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제2장 태산으로 가는 길/ 1. 소림가풍(小林家風)
작성일
2017-01-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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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제2장 태산으로 가는 길
1. 소림가풍(小林家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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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 석실에서 헤어진 지 3년 후. 달마는 여전히 물형심법의 원리를 완전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정리에 골몰하였다. 진상도에게 전해준 두루마리는 아는 자들끼리의 소통에 대한 핵심(核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직은 어린 제자들에게 들려줘서는 모두 혼란에 빠질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년을 정리하니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다. 이 정도라면 소림의 제자들이 활용한다고 해도 크게 오류가 생기지 않을 정도라고 봐서 이제는 그것을 펼쳐도 될 때라고 판단하고서 소림사를 도맡아서 이끌고 있는 혜가(慧可)를 소림굴로 불렀다.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온 혜가였다.
“스승님, 혜가를 찾으셨습니까?”
“그래, 왔는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네.”
“분부하시옵소서.”
“그대는 육신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는가?”
“제자가 알기로 금강경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일체의 형상 있는 것은 허깨비와 같아서 집착할 바가 하나도 없나니 번개나 이슬처럼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렇다면 불타께서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그야,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형상에만 집착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바로 그렇다네. 그럼 형상조차도 집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겠는가?”
“가르쳐 주십시오.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그대는 불타의 형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한번 말해보게.”
“예, 불타께서는 32가지의 호상(好相)을 갖춘 대장부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른두 가지의 상호라고 함은 머리의 정상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미간에는 백호(白毫)가 있고, 팔은 무릎까지 내려오며....”
이렇게 혜가가 석가모니의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형상을 외우자 달마가 말을 끊었다.
“그만하면 되었네. 그런데 금강경에서 모든 형상은 모두 필요 없는 것이라면서?”
“...그렇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렇다네, 형상은 형상이 아니라 도(道)라네, 형상이 있으므로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있으므로 해서 형상이 만들어지네. 즉 형상과 불성이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그래서 불이(不二)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둘로 보고서 형상을 무시하고 마음만 떠받드는 것은 부처의 탓이 아니라 제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까닭이라고 봐야 하겠지.”
“예, 스승님 가르침 삼가 받들겠사옵니다.”
“그 형상은 천지자연도 만들고 일개의 미물(微物)도 만든다네. 이 웅장한 숭산도 형상이요, 저 장대 끝의 잠자리도 또한 형상이네. 이러한 형상을 봄으로써 그 속에 들어있는 참모습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네. 이것을 일러서 상법(相法)이라고 부르네.”
“제자는 처음 듣는 희유한 말씀이온데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나무의 까치나 반석 위의 다람쥐의 형상에서도 그에 따르는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옵니까?”
“그뿐만이 아니라네. 인간을 보면서 그 형상이 다람쥐처럼 생겼다고 느껴진다면 그 마음에는 다람쥐와도 같은 소심한 마음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네.”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사람의 모습이 물소처럼 생겼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물소와도 같은 고집스러운 마음이 들어있겠군요.”
“그렇지. 여우처럼 생긴 사람은 그 사귐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야 매우 주의해야 하겠지요... 그렇습니까 스승님?”
“역시 자네는 영민하네. 껄껄껄. 바로 그것이네.”
“이것은 참으로 간단한 방법인걸요.”
“그게 그렇지가 않네.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다네.”
“옛? 그럼 또 무슨 어려움이...”
“형상만으로 모두 다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 큰 불찰을 범할 수가 있다네. 그러니까 금강경의 형상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네.”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나를 쳐다보면 뭘 닮았는가?”
“그야...”
“물론 자네는 내가 옷을 바꿔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만이지만 실은 형상으로도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운기(運氣).”
“운기...”
“그렇네. 형상은 고정된 것이네.”
“그렇지요.”
“그러나 운기는 항상 쉼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네.”
“그럼 운기라는 것은 무형으로써 유형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 나무가 어제 본 나무와 같은가?”
“나무는 같겠지만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되옵니다.”
“바로 그 점이네. 그 운기에 대해서 기가 막히게 잘 보는 도인이 한 분 있네.”
“어디에 계시는 고명한 어른이신지요?”
“혜암도인일세. 그는 나무를 보고서도 그 나무의 마음을 읽어 내는 귀신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거든.”
“아, 그럴 수가 있군요. 우둔한 제자는 새로운 관점을 얻습니다. 동물의 모습에서만이 아니라 식물의 모습에서도 그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과연 명안종사(明眼宗師)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재주가 아니라 혜안(慧眼)이라고 해야 하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 속에 마음이 어떻게 생겨서 현재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제자도 한번 뵈옵고 싶군요.”
