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제1장 화산의 노도인/ 8. 참회(懺悔)의 몸부림

작성일
2017-01-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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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8. 참회(懺悔)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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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초(寅時初:새벽3시경).

아직도 어둠 속에 잠긴 화산의 암벽(巖壁)에서 자오검 오혜량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다. 뼈 속을 파고드는 고통이 절정에 달했다가 잠시 숨 쉴 틈을 주는 사이에 절벽을 향해서 세 번 절을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굽어살펴 달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여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예전 모습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진상도를 만난 이후로는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연에 대해서도 머리를 숙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절을 한 다음에는 다시 운기조식에 들어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심정이 되어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대추나무 무더기를 향해서 삼배(三拜)를 올렸다.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되어야 할 나무에 대해서도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굵은 대추나무 몽둥이를 하나 손에 들었다. 한 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껴안듯이 들었다. 그냥 드는 것만으로도 이미 팔에 부담이 컸지만, 그것을 바위벽에 대고 휘둘러야 한다. 오직 일념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진상도의 당부를 잠시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나무둥치를 두 손으로 껴안고는 힘차게 바위를 쳤다. 그동안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뼈를 으스러트리는 고통과 맞서는 마음으로 상승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는 그의 손에 더욱 힘을 주어서 쳤다. 그 힘에 의해서 바위의 돌가루들이 뿌옇게 날아올랐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에는 손바닥이 갈라지고, 팔이 부어오르고, 얼굴도 타들어 갔다. 매서운 화산의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오혜량은 끈질기게 이를 악물고 싸워나갔다. 간간이 사지를 찢어놓을 듯이 오한과 한열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더욱더 암벽을 향해서 대추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 눈보라가 휘날릴 즈음이 되자 점점 암벽에 생긴 구멍이 커지기 시작했고, 점차로 겨울을 벗어나서 여기저기에서 꽃들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에는 상당히 큰 동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제는 비가 쏟아져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대추나무 몽둥이를 휘두를 수가 있었다.

가끔 진상도가 나타나서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 그렇지만 별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한번 힐끗 둘러보고는 그냥 내려가버리곤 했다. 그래도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적인 바위벽을 향해서 대추나무 몽둥이만 휘두르는 고독한 싸움이 계속될 뿐이었다.

높은 산은 여름이 짧다. 그리고 겨울은 길다. 어느덧 찬바람이 느껴지는 7월이 되었다. 굴도 이미 상당히 넓어져서 이제는 거의 20여 평은 됨직했다. 하루는 나무를 휘두르다가 문득 바위와 싸움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바위는 나의 적이 아니다. 나는 여태까지 바위를 적으로 알고 상대를 했다. 그렇지만 바위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바위 절벽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적으로 생각을 했었다. 대추나무로 그렇게 휘둘러대도 바위는 그냥 그대로이다. 그리고 때로는 하도 힘이 들어서 자신의 보검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도 받았다.’

‘실로 자신의 보검은 천하의 검객들이 모두 탐을 내는 물건이기도 했다. 칼날의 한쪽은 붉은 기운이 감돌고, 또 다른 한쪽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명검이다. 그런 자오검을 뽑아서 이 바위를 자른다면 아무리 견고한 바위도 무나 두부를 자르듯이 잘려나갈 것이다. 그러면 일은 간단히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을 받을까 봐서 진상도는 누누이 당부를 했다. 나는 나를 이겨야 한다. 이겨야 한다. 그러나 바위와 싸워서는 안 된다. 상대는 나 자신일 뿐이다. 나는 나와 싸워야 한다. 아니 싸워서 될 일이 아니라 나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나는 자오검을 얻고 자오검법을 만나서 수련하다가 건강을 잃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자오검을 수련하는데 왜 나에게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 생기는 것일까? 혹시 수화(水火)가 서로 대립을 해서일까?’

 

