인데도 삿갓을 눌러쓰고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뭔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싸부~! 게가 나왔어요. 어서 먹어요. 맛있겠다~!”

“그런데, 여기에선 사부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까?”

“그럼 뭐라고 해요? 오라버니? 그래요. 오라버니~!”

눈치도 참 빠른 조은령이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면서 말없이 동의했다.

“오라버니, 천진에서도 게는 많거든요. 그런데 노산에서 먹어보는 게는 더 신선한 것 같아요. 아마도 바다가 가까워서겠죠?”

“그런가보군.”

“맛있죠~?”

“응.”

조은령은 우창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의아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옆의 탁자에 앉아있는 사람을 훑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게의 다리를 뜯으면서 우창이 바라보는 곳을 살펴보니 과연 눈에 띌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만했다.

“오라버니 어서 드세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탁자 아래로 우창의 발을 툭 쳤다. 놀라서 바라보는 우창에게 눈을 찡긋한다. 쓸데없이 남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우창도 이해했다. 그래서 게를 뜯어먹었지만 일단 마음이 가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신경이 쓰였다.

그는 한 손으로 밥을 먹으면서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 편히 관찰할 수가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게를 다 먹은 조은령이 우창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계산을 재빨리 하고서는 다시 낭떠러지가 보이는 풍경으로 우창의 손을 잡아끌었다. 벼랑 위에는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라고 만들어 둔 의자가 있었다.

“오라버니 경치가 참 좋아요. 이런 곳에서 살면 천진은 잊어버리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여기에서 살면 되지. 하하~!”

“근데 오라버니는 경고(警告)가 필요해요.”

“왜? 내가 뭘 잘못했나?”

“왜 그렇게 주변에 대해서 관심 갖는 거예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자칫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강호란 것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거 같아서 조마조마하단 말이에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진짜 안 되겠어요. 그러다가 무슨 일을 당하실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아마도 아까 그 낭인(浪人)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혼내는 것 같은데.”

“맞아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으셨어요? 참 내~!”

“뭐가 어때서?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그렇게도 큰 잘못을 한 거야?”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니 참 천진하기도 한 오라버니~!”

“그건 내가 하기에 달린 거 아냐?”

“무조건 칼을 뽑아서 사람을 썩은 무 베듯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득시글대는 곳이 강호인데요.”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이?”

“그럼요~! 연고가 어디 있고, 사유가 어디 있어요. 그냥 자기 맘에 거슬리면 칼을 휘두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령아가 걱정을 하죠. 쯧쯧~!”

“걱정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험해 보였어?”

“아이구 참, 그는 령아가 아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는 유명한 흑도(黑道)의 총수(總帥)라고 할 수 있는 냉혈마인(冷血魔人) 이군명(李君明)이라는 흉수(凶手)거든요.”

“우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그렇게 안 보이던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대흉수라니까요~!”

“그랬구나.”

“정말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단 말이에요~!”

“에구. 알았어.”

“행여라도 무슨 해코지를 당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나를 염려해서 그랬단 말이야? 기특해라~!”

“쳇~! 딴 소리만 하셔~!”

“나야 전혀 걱정하지 않지.”

“왜요? 목숨이 서너 개는 된단 말이에요?”

“아니, 령아가 있잖아. 그 날렵한 부채 하나면 모두 제압을 할 텐데 뭘 걱정해~!”

“아이구~! 저 흉수의 무공이 태양이라면 령아의 잔재주는 반딧불이도 되지 못한단 말예요.”

“참으로 강호가 넓기는 한 모양이구나.”

“그럼요.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인물들은 말을 할 것도 없고, 온갖 권모술수(權謀術數)는 경악(驚愕)할 지경이란 말이에요. 오라버니 같은 순수한 서생(書生)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초로(草露)가 될 수도 있다고요.”

“뭐 그것도 운명(運命)이잖아?”

“그게 무슨 운명이에요? 비명(非命)이죠~!”

“비명? 그건 또 뭐지?”

“운명과 상관없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거라고요.”

