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제1장 화산의 노도인/ 4. 화산행(華山行)

작성일
2017-01-0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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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4. 화산행(華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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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우의 그 창자를 끊는 듯한 고통은 애초에 예정이 되어있던 것이라네.”

진상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낭랑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원래 수화(水火)는 상극(相剋)이라서 서로 어울릴 수가 없는 성질이네. 그런데 아우는 그러한 두 가지의 성분을 결합시켜서 대단히 위력적인 무공으로 완성을 시킨 것이지. 아마도 현재 강호의 무림에서 이러한 기이한 검법에 견딜 고수는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실로 가공할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검법이 틀림없었을 테니까.”

진상도가 풀이해 주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흥미롭게 빠져들고 있는 오혜량은 오슬오슬 추워지는 기운을 막으려고 고량주를 거듭해서 들이켰다. 그것을 빙그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흠. 동정호의 술맛은 역시 일품이구먼.”

“예, 술맛도 술맛이지만, 저는 형님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습니다. 검술(劍術)만 익히는데 전력했을 뿐,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따뜻한데도 자꾸 추워져서 고통스럽지?”

“그렇습니다. 형님 밤이 깊어 가면 다시 온몸의 신경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밤에는 수기(水氣)가 발동을 하는 까닭이라네. 그러니까 따뜻한 낮에는 다시 화기(火氣)가 발작을 하여 극렬한 고통으로 뒤바뀌는 거라네.”

“아하~! 그러한 이치가 있었습니까? 저는 까닭도 모르고 천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혜량은 문득 팔대문파가 숭산 소림사에서 군웅집회를 할 때의 장면이 떠올라서 다시 진저리를 쳤다. 특히 소림사의 방장인 허운(虛雲) 화상이 자신의 냉혈장(冷血掌)을 맞고 숨을 거두면서 외친 일갈(一喝)은 항상 뒤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빈도(貧道)는 그대를 원망하지 않소. 다만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고통을 받을 그대를 측은(惻隱)히 여길 뿐이오. 흑도(黑道)와 백도(白道)를 가리지 않고 살상을 저질렀으니 그 허물은 내가 논하지 않아도 하늘이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피를 토하고 죽어가면서도 이렇게 한 말이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 후로는 자신과 겨루려고 찾아 온 검객들과 만나도 감흥이 살아나지 않고, 그 대결에서 이기더라도 흥분이 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강호를 누비면서 들었던 그 어떤 저주보다도 허운 화상의 짧은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던 것이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오혜량이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상도의 모습에 허운 화상의 모습이 겹친다.

“문득 과거의 철없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기억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그대와 함께할 것이네. 그러니까 특별히 마음을 두지 말고 그냥 벗이려니 하게.”

오혜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냥 귀만 기울였다. 악명을 떨치던 천하제일검이 이렇게 온순한 한 마리의 양이 되어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강호인들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비법으로 연마를 한 자오검법은 천하에 대적할 상대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물과 불이 서로 엉켜있기 때문이라네. 마치 불은 예리한 칼날이 되고, 물은 견고한 방패가 되어서 상대를 맞서게 되니 제대로 공격도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그것은 이 검법에 대항하려고 하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를 모르게 되는 까닭일 테니, 공격하고 있는 듯싶어서 방어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에 방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자세가 흐트러지게 되고, 그래서 다시 공격하려고 하면 이번에는 어느덧 그 허점을 찔러오니 감당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

오혜량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개의 글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수(水)? 화(火)? 상극(相剋)이라... 수화상극(水火相剋).....’

“실로 가장 허점이 많은 것은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순간이 아니겠나?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데에는 어느 고수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지. 그래서 자오검은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인데, 실로 이 검법을 쓰면 쓸수록 자신의 몸도 그렇게 분리가 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가 된 것이구먼.”

“그렇다면 무공을 연마할 적에나, 그것으로 천하를 유람할 적에는 왜 그런 증세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야 무공이 깊어 가면 갈수록 그만큼 고통이 커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지. 그러니까 연마를 할 적에는 연마를 할 적에는 아직 기운이 양극단까지는 치닫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천하의 고수들과 싸울 적에는 그러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니 자신도 몰랐던 것이지. 문제는 이렇게 고요하게 될 적에 일어난다는 것이라네.”

“맞습니다, 사부님. 대결이 끝나고 며칠은 괜찮은데 그 후로는 몸에 이상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대를 찾아다니게 되는 악순환(惡循環)이 이어졌던 것이지요.”

“그러한 것을 중독(中毒)이라고 하네. 이미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수화(水火)의 독기(毒氣)가 깊이 스며들어서 몸에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니 무슨 묘안인들 있겠느냔 말이지.”

“그래서 이대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서 혀를 찰 지경이었다. 오혜량은 그동안 강호를 주름잡고 다니면서도 세 치의 혓바닥으로 이렇게 위력적인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말이라는 것은 그저 시(詩)나 읊조리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의 그 이상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듣는 이야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 위력으로 자신의 심장을 마구 후벼 파고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진저리까지 쳐질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리 애를 쓴들 무슨 묘안이 있겠냐?’고 되물으면서 말을 끊는 진상도를 보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자신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내게 접근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가? 뭔가 깊은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인가? 그럼 그 속에 있는 의중이 무엇일까?’

