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제5장 노산(嶗山)의 인연(因緣)/ 3. 손바닥 위의 명주(明珠)
작성일
2017-01-0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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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제5장 노산(嶗山)의 인연(因緣)
3. 손바닥 위의 명주(明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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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도록 대화에 빠져있다 삼경의 종이 울린 다음에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기문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궁금하기만 해서 잠을 청해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던 우창은 축시(丑時:새벽2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가 있었다. 곤하게 잠을 자는데 낙안이 흔들었다.
“이보게 아우!”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꿈속에서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상을 받았는데 먹으려고 하는 순간에 흔들어서 잠이 깬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예,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네. 상이 들어온다고 전갈이 와서 운산선생님께 가야 하니 어서 준비하시게.”
“아, 제가 늦잠이 들었었군요. 얼른 일어나겠습니다.”
운산은 단정하게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다가 일행을 맞이했다. 허세를 싫어하는 천성인지 그냥 앉아서 눈웃음으로 맞이하는 것이 오히려 길손에게는 편안한 여유를 주기도 했다. 마치 오랫동안 이렇게 함께 했던 것과 같은 기분이 되어서이다.
정갈한 아침상으로 요기를 한 다음에 문밖으로 상을 내어놓는 일은 우창이 나서서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상을 내고 나서야 찻물을 끓이면서 이야기를 꺼내는 운산.
“어떻게 잠은 편히 쉬셨는가?”
“편히 쉬는 게 뭡니까. 이 아우가 자꾸 물어대는 바람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하하~!”
그 말을 듣고 우창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실은 자기의 학구열을 자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서 그냥 미소로만 화답했다.
“한창 궁금한 것이 많을 때가 아닌가. 모쪼록 공부할 적에는 그래야지. 소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하지 않나.”
“어제는 참으로 귀한 가르침으로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창은 운산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마냥 어려웠던 어제와 달리 구면이라서인지 이제는 인자한 아저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뭘, 우리끼리만 이야기 나누느라고 많이 갑갑했을 텐데 열심히 공부하다가 보면 다 이해가 될 날이 머지않아서 올 것이네.”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낙안~!”
정색하고 낙안을 부르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자리를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겠노라고 하고 비켜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두 사람은 말리지 않고 눈으로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우창은 도관(道觀)의 주변을 둘러보면서 엄청난 규모에 대해서 짐짓 놀랐다. 어제는 낙안의 뒤를 부지런히 쫓느라고 주변을 자세히 둘러볼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 여유롭게 둘러보니 구석구석에 도사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들이 자못 진지해서 자신도 모르게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만 가장 한가로운 것 같아서 문득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어젯밤에 낙안이 설명해 줬던 구궁도가 떠올랐다. 그래서 부지런히 위치를 익히면서 천천히 걸었다.
기본적인 궁도를 익힌 다음에는 다시 팔괘를 겹치는 법도 복습했다. 늦게까지 낙안을 귀찮게 한 공덕이었다.
장지는 아래부터 1은 감궁(坎宮), 5는 중궁(中宮), 9는 리궁(離宮).
검지에는 아래부터 8은 간궁(艮宮), 3은 진궁(震宮), 4는 손궁(巽宮).
무명지는 아래부터 6은 건궁(乾宮), 7은 태궁(兌宮), 2는 곤궁(坤宮).
그러다가 또 막히는 것이 생겼다. 원래 팔괘를 외울 적에는 일건천(一乾天), 이태택(二兌澤)으로 해서 숫자가 건(乾)은 1이었는데 이번에는 6이 된다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따가 낙안을 만나면 물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묘하고, 공부는 하면 할수록 복잡해져만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안이나 운산은 저렇게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세상의 이치를 훤하게 내다보고 천하(天下)의 대사(大事)를 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생각 속에 빠져있는데 어느 사이에 옆으로 다가온 낙안이 말을 건넸다.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시는가?”
“아, 형님 나오셨습니까? 사실은 아까부터 한 가지에 막혀서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또 아우를 속 썩이는 것이 뭔가?”
“일건천과 육건궁(六乾宮)입니다. 왜 숫자의 대입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관된 점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말이지. 역경(易經)과 기문(奇門)의 차이로 인해서라네.”
“그래도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저마다 다른 숫자로 활용을 한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괜히 내게 투정을 부려 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하~!”
“그게 아니라....”
“주역을 쓸 적에는 일건천으로 하면 되네. 지금 어제부터 이야기한 것은 주역인가, 기문인가?”
“그야 기문이지요.”
“그래서 팔괘의 사용법도 달라지는 것이라네.”
“그래서 헷갈린단 말씀이지요. 형님께서는 이러한 것이 혼란스럽지 않으셨습니까?”
“왜 안 그랬겠나. 다 똑같다네. 그래가면서 공부하는 거지.”
“또 다른 숫자도 겹쳐지는 것은 아닙니까?”
“나도 모르지. 하하~!”
“음.....”
“팔괘는 자연을 읽는 도구라네. 이해가 되는가?”
우창이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아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이해를 위해서 비유를 들어주는 낙안이다.