이렇게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매일 고된 수련을 해나갔다. 그럭저럭 바위벽을 두드린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는지 대추나무 몽둥이도 많이 줄어들고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계속되는 작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굵은 나무부터 들고 휘둘러도 하루가 저물면 먼지로 변해 버렸는데, 이제는 점차로 가는 나무를 휘둘러도 저녁이 되면 손잡이만큼 정도는 남아있는 일이 잦았다. 그 이유는 처음의 강력한 울분과 함께 토해낸 힘으로 인해서 악을 썼던 까닭이고, 이제는 그렇게 서로 대립(對立)되는 감정에서 바위와 나무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경지와 가까워지면서 점차로 적은 힘으로 능률적인 일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즈음에 몸에 약간의 이상이 생겼다. 그렇게 날마다 머리가 깨어지게 아프던 통증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다. 온몸을 휘감던 냉기류와 열기류는 어느 사이에 가끔 느낄 정도로만 남아있었다.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머리가 가벼워지면 가벼워질수록 손놀림은 더욱 정교해졌다. 그래서 벽을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하고, 한쪽에는 침상을 만들기도 하고, 또 식탁도 만들었다. 그렇게 동굴을 정리하면서 자신과 동굴과 대추나무는 완전히 삼위일제(三位一體)가 되어. 동굴과 대추나무 몽둥이와 자신은 전혀 대립이 되지 않고 혼연일체(渾然一體)로 어우러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몸도 점차 가벼워져 갔다. 한참 고통스러울 적에 어느 의원은 무공을 버리면 나아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죽을지언정 무공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무공을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 무공이라는 것도 한낱 쓸데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중양절(重陽節). 9월 9일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느덧 산천은 붉은색으로 치장을 하였다. 그리고 산마루 부분에서는 서서히 그 색채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단풍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대추나무 몽둥이를 손에 잡고 힘차게 벽을 두드렸을 적에는 작업도 마무리가 되어서 동굴로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다.

기술적인 문제는 그때그때마다 진상도가 일러줘서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기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품은 어디선가 용케도 구해왔다. 이제 저녁이면 고된 자기와의 싸움이 막을 내린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해 질 무렵이 되자 진상도가 나타났다.

“흠. 대단하구먼.”

“스승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진상도가 짐짓 물었다.

“자네는 뭐 하려고 이 작업을 했던고?”

“그야 저의 병을 고칠 목적이었지요.”

“그래 병은 나았는고?”

“어느 사이에 말끔하게 정상적인 몸이 되었군요.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의 건강했을 때보다 더욱 맑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느낌으로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그럴 것이네. 워낙 자네가 열심히 하였으니 아마도 천지신명이 불쌍히 여기고서 과거의 죄업을 용서한 모양이네 그려 허허허.”

“사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송구합니다.”

“그럼 나는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 자네 손에 죽지 않아도 되는 셈인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미 갚았으니까. 허허허.”

“스승님 비록 우둔한 제자이지만 일생을 바쳐서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부디 버리지 말고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아닐세, 난 이미 이 석실을 선물 받았으니 더 이상의 대가는 필요 없네. 자네는 이제 건강하게 되었고 나는 석실이 하나 생겼으니 이만하면 우리의 흥정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그러시다면 참 다행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참회하는 내내 그러한 궁금증들이 계속해서 뇌리를 맴돌아서 이 일을 마무리하고 스승님께 여쭤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 궁금한 것은 풀어야지. 뭔가?”

밤은 깊어가고 있는데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1년 전에는 바위 옆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이제 아늑한 동굴에서 밝은 불을 밝히고서 마주하니 분위기가 사뭇 화기애애하다.

“오늘 특별히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마음에서 맛있는 명주와 육포를 준비했다네. 우선 얼마나 목이 말랐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목을 축이면서 천천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나눠 보세.”

“전혀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목이 마르면 바위 옆에 흐르는 맑은 석간수(石間水)를 마시면서 갈증을 달랬고, 배가 고프면 스승님께서 준비해 주신 건량(乾糧)으로 시장기를 달래면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로울 적에는 산새의 노랫소리와 들짐승의 소리를 벗 삼아서 즐거운 순간들을 보내면서 이것이 선경(仙境)이 아니겠느냐는 행복감도 느꼈습니다.”

“비로소 무인(武人)에서 철인(哲人)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을 통과하셨구먼. 내가 기대했던 것도 그것이었네. 무인은 이겨야 할 상대를 사람으로 삼지만, 철인은 이겨야 할 상대를 자신으로 삼는다네. 그러니 언제나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자연에서 답변을 듣는 게지. 그런데 질문을 가득 안고 있었으니 이미 다른 세상으로 접어들었다고 봐도 되겠네. 허허허.”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어느 검객의 칼날을 맞고 세상을 하직할 뻔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갈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질문들이 이제 목까지 차올랐다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끝나면 보자고만 하셔서 더욱 목이 말랐던가 싶습니다.”

“허허허~! 알았네. 이제 그 가슴에서 다 녹아내린 죄업(罪業)은 말끔히 잊어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풀어보도록 하세. 어디 무엇이 궁금했을까? 어서 말을 해 보시게.”

밝혀 놓은 촛불이 타닥탁 소리를 낸다. 마치 자신도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