“아, 그런 것도 있었구나. 정말 령아의 강호에 대한 상식은 대단하구나. 그 말을 들으니 뭔가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늘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서 그렇게 담소하는데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던 조은령이 소스라쳐 놀라 일어났다. 우창도 왜 그러나 하고 돌아보니 이군명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조은령의 이야기를 듣고서 바라보니 흉악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는데 정면으로 두 사람을 향해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서는 일어나서 아는 체를 했다. 여전히 조은령은 긴장이 되어서인지 몸이 의자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가르침이라도.....?”

“말 좀 물어보겠소이다.”

“예, 말씀하시지요.”

“아마도, 이 도관에 기거하고 계시는 분들이시오?”

“그렇습니다.”

“사람을 찾아서 왔는데 혹 알 수가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보려는 것이오.”

“아, 화산의 도관에 오래 머무른 것은 아니라서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습니다만, 혹 누구를 찾으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찾는 사람은 곽성(郭成)이라는 도사라오.”

“곽성이라.”

이렇게 혼잣말로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조은령이 눈짓을 한다. 모른다고 하라는 신호인 것을 직감으로 감지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조은령이 모른다고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그러자 냉혈마인이 말했다.

“껄껄껄~! 두려워 마시오. 낭자께서 아마도 이 비렁뱅이를 알고 계신 듯싶으나 실은 옛날의 냉혈마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드리겠소이다.”

그 말을 듣자 조은령은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이제 죽었다는 표정으로 고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본 우창이 말했다.

“혹 무슨 일이신지 여쭤보면 주제넘은 것 같습니다만....”

“행여 그분께 피해라도 갈까봐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맞소?”

“예. 그렇습니다.”

우창이 냉큼 속내를 드러내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조은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껄껄껄~!”

그 웃음소리에서 심후(深厚)한 내공(內功)이 느껴졌다. 그러나 조은령에게 들었던 것처럼 살기(殺氣)는 느껴지지 않았다.

“염려 마시오. 절대로 그분께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요. 껄껄껄~!”

“강호의 인물이 학자를 찾는다는 것이.”

우창은 속에 품었던 의문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그 말을 듣고서 이군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조은령이 다시 바짝 긴장했다. 눈치라고는 파리의 앞다리만큼도 없는 우창이 원망스럽기조차 했고, 괜히 따라서 산문 밖을 나왔다는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분께 지리(地理)에 대한 높은 식견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오~!”

약간은 역정(逆情)이 섞인 듯한 어투에 조은령이 나섰다.

“귀하의 과거에 대해서 약간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곳은 진리를 찾아서 수행하는 곳이에요. 비록 소녀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서툰 짓으로 피를 부른다면 결코 그냥 있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우창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 얼어있던 조은령이 어디에서 이러한 기백이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호~! 노부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어찌 이리도 겁도 없이 나선단 말인고?”

“물론 소녀의 얕은 무공으로는 3합을 버티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렇지만 행여라도 아무런 죄도 없는 오라버니에게 무슨 이유로 인해서라도 털끝 하나 다치게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일이 커진다는 생각이 든 우창이 막고 나섰다.

“존장(尊長)께서 여쭐 일이 있어서 곽성선생을 찾으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혹 혈채(血債)는 아니신지요?”

“엉? 혈채라니, 그럴 리가 있겠소. 껄껄껄~!”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소생이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오라버니.”

“아, 령아. 괜찮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불안해하는 조은령의 귓가에 대고서 속삭였다.

‘점괘가 잘 나왔어.’

그제 서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오은령이 마음이 놓이는지 경계의 눈빛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낭인이 말했다.

“젊은 도사. 참 용감한 여인을 얻으셨소이다. 축하드리오. 껄껄껄~!”

“예? 아, 그....”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우창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앞서서 걷는 낭인. 그를 뒤따르는 우창과 조은령이었다. 우창의 어정쩡한 자세를 보면서 조은령의 마음도 알 수 없는 행복감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음양의 이치려니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