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제1장 화산의 노도인/ 5. 대추나무의 비밀
작성일
2017-01-0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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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5. 대추나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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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없는 여행객에게는 즐겁고 한가로운 길도,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에게는 길고도 지루한 고행길이기 마련이다. 기나긴 여름이 지나고 다시 산천의 풍광이 가을로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화산의 문턱까지 다가온 오혜량에게는 그나마 화산의 준봉(峻峯)들이 반가웠다.
이제 화산까지는 불과 100여 리 남짓을 남겨놓은 곳까지 왔을 때 진상도는 잠시 어딜 좀 가자고 했다. 오혜량의 마음이야 한달음에 화산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여태까지도 잘 참아 왔는데, 싶어서 묵묵히 뒤를 따라가니까 얼마 되지 않아서 대단히 웅장한 장원(莊園)이 나타났다.
일견하여 대단한 권세가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으리으리한 건물들과 정성스러운 공을 들인 주변의 정원이 한눈에 봐도 대단히 권위가 있는 사람의 저택인 것이 분명할 듯싶은 집이었다.
오혜량은 아마도 진상도와 어떤 친분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가만히 뒤를 따라서 저택으로 들어가서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청지기가 나왔다.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지나가던 나그네일세.”
“그럼 끼니라도 얻으려고 오셨는지요?”
이 청지기는 하도 많은 떠돌이 시인(詩人)과 묵객(墨客)들의 발걸음을 상대한 터라 눈치만 늘어서 한눈에 행색이 남루한 이 두 사람을 보고서는 대번에 시장기는 돌고 돈은 떨어진 가난한 선비라는 것을 간파해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피로에 지쳤던 성격에 그러한 꼴을 보고 있던 오혜량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어이~ 그만 참으시게. 우리의 행색이야 누가 봐도 거지 중에 상거지라고 해야 할 터이니 그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밥 한 끼라도 잘 얻어먹으려면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네. 허허~!”
이렇게 오혜량의 입을 막아놓은 진상도는 다시 그 청지기를 바라보면서 호탕하게 말을 꺼냈다.
“혹, 이 댁의 큰아드님이 병환 중은 아니던가?”
“예?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마도 발병(發病)한지는 대략 3년은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어이쿠~! 이제 보니 도사님이셨군요. 진작 그렇게 말씀을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청지기의 표정과 진상도의 표정을 번갈아 보면서 오혜량은 어안이 벙벙했다. 뭔가 신통한 도술이라도 부리고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는 남의 집안 도령의 발병을 이야기하고 있는 풍경은 참으로 낯설었다. 안내하면서 청지기가 호들갑스럽게 말을 이었다.
“실은 우리 주인댁의 큰 공자님이 3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도저히 치료하는 방법이 없는 모양입니다. 주인님께서도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만 이제는 거의 포기하신 상태입니다요.”
“흠. 내 그럴 줄 알았네. 어서 주인을 뵙자고 전갈을 넣어 주시게.”
“아, 예예~! 여부가 있습니까요. 그보다도 여기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소인이 모시겠습니다요. 자자~.”
이렇게 해서 안채의 객사로 안내된 두 사람은 시장하던 참에,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온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오랜만에 술도 몇 잔 마시고 나자 주인인 듯한 사람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느 고인(高人)이신지 모르오나,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고 희망이 있는 말씀을 주신다고 하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소생은 이 집의 주인 방문천(方文泉)입니다.”
“아, 원래 방가장이었군요. 맛있는 진미를 잘 대접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화산으로 일을 보러 가던 중에 이 댁에 액운이 끼어있는 것을 보고서 잠시 들러서 바로잡아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만, 이렇게 환대가 극진하시니 필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음 놓으시지요. 허허허~!”
“그렇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은 그동안 짧지 않은 시간을 수없이 많은 비방을 사용했으나 도무지 효력이 없어서 이제는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주인의 모습에서 자식의 죽음을 바라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애처로운 마음을 읽을 것도 같았다. 이제는 희망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위안이 될 뿐 실제로 병을 고칠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는 마음도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느낀 진상도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쪽 정원에 있는 커다란 대추나무는 어디서 가져온 것이오?”
