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8. 동문(同門)에서 수학(修學)하는 인연
작성일
2017-01-0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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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8. 동문(同門)에서 수학(修學)하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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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후.
우창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새벽의 공부 시간에 맞춰서 강당에 나갔다. 이미 많은 수리학의 학인들이 미리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빈자리를 찾아서 오늘은 어떤 공부가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옷깃을 당기는 기척에 돌아봤다.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유난히 얼굴이 하얀 선생이 있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눈인사를 나눈 다음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다시 옷깃을 당겼다. 이것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돌아다보니 밖으로 나가겠느냐는 표정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슬며시 따라나섰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이따가 공부를 마치고 함께 이야기를 좀 나눌까 싶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아, 그야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서생이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것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스승님의 설명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흘러갔다. 오늘은 「범위수(範圍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범위수의 범(範)은 종횡(縱橫)을 의미하고 위(圍)는 그 둘레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고,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범위천지지화(範圍天地之化)」라는 대목에서 인용한 이름이라고도 했다. 구궁수(九宮數)를 이어서 범위수까지도 강의를 들으면서 과연 수리학(數理學)의 세계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에 대해서 새삼 탄복(歎服)을 했다.
오늘은 첫날이어서 대략적인 구조에 대해서 들었는데, 상하로 나눠진 책에서 상권(上卷)은 「도식문(圖式門)」, 「기례문(起例門)」, 「총결문(摠訣門)」, 「부론문(賦論門)」으로 구성이 되었고, 하권(下卷)에는 「괘결문(卦訣門)」, 「수격문(數格門)」, 「길가문(吉歌門)」, 「흉가문(凶歌門)」의 내용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쉽지 않은 내용일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과연 앞으로도 배워야 할 수리학은 어디까지일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강의를 마쳤다.
강의를 들어도 아직 핵심에 접근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한 우창에게는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언뜻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범위수에서 사용하는 기본수가 ‘갑기자오구(甲己子午九)’라는 말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예전에 스승님에게서 들었던 단시점의 수리법이었던 것인데 그것을 여기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그 수리(數理)는 구궁변수법이라고 했는데 다시 또 범위수에서도 다루는 것을 보면 뭔가 깊은 이치에 통달하게 되면 서로는 거미줄처럼 연결이 되어서 서로의 숨은 이치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수리학(數理學)이 점점 공부가 깊어지게 되면 한 줄로 엮어져서 언제라도 그에 걸맞은 활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새로운 수법(數法)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툭 치는 느낌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까 흰 얼굴의 서생이었다. 새로운 수리법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미리 한 약속도 잊어버렸다. 우창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앞서서 걸어가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도 그래서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의 숙소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맑은 물소리가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같았다. 문득 이 사람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렇게 자신의 숙소로 안내하는가 싶은 생각에 의구심도 들었으나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겠지 싶어서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소생은 자운(子雲)이라 하옵고, 이름은 양웅(揚雄)이라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우창 선생을 봐 왔습니다. 오늘은 문득 통성명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결례를 했으니 혜량(惠諒)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미천한 소생에게 관심을 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혹 무슨 인연이 있으신가 싶어서 궁금했습니다. 고견(高見)을 받들겠습니다.”
“고견은요. 자 이리 앉으시지요.”
그리고는 상석(上席)에 우창을 앉도록 권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사양했다. 같이 공부하는 처지에 윗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서였다. 그러자 자운도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고 같이 평석에 앉았다.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오늘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공부로 인해서 갈증이 난 참인지라 차 이야기를 듣자 반가웠다.
“고맙습니다. 기꺼이 얻어 마시겠습니다. 하하~”
화로(火爐)에 물을 얹어놓은 자운이 말을 이어갔다.
“자운이 심곡 스승님의 문하에 들어온 것은 대략 3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천성이 아둔하여 도학(道學)에 들어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근래에 형학(形學)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수학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요. 하하~!”
해맑게 웃는 모습이 참 선하게 보였다. 잠시 얼굴을 살펴보니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느낌이 있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면이 있었다.
“저는 천성이 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가끔 무례하다는 핀잔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냥 맘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저의 생긴 모습이겠거니 하고 생긴 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마음에 언짢은 점이 있으셨다면 양해(諒解)를 구합니다. 하하~”
우창은 자운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서 약간은 경계가 되기도 했다. 아직은 그의 내막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데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당연히 부담스러울밖에.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창 선생에 대해서는 백발을 통해서 잘 들었습니다. 입심이 좋은 백발이 어찌나 칭찬하던지 참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뵙고서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자 함이니 편안하게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하하~”
“아, 그러셨습니까? 백발 선생은 원래가 좀 허풍이 심합니다. 그래도 소생에게 관심을 주셨다니 영광입니다.”