“아마 그렇게 될 것이네.”
“고맙습니다. 스승님.”
“근데 그 이전에 그동안 소림사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모두들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너무 열심히 수행해서인지 건강이 좋지 않은 제자들이 자꾸 생겨나서 그 점이 염려되옵니다.”
“흠... 그래...”
“무슨 방법이 없겠는지요? 그것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마음은 열심히 정진(精進)하고자 하나 몸이 안 따라줘서 힘겨워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절합니다.”
“산중에서 가장 건강한 동물은 무엇일꼬?”
“아마도 곰이나 돼지가 아닐까요?”
“그럴 것이네. 그럼 곰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연구해 보게. 뭔가 나름대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네.”
“다들 도를 깨닫기 위해서 움직이지도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앉아 있으니 더욱 염려됩니다.”
“그래서 내가 수련법을 하나 창안했네. 이것을 소림 제자들에게 알려줘서 모두 건강을 지키도록 하게. 몸이 무너지면 수행이고 부처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책상 위에 있던 두루마리를 혜가에게 내밀었다. 이름을 보니 「역근경(力筋經)」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힘과 근력을 단련하는 경전’이라는 뜻이니 과연 제자들에게 건강을 얻도록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스승님께서는 미리 제자들의 문제점을 파악하시고 이러한 운동법을 준비하셨습니다. 과연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건강한 몸으로 성불하도록 가르치겠습니다.”
“다만, 누구나 다 그 수행법이 맞지는 않을 것이네. 그러니 사람들의 몸에 따라서 맞춰가도록 하게. 뭐든지 아무리 좋은 방법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또한 독이 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그게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혹 허약한 사람은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요?”
“그럼 연약하면서도 건강한 짐승은 뭐가 있겠는고?”
“아마도 고양이가 가장 건강할 것입니다.”
“고양이는 왜 건강하다고 생각되나?”
“아마도..... 뭐든 잘 먹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수행자들도 뭐든지 잘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불타의 율장에는 수행자는 육식을 금하니까 그 율법을 범할 수가 없는 일인지라...”
“그래... 딴은.....”
“무슨 방도(方道)가 없겠는지요?”
“사슴은 풀을 먹고, 호랑이는 사슴을 먹으니 저마다 먹고살아야 할 대상이 있고 그것은 타고난 신체마다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인신(人身)은 뭘 먹고살도록 타고난 것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 호랑이의 상(相)을 한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이고, 토끼처럼 생긴 사람은 나물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맛있는 음식이 되지 않을까?”
“아, 형상법이 거기까지도 미치는군요. 놀랍습니다. 스승님.”
“무엇이든 일률적으로 정해버리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네. 저마다 물려받은 조상의 신체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 어찌 하나로 같겠냔 말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불가에서는 초의(草衣)와 채식(菜食)을 계율로 정하고 육식(肉食)은 금하고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법을 부처가 만들었더라도 이 시대에 맞지 않으면 시대에 맞게 적용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일천(一千) 년 전에 열반하신 부처의 말씀이 중한가? 아니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수행하는 제자들이 중한가? 더 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야 어리석은 혜가의 소견으로는 오늘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옵니다만 엄히 지켜오던 계율인지라 감히 범할 생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마하니 불타께서도 자신의 제자들이 모두 병이 들어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네. 그러니까 원하는 제자에게는 나를 위해서 죽지 않은 고기, 내가 죽이지 않은 고기와 같은 것을 보름에 한 번씩은 먹어도 되도록 고칠 방법을 생각해 보게. 음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아서야 말이 되는가. 분명히 정육(淨肉)은 먹을 수가 있다고 되어있는데 다들 무엇이 두려워서 회피만 하면서 건강을 지키지 못하는가 말이네.”
“잘 알겠습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있는지 다른 수좌(首座) 화상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러는 찬성하고 더러는 반대를 할 것입니다만, 스승님의 의중이 전달되도록 하겠습니다.”
“법은 마음 안에 있나? 마음 밖에 있나?”
“그야 당연히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틀렸네. 법은 마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네. 편견(偏見)에 갇혀서 수행하면 어찌 올바른 견해를 얻을 것이며,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더 열심히 정진하시게.”
“아니, 스승님께서 ‘안과 밖’으로 물으셨으니 안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런 때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합니까?”
혜가는 짐짓 달마의 말장난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쑥 들이받았다. 그러자 달마는 재미있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 화상아, 그런 때는 ‘스승님의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라고 해야 제대로 아는 것이라네. 스승은 항상 제자들이 올바르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질문에 함정을 파 놓는다네. 껄껄껄~!”
“아이쿠~! 한 대 맞았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사제 간에 한바탕 웃고는 삼배를 하고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