“예? 아, 그 나무는 3년 전에 이웃 동네의 성황당에 있던 것인데 자태가 멋스러워서 후하게 돈을 쳐주고 옮겨온 것입니다.”
“그 나무를 어서 베어버리시오.”
“예? 그럼 그 나무가 문제라는 것입니까?”
주인은 너무 놀랐다는 듯이 바짝 다가앉으면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다시 진상도는 조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그 나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나무는 보통의 나무가 아니오. 이미 500년을 그 성황당에서 있으면서 온갖 대접을 받고 살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목(神木)으로 우러러 왔던 나무요. 비록 하나의 나무도 위하고 받들면 신목이 되는 법인데, 이것은 나무나 바위나 모두가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니 이미 그 나무는 신령(神靈)이 붙어있었더란 말이오.”
“설마, 그것이 원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어찌 한갓 나무에 불과한 것이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오?”
놀라서 오히려 믿지 못하는 주인의 표정을 보면서 진상도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정원으로 옮겨온 후로는 자신에게 절을 하는 사람도 없고, 음식도 얻어먹을 수가 없자, 화가 치밀어서 독 기운을 발산시켰는데, 그 나무의 기운은 우선 자라고 있는 이 댁의 큰 공자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오. 저 가지의 끝을 보시오. 마치 칼처럼 뾰족한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바로 이 댁의 큰아드님의 거처란 말이오.”
과연 진상도가 가르치는 곳을 보니 그 대추나무에서 삐쭉하게 나온 가지 하나가 가르치는 방향은 영락없는 이 댁의 아들이 거처하는 방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서 소스라쳐 놀란 주인은 당장에 하인을 불렀다.
“여봐라 당장에 저 요망스러운 나무를 베어버려라!”
주인의 명을 받고 하인들이 모여들자, 진상도는 다시 주인을 진정시켰다. 여전히 나무를 하나의 신이 깃든 것으로 대하지 않고 나무로만 보고 있는 주인이 안타까웠다.
“어허~, 이럴 것이 아니외다. 아직도 그냥 평범한 나무로만 보인단 말이오? 마을 사람들의 공경을 받던 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라 신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 저 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소? 저 대추나무가 여기 있게 된 것에는 다른 아무의 허물도 아닌 바로 주인장의 욕심으로 이뤄진 것이오. 설마 저 나무가 이 호화스러운 정원에 오고 싶어서 왔겠소?”
“그야 그렇지만, 감히 나무로 인해서 내 자식을 잃을 뻔했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분노하게 되었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인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음식을 한 상 차려 오시오. 그리고 향을 준비하고 저 나무에다가 제사를 드릴 채비를 하시오. 내가 친히 제사를 올리고 비로소 나무를 베도록 하겠소.”
이윽고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멋진 제사상이 준비되었다. 그러자 진상도는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에 그 나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축문(祝文)을 읽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유세차, 금월 금일 이 자리에서 제사를 받으시는 목신이시여. 미천하고 짧은 인간의 안목으로 인해서 존귀한 신령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감히 이렇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 분노한 마음으로 본다면 이 집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고 해도 다 풀리지 않을 정도인 것은 능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낭랑하면서도 엄중한 소리로 축문을 읽는 소리에 주인을 비롯한 가솔(家率)들은 숙연한 분위기가 되어서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축문의 내용이 자신들의 마음인듯했다. 진상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다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니 이러한 인간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순간순간마다 신령께는 아무런 이득도 없을 뿐입니다. 다행히 오늘 진상도가 신령님의 분노한 상황을 알리고, 이렇게 진수성찬을 마련하였사오니 그동안의 노여움을 푸시고, 다시 원래의 그 장소로 가셔서 또 다른 집을 마련하소서.”