원래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오혜량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발병의 정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우는 무예를 연마할 적에 어디서 했지?”

“예?”

이야기의 핵심을 피하고 빙빙 돌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묻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대가 태어날 적부터 천하제일검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니 필시 어디에선가 무예를 연마했을 것은 분명하고 그 장소는 어디인가 말이네.”

“아, 그 말씀이셨군요. 제자는 흑룡강(黑龍江)이 내려다보이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장백산이라... 장백산은 동북에 있는 산 말이구먼.”

“그 울창한 삼림 속에서 항상 먹고 뛰면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그리고 자오검법도 그 장백산의 한 석실 벽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칼로 깊이 새겨진 채로 오랜 세월을 이끼에 덮여있어서 자세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발견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혜량은 잠시 오래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이 솟구친 거목들을 상대로 막대기 하나를 쥐고서 천군만마를 호령하듯이 달려들던 시절의 기백이 참으로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마음도 평온했고, 무예를 연마하고 나면 그만큼 기운이 증가(增加)되어서 언제나 기운이 펄펄 넘쳤다. 그런데 지금 이 선비가 하는 이야기는 애초에 이렇게 고통을 받게 되어있었다고 하니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써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혜량의 생각은 진상도의 말로 인해서 깨어졌다.

“그 검결(劍訣)에서 연마하지 말라는 경고(警告)는 발견하지 못했던가? 아마도 그러한 무공의 비급(秘笈)이었다면 필시 그곳에 비결을 새긴 사람도 무림의 고수였을 것이고 당연히 그도 지금 그대와 같은 고통을 받다가 죽었을 것인데 말이네.”

사실이었다. 당시로써는 무공에 대해서만 넋이 팔려서 주의하라는 이야기는 읽었으나 그냥 그렇게 하는 말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자오검(子午劍)을 익히게 되면 피할 수 없는 부작용까지도 써 놨을 것’이라는 진상도의 통찰력(統察力)에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처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대가 따를 것인지가 문제로구먼.”

“진작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요?”

“화산을 아시지?”

“알다마다요. 화산파의 본거지가 있는 화산을 모른다면 무림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화산의 한 골짜기에 깎아지른 벼랑이 있네. 그 벼랑에다가 30평 정도의 석실을 하나 만드시게. 그러면 그대의 병은 말끔히 나을 것이네.”

“예? 석실을 만들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네.”

오혜량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이 사람이 결코 자신을 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믿기로 하기는 했으나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약을 먹으라든지 아니면 어떤 선인(仙人)의 술법(術法)이라도 알려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참으로 의아했다. 그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 놀랄 것도 없네. 고려국의 속담에 ‘꿩을 잡는 것이 매’라는 속담이 있다네. 그대는 병만 고치면 되었지 그 방법이야 아무렴 어떻겠냔 말이지.”

“그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제가 우둔하여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잘 되지를 않습니다.”

“허허허~! 뭘 그리 망설이시나. 지금은 이나저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강호를 돌아다녀 봐도 재미가 없을 터, 화산에 가서 동굴 벽과 싸운다고 해서 전혀 억울할 것도 없을 것이고, 또 만약에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분풀이로 이 늙은이를 잔인하게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거고, 나는 또 생기는 것 없이 그렇게 죽어가면 그만인 것을. 허허허~!”

꾸밈없이 이치에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진상도에게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로 그렇다. 괜히 길 가다가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제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떠나서 조용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겠는가?”

“당연히 저는 형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나누다 보니까 제가 형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음을 느끼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런가? 아무렇게나 편할 대로 하게나. 허허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스승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제자를 위해서 마음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무슨 까닭이 있습니까?”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이치는 필연적(必然的)인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인 것을. 그러니 나도 그대에게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허허~!”

오혜량은 ‘그럼 나에게 얻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은 것을 꿀꺽 삼켰다. 여태까지 해온 모습으로 봐서 그렇게 허술하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남의 일에 끼어들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뭔가 희망이 생기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대로 한번 해 보는 것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은 내일의 화산행을 위해서 잠자리에 든 다음에 이튿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악양(岳陽)을 출발해서 사시(沙市) 까지는 양자강을 따라서 뱃길을 이용하고, 다시 걸어서 형문(荊門)을 거쳐 무당산을 감돌아 화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고달팠다.

그렇게 가는 도중에도 진상도는 여기저기 볼 것은 다 보고 구경할 것도 다 하면서 길을 가는 데에다가 내공이 깊지 못한 탓인지 원래 성격 탓인지 부지런히 걷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혜량은 내심 답답하기가 태산 같았지만, 그래도 자존심 하나로 그냥 버티고서 묵묵하게 진상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해서 겨우 화산의 자락이 눈 끝에 잡힐듯싶은 상주(商州)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이미 대여섯 달이 지나서 초가을의 분위기조차 풍기는 백로(白露)도 지났다. 출발할 때에는 봄날의 아지랑이들이 움직이는 풍경을 보면서였는데, 어느 사이에 머지않아서 중추절이 되려는지 하늘에 뜨는 달도 점차로 둥근 모습으로 변해 가는 팔월 초순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당연하게 느꼈는데, 이제는 어서 가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였지만, 어쩐 일인지 진상도는 도무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