“그야 이해가 됩니다. 오행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 도구는 목적인가? 아니면 수단인가?”
“수단이지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네. 마치 절구가 있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벼를 찧거나 쌀을 빻거나 하는 도구이지요.”
“그렇다면 그 절구의 이름이 벼절구인가? 아니면 쌀절구인가?”
“그야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벼를 찧을 적에는 벼절구가 되는 것이고, 또 쌀을 빻을 적에는 쌀절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네. 마찬가지로 팔괘도 주역을 풀이할 적에는 주역팔괘(周易八卦)가 되었다가, 기문을 풀이할 적에는 기문팔괘(奇門八卦)가 되는 것이라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닙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형님의 이야기 한 방에 모두가 말끔히 해결되었네요.”
“다행이군. 하하~!”
“그런데 운산선생님과는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그건 아니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셨던가 보네. 고맙게 아우가 자리를 비켜줘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셨다네.”
“아마도 그러신가 싶었습니다. 공부가 부족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하~!”
“그래, 장상법은 잘 익히셨는가?”
“일단 구궁에 팔괘를 대입하는 것은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것만 알면 되는 것입니까?”
“어허~! 그건 시작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한다네.”
“그렇게 많은 것을 손바닥에 담는단 말입니까?”
우창이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래서 고인들은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이라는 뜻으로 장상명주(掌上明珠)라고 하셨지 않은가. 그 구슬은 수정구슬이 아니라네.”
“아하~! 그렇군요.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마치 마술사(魔術師)가 수정구슬을 앞에 놓고 주문을 외우면 원하는 것이 구슬에 투영(投影)되어서 보인다고 하더니만 손바닥 위에 기문팔괘를 올려놓으면 세상의 이치와 전주기 승패가 모두 손바닥의 구슬을 보듯이 훤하게 보인다는 뜻인가 봅니다.”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연마하는 것이라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학문을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전하는 말로는 태고(太古)의 헌원황제(軒轅皇帝)가 치우(蚩尤)와 전쟁을 할 적에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전(苦戰)을 하고 있을 적에 꿈에 나타난 천신(天神)에게 비결(秘訣)을 받고는 그것을 활용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 싶군.”
“그것은 실재하는 이야기입니까?”
“그야 난들 알겠는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하하~!”
“그렇다면 실제로 이것에 대해서 달통한 사람은 없습니까?”
“듣자니까 공명(孔明)이 기문을 귀신처럼 사용했다고 하더군.”
“공명이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말했다는 제갈량을 말하는 것입니까?”
“맞네. 그로부터 기문은 더욱 유명해졌는데 왕실의 보전을 위해서 함부로 전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금서(禁署)로 정하고 특별한 사람들만 전해 받을 수가 있었다네. 그래서 운산 선생이 특별히 전수받은 인연으로 이 분야에 상당한 조예(造詣)를 갖고 계신다네. 나도 그것을 흠모하여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이러는 것이라네.”
“아, 원래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그러실 만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손바닥에 추가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만 알려 주시지요. 심심할 적에 그것이나 익히려고 그럽니다.”
“숫자의 순서대로 따라가 보게. 다만 출발점은 중궁(中宮)이라네.”
“그야 어렵지 않겠습니다.”
“그게 익숙해지면 또 숫자를 거슬러서 거꾸로도 외워놓게. 언젠가는 요긴하게 쓸 날이 올 걸세.”
“알겠습니다. 지금의 수준으로 원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봐서 방법만 알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공부라네. 하하~!”
“그나저나 형님께서는 운산 선생과 더 이야기를 나누셔야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뭘 걱정하는가? 여기가 노산이 아니던가. 내가 아우의 선생을 하나 찾아서 붙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만 들어가세. 운산선생님께 알아보겠네.”
두 사람이 밖에서 헛기침을 하자 들어오라는 운산의 말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이 아우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도사를 한 분 추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심심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어, 그런가? 뭐 어려운 일이 아니지. 잠시.”
밖에 나간 지 얼마 만에 한 젊은 도사를 데리고 들어온 운산이 앉으면서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끼는 사람으로 지금은 명학에 대해서 궁리한다네. 원보야 인사드려라.”
불려온 젊은 도사가 자기를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임원보(林元甫)라고 합니다. 아호는 고월(古越)입니다.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상을 보니 괄괄하게 생겨서 호탕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대략 우창과 비슷한 연배여서 오히려 편안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 우창이 인사로 답했다.
“우창이 고월선생을 뵙습니다.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도라니요.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를 따르시지요.”
얼떨결에 고월을 따라나선 우창은 처음이라 다소 서먹하기는 했으나 스스럼없이 대하는 그를 보자 괜히 쭈뼛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편안히 대하기로 했다.
고월의 처소는 아래쪽으로 좀 내려가는 비탈의 옆에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단아(端雅)한 모습으로 정돈이 된 일상의 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서로 인사를 나누다가 보니 마침 나이가 동갑이었다. 그래서 벗이 되기로 하고 말도 텄다. 물론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고월의 성품이 시원시원해서 숫기가 부족한 우창도 이내 적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