“원래는 혜암도인의 문인이셨다고요? 참으로 존경하는 고인(高人)이신데 이렇게 그 문하의 전인(傳人)을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 물이 끓었습니다. 잠시…….”
그는 찻잔을 헹궈서 녹차를 우렸다. 향기로운 차향이 방안에 가득해질 때 찻잔에 차가 담겼다. 향기만으로도 상당히 품질이 높은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자, 좋은 차가 없어서 누추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자운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행은 재미있으십니까?”
“웬걸요. 날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니 아무래도 그릇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왜 이리도 학문의 길이 어려울까요?”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든 우창은 내친김에 푸념도 좀 늘어놨다. 그러자 그 말 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장광설(長廣舌)을 쏟아 놓는 자운.
“말도 마십시오. 처음에는 한 1년 정도만 공부하면 도를 통할 줄만 알았지 뭡니까. 그런데 아무리 해도 파초(芭蕉)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답이 나오지 않아서 집어치우고 차라리 눈에 보이는 형상(形狀)을 택하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시작만 쉽지 조금 들어가니 또 앞이 캄캄해집니다. 하하~!”
“이거 동료(同僚)를 만난 듯합니다. 반갑습니다. 하하~”
이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자운, 백발이네. 손님이 계신가…….”
백발이라는 말에 우창도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님으로 왔으니 나서기도 뭣하여 잠시 앉아 있었다.
“아, 어서 들어오시게. 마침 진객(珍客)을 맞이하고 있던 참이네. 추형이 찾아 줄 것이라고 짐작을 했지.”
잠시 후 안으로 들어온 백발은 우창을 발견하고는 넙죽 엎드려 절부터 올린다.
“이게 뉘십니까? 사부님을 여기에서 뵙게 될 줄은 또 몰랐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지요?”
“백발 선생도 여전하셨군요. 이렇게 초청을 받았지 뭡니까. 그래서 차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하~!”
분위기는 삽시간에 활발하게 변했다. 셋이서 차를 마시면서 일상의 이야기에 빠져드니 사내들의 수다도 여인의 수다 못지않은 듯했다.
“백발 선생의 요즘 공부는 좀 어떠십니까?”
“말도 마십시오. 이제 겨우 물형론(物形論)을 익히고 있는데 그것이 그것 같고 도무지 진척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재미도 없고요. 그래서 정체(停滯)가 된 것 같은 마음에 울적했는데 오늘 사부님을 뵈니까 마음이 즐거워져서 안개 같은 구름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하~!”
이때 자운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듣자니 무극자를 뵈었었다고요?”
“아, 예 스승님을 따라서 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무슨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가르침이라뇨. 당시로는 안목이 완전히 정저지와(井底之蛙)였습니다. 그래서 뭘 하나 제대로 여쭤볼 주변도 되지 못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아, 백발선생께서 말씀하셨던 게로군요. 하하~!”
가만히 차를 마시던 백발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운이 무극자를 뵙고 싶다는 말을 하기에 들었던 것이 있어서 조금 바람을 넣어 말해줬을 뿐입니다. 하하~!”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도학을 공부하는 벗 중에 자휴 선생이 있는데 그는 뭘 물어도 답을 하지 않아서 말이지요.”
“무극자의 직전 제자인 자휴 선생이 말하지 않는 것을 주제넘게 우창이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왜 그런지는 자운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참으로 재미없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실은 오늘 이렇게 무례를 범한 것도 그 소식이 궁금해서입니다. 그러니 아무 말이라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도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분이 쓰셨다는 서책(書冊)을 어렵사리 얻게 되었는데 과연 실제로 느끼는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해서입니다.”
“전 그런 것은 모릅니다. 그냥 절 보시고는 심곡자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해 주신 것 말고는…….”
“오호~! 그러니까 이미 사람을 척 보고서는 공부를 할 인물이라는 걸 파악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과연 뛰어난 안목의 도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맺으셨으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러시면 무극자 어르신을 찾아뵙고 직접 가르침을 청하면 되실 일이 아닙니까?”
“에구,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겠습니까? 그런데 자휴 선생이 말을 합디다. 절대로 문인을 거두지 않으니 가봐야 헛일이라면서 자신도 이렇게 쫓겨나다시피 심곡으로 보내진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걸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별로 전해 드릴 말씀이 없으니 말이지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빌미일 뿐이고요. 실은 우창 선생과 교분을 쌓고 싶은 마음에서 벌인 일입니다. 가끔 만나서 차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뵈니 과연 도골선풍(道骨仙風)이십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부디 물리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공부를 도와주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인연을 맺어보십니다. 원래가 우창도 사람을 사귀는 수단이 부족하여 늘 혼자 있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청해 주시니 감개무량(感慨無量)입니다. 하하~!”
그렇게 차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졌다. 백발은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눈치여서 말을 나누라고 하고는 환송을 받으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시 긴장했던 것이 풀리자 몸이 나른하여 침상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