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11.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의 고리

작성일
2017-01-0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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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11.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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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궁금한 것이 쌓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알 수가 없는 이야기들이 증폭(增幅)이 되어서 도저히 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낙안을 찾아갔다. 낙안은 마침 방문자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우창을 발견하고는 반겨 맞았다.

“어서 오시게 아우. 마침 잘 왔군.”

“형님을 귀찮게 하려고 또 찾아왔습니다. 편안하셨는지요?”

“오늘은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네.”

그러면서 앞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분은 법학을 공부하시는 맹유(孟軻) 선생으로 호가 자여(子與)네. 세상을 경영하는 통찰력이 탁월하여 늘 흠모(欽慕)하고 있다네.”

“후배 우창이 자여 선생을 뵙습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살펴보니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다. 낙안의 말투로 미뤄서 학문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온후한 표정이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어서 쉽사리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보였다.

“아, 반갑소이다. 우창 선생의 학문이 일취월장하기를 기원드리오.”

그리고는 이야기를 다 나눴는지 자리를 일어난다. 이야기 나누라고 하고서는 휘적휘적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낙안이 앉으라고 했다.

“아우, 뭘 그리 열심히 보는가? 떠난 객은 잊고 앉으시게나. 보아하니 간밤은 편히 쉬지도 못한 모양이군.”

“왜 아니랍니까? 실로 한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공부는 언제나 설렘과 흥분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말이지요.”

“아, 자여 선생 말인가? 이미 문하에 제자들을 많이 두고 있는 유학(儒學)의 거두(巨頭)라고 칭송을 받는 분이시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네.”

“그러셨군요. 어쩐지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다음에 때가 되면 귀한 가르침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 질문 보따리를 풀어놔 보시게나.”

“뭐, 질문이랄 것이나 있습니까? 전에 해주신 이야기를 이어서 듣고 싶어 한달음에 온 것이지요. 이제 왜 오행을 알아야 할 것이냐는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간지와 오행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침을 청하려고 합니다.”

“알았네. 간지에서 더 중요한 것은 천간이라네. 그러니 천간과 오행의 관계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군.”

“뭐가 되었던 빨리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문의 갈증이 사무치고 있습니다.”

“모처럼 아우님 같은 학구열(學究熱)이 넘치는 벗을 접하니 나도 덩달아 신나지 뭔가. 우선 아우가 숫자를 좋아하니 숫자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오행은 숫자가 뭔가?”

“그야 당연히 5입니다.”

“천간은?”

“천간은 십간(十干)이라고도 하잖아요. 당연히 10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5와 10의 관계는 뭔가?”

“굳이 관계라고 하시면 두 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공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시간을 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언제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봤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이 아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괜히 원망을 해 봤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10과 5의 숫자가 나왔네. 5를 2배로 하면 10이 된다는 것도 합의를 봤으니 2와 연관이 된 숫자를 찾아 넣어보면 되겠군. 그게 뭔가?”

“2와 연관된 것은 이태택(二兌澤)이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소린가?”

“아니면 음양일까요? 무심코 일건천(一乾天) 이태택(二兌澤)이 떠올라서 튀어나온 말입니다.”

“음양이라면 2라고 할 만하겠군. 그렇다면 오행을 음양으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열 가지가 되겠습니다……. 아하, 그래서 숫자로 말씀을 꺼내신 거로군요. 이제야 왜 그러셨는지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오행을 음양으로 나누면 천간이 된다는 말씀을 이렇게 하신 거지요?”

“맞네~.”

“그런데, 오행이야 간지의 근본이라고 하더라도 그만입니다만, 음양은 주역의 근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역의 근본을 간지에 끌어다 붙여서 무슨 묘안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배나무에 뽕나무를 접붙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배나무에 뽕나무를 접붙이는 것과 같아서 서로 통하는 이치가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이라네.”

우창은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점검하면서 익혀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행은 음양에 대비해서 뭐라고 했던가?”

“그야 실체(實體)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자네 우창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우창은 우창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가?”

“당연한 말씀을 왜 물으십니까?”

“그렇다면 우창은 우창으로만 존재하고 다른 그 무엇으로 작용을 할 일은 없단 말이겠구나?”

“또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시나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의도는 없네. 다만 개념을 정리해 놓자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창은 우창으로도 존재하지만 다른 무엇으로도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을 만나면 제자가 되고, 부모를 만나면 자녀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을 왜 길게 말씀하시는지요?”

“그렇다면 그대가 가령 목이라고 한다면 때론 음도 되고 때론 양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부모를 만나게 되면 자식은 양의 역할이 되고, 스승을 만나면 이번에는 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 동의한다면 말이네.”