모든 사람들이 진상도가 하는 대로 머리를 조아리고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이 되어서 그렇게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참을 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정성스런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세상의 변화조차도 가능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곳은 이제 원한이 서려 있어서 머물 곳이 못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원래의 계시던 자리로 옮긴다면 이 나무는 썩어지고 말 것이니 부디 여기에 애착을 갖지 마시고 이 음식들을 흠향(歆饗)하신 후에 본래의 오신 곳인 성황당(城隍堂)으로 돌아가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읽어 내리는 축문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진심으로 나무에 붙어있던 신령이 노여움을 거두고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했다.
“아울러서 이 댁의 아들에게 내린 재앙도 즉시로 거둬주시고 그러므로 해서 신령이 이 천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해마다 그 성황당으로 가서 제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초 소생 진상도 감히 고하옵니다.”
그렇게 다 읽은 축문은 촛불을 붙여서 나무를 한 바퀴 돌면서 태워지고 제사상의 술을 나무에 뿌리는 마무리 절차까지도 원만히 마친 진상도는 상을 물리라고 하고서는 오혜량을 불렀다.
“여보시게 이제 목신이 다시 성황당으로 옮겨가셨네. 그러니 지체 없이 이 나무를 없애버려야 다시는 목신이 오지 않을 것이네. 그대의 명성에 걸맞게 이 나무를 정확하게 360토막으로 나눠주게. 단칼에 잘라야 하네. 특히 이 점을 명심하게.”
“예, 그야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잠시 숨을 고르던 오혜량은 칼을 곧추세우고서 심호흡을 한 다음에 나무를 향해서 섰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손상이라도 올세라 멀리 떨어져서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오혜량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으~~합!”
외마디의 함성과 함께 그는 화살처럼 대추나무의 꼭대기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검영(劍影)이 난무하면서 사람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바람 소리와 기합 소리가 어우러져서 한바탕의 풍악을 연주하는 듯했다. 높이가 대략 50척은 됨직한 나무가 순식간에 나무토막으로 변해서 수북하게 쌓인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원래 대추나무는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그 나무를 이렇게 순식간에 자른다는 것은 참으로 천하제일검에 손색이 없는 무공이었다.
“참 훌륭하네, 정말 대단허이. 허허~!”
“이 정도를 가지고서 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그 눈길에서 이미 사제의 정이 생겼단 말인가? 진상도는 오혜량은 자신의 무공을 정말 오랜만에 써 보고서 아직도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온몸의 피로가 가시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 주인장 어른. 이제 이 나무는 우리가 멀리 가지고 갈 것이외다. 이제부터는 아드님에게 치료약을 먹이면 효력이 있을 것이니 7일간만 약을 먹이시오. 그러면 예전처럼 깨어날 것입니다. 참, 매년 삼월 삼짇날에는 반드시 성황당에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은 잊으시면 안 되오. 그럼 이만.”
“아니, 이렇게 수고를 하시고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좀 더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고, 또 참으로 효력이 있다면 후한 사례를 해야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머물 곳은 정갈하게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오. 내가 도망갈 사람은 아니니, 염려 말고 아드님을 치료하도록 하고, 나중에라도 사례하시려거든 화산아래의 천마협곡에 먹을 것을 보내고서 봉화를 올려주시오. 그럼 감사히 사례를 받겠소이다. 허허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달리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약간 있기는 한데... 가능하다면 수레와 소를 한 마리 마련해 주시오. 저 나무를 싣고 가야 하겠습니다. 다시는 탈이 나지 않게 멀리 갖고 가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주인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바삐 가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병색이 깊어 보이는 14세 정도 되는 아이를 안고 달려왔다. 두 사람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기다렸다.
“두 분 어르신! 정말로 우리 아들을 살려주셨군요. 아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아들이 어느 사이 기운을 차리고서 먹을 것을 찾아 나왔지 뭡니까. 정말 이 은공을 어찌 갚아야 할는지요.”
주인은 체면도 돌보지 않은 채로 목이 메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다. 진상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오혜량은 연신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면서 좌우를 번갈아 살폈다. ‘과연 이 스승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선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내심으로만 놀랐을 뿐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있는 진상도와 얼굴이 마주쳤다. 그 순간 또 자신의 속마음이 들통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그러한 오혜량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상도는 주변을 정리하고는 주인이 준비해 준 수레에다가 나무를 싣고서 그 장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