“당연합니다. 아하~! 그러니까 하나의 목이 작용을 하게 되면 음양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의미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이제 뭔가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의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서 합의를 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 하하~!”

“아무래도 앞서 배웠던 주역의 음양으로 인해서 좀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음양이면 그냥 음양이지 왜 자신이 들어가서 음양으로 작용을 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마도 오행에서 생각하는 음양과 주역에서 생각하는 음양은 서로 다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요?”

“정확히 판단하셨네. 그러니까 오행에서는 주체인 목화토금수가 있고 나서야 음양을 논하는 것이고, 주역에서는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으로의 음양을 논한다고 정리를 하세. 그럼 되겠는가?”

“이제 되었습니다. 정리가 가능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창은 그동안 배웠던 음양의 이치를 생각하면 더욱 혼란스러울 것만 같아서 덮어놓기로 했다. 그리고서 오행에서 바라보는 음양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이해한 다음에 나중에 다시 서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창이 음양의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이에 낙안은 낙안대로 우창의 질문들을 되씹으면서 무엇으로 인해서 이 아우가 혼란스러워했는지를 정리하느라고 조용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우창으로 인해서 글자로는 같은 음양이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이치를 오늘 새삼 느끼게 되자 보람도 생겼다.

주역은 변화의 음양이라고 하겠고, 오행은 실체의 음양이라고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자 이전보다 더욱 명료한 음양관(陰陽觀)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 같아서 낙안은 기뻤다. 이렇게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실감 났던 적이 없었지 싶었다.

“오늘은 아우님 덕에 나도 음양 관찰에 대한 안목을 넓혔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겠군.”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 아우도 형님을 위해서 뭔가 한 셈이 되니까 말이지요. 하하~!”

“왜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금씩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수도(修道)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네.”

“도를 닦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군요. 예전에는 산중의 절간으로 가서 면벽(面壁)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 전부인 줄을 알았지 뭡니까?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도를 닦는 것인 줄은 오늘 비로소 확연히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늘 깨우침을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형님.”

“실체가 있는 음양이 자유롭겠는가? 실체가 없는 음양이 자유롭겠는가?”

“다시 공부로 들어갑니까? 그야 당연히 실체가 없는 음양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체로 인해서 속박(束縛)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과연~!”

“모처럼 기특한 말을 했나 봅니다. 하하~!”

“그래서 주역의 이치가 천하(天下)의 만사(萬事)에 개입하지만 오행은 주체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작용을 한다네. 이것이 바로 역학(易學)과 명학(命學)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가 있다네.”

“명학이요?”

“그렇다네. 주역은 역(易)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학이라고 하고, 간지는 명(命)을 배우는 것이라서 명학이라고 한다네.”

“그렇게 놓고 보니 과연 두 학문의 차이가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역학은 조금 배워봐서 알겠습니다만, 명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목숨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은 의학(醫學)이 아니었습니까?”

“아우는 목숨과 질병의 차이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목숨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질병은 몸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지. 명(命)이 중요한가, 병(病)이 중요한가?”

“그야 명이 붙어 있을 적에 병도 있고 약도 있는 것이니 당연히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묻겠네. 명학(命學)과 병학(病學)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명학은 목숨을 배우는 것이고, 병학은 질병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목숨과 질병은 서로 연관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요?”

“여기에서 명학은 특히 운명학(運命學)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네. 명학에 운(運)자가 붙는다면 이해가 더 잘 되시려나?”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까?”

“왜?”

“운명은 주역에서 팔괘로 점쳐서 얻을 수가 있는 답이 아닙니까? 그러니 명학에서 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딴은…….”

“제가 뭘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이해가 된단 말이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죄송합니다. 이 아우가 너무 우둔하여 형님을 괴롭히게 됩니다.”

“다시 설명해 보겠네. 사람의 운명과 사물의 운명이 같을까 다를까?”

“이미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명학은 사람의 운명을 연구하는 것이고 역학은 사물의 운명을 논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사물 안에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요.”

“그렇기도 하네. 그렇다면 또 하나 물어보겠네.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것은 무엇인가?”

“그야 인간이 아닙니까? 천지간(天地間)의 만물 중에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萬物唯人最貴]고 했지 않습니까?”

“말 잘하셨네.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사물을 같이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좀 다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이네, 명학은 그렇게 천지지간의 만물 중에 가장 귀한 인간의 운명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네.”

“이제야 형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래서 명학과 역학이 공존해야 할 이치가 있었군요. 이제 비로소 명료해졌습니다.”

“다행이네. 그것을 이해했으니 이제 합의를 봤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