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제1장 화산의 노도인/ 2. 혜암도인(慧岩道人)의 추억

작성일
2017-01-0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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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2. 혜암도인(慧岩道人)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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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이 석실의 주인인 진상도는 이 화산에 들어 온 지도 금년으로 대략 20여 년이 흘렀다. 그 이전에는 천문(天文)이며, 기문(奇門)이며, 지리(地理)며, 병법(兵法)과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법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학문은 모조리 배우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강호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영민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학문을 심오한 경지까지 통달하게 되었고,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속에서 서로는 오묘한 연관을 맺으면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통감을 하고 온갖 종류의 학문도 결국은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이든 정신이든 각기 따로따로 생겨서 그렇게 제멋대로 놀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었던가 보다. 어느 순간에 심신(心身)이 몽롱(朦朧)해지면서 안갯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다.

그렇게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은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그 이유에 의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면서 흘러간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동안 온갖 종류의 학문을 구하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자신의 열정(熱情)은 한낮 지식의 탐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이 들자 더 이상의 유람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조용하게 은거할 장소를 이리저리 주유(周遊)하면서 찾고 있었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으로 웅장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화산(華山)을 좋아한 진상도는 가능하면 화산에다가 조용하고 아담한 석실이라도 한 칸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것도 여간 복이 많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냥 마음만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자연의 도'에 대해서 관찰을 하면서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호남성의 북쪽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지나게 되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날의 풍경과 함께 남해의 검푸른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광활한 호반에 철렁하게 넘치는 물은 왕성한 수(水)의 기운이 허공을 향해서 솟구치고, 그 기운을 안개로 엉키게 한 다음에 다시 주변의 초목으로 스며들어서 생기를 가득 채우는 모습에 취해 있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찻잔을 들었는데, 그 안에는 강호에서도 유명한 동정호의 오룡차(烏龍茶)가 향긋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어서 연신 차를 마시는 손길에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세상사의 덧없음에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수(水)......

오행(五行)의 시작이면서 끝에 머무르고 있는 수(水)는 겨울의 냉 기운을 머금고 있으면서 자연을 정화(淨化)시키고 순환(循環)시키는 역할을 하는 성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동정호의 넘실대는 물결은 기나긴 여정(旅程)에서 얼마나 많은 더러운 것을 씻어서 맑은 세상을 만들면서 여기에 도달하게 된 것인지를 되새기니 한 모금의 차 맛은 더욱 향기로웠다.

그날도 무심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윤회사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이 되었는데 특이한 표정에서 뭔가 눈길을 끌게 되는 묘한 느낌이 있어서 주시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사내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안광에 부담을 느꼈는지 천천히 진상도에게 다가왔다. 문득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머쓱해진 진상도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느 고인이신지 모르겠으나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 소생에게 눈길을 주시는지 궁금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아, 실례했소이다. 문득 춘색(春色)이 하도 고와서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다가 귀하의 모습을 발견하고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례를 범했으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오.”

“아닙니다. 그런데 감히 여쭙습니다. 무엇이 특이하다고 보셨는지요?”

“이거,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는 말씀이오만, 혹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안으로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떨까 싶소이다만......”

그 남자는 간단치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이 사람에게서 풍기는 중후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서 2층의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귀하의 모습과 얼굴에 흐르고 있는 특이한 기운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소이다. 이 진모(陳某)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필시 경락(經絡)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기운의 흐름이 역류(逆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구려.”

그러자 사내는 흠칫 놀라면서 포권(包拳)을 하여 고개를 숙였다.

“진 선생께서는 과연 예리한 안광을 갖고 계셨습니다. 소생은 이미 불치의 병을 안고 있습니다. 백방으로 치료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어떤 약도 무효(無效)하고, 어떤 명의도 해결책(解決策)을 제시하지 못하여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선생께 모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혹시, 진모의 견문이 좁다고 탓하지만 않으신다면 귀하의 이름을 맞춰 봐도 좋겠소?”

“예? 소생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셨단 말입니까?”

“당금 무림에서 특이한 검법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모두 제압하고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 되었다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소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자오검(子午劍) 오혜량(吳慧樑)이라는 것을 듣고는 명호(名號)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더랬지요.”

“틀림없습니다. 소생이 오혜량입니다. 이룬 것도 없이 허명만 강호에 떠돌아다니는가 싶습니다. 변변치 못한 이름을 감히 헤아려 주시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내력이 깊으신 선생께서는 어떤 어른이신지도 궁금합니다마는.....?”

문득, 오혜량은 경계의 마음이 일었다. 그토록 숱한 고수들과 자웅을 겨루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기도 이미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순간 살기(殺氣)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혜암은 부드럽고 중후한 웃음으로 오혜량의 긴장된 마음을 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손을 들어서 흔들면서 말했다.

“아아~! 염두에 둘 필요 없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진상도(陳詳道)라고 부르고 강호에서는 혜암(慧岩)이라고도 불러 줍디다. 그대와는 일 푼의 원한 관계도 없으니 경계하지 않아도 될 거요. 다만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죄악의 고통을 벗어나서 해탈에 이르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오.”

그의 말에서 전혀 위협을 가할 악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통의 본질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자비심이 느껴지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아오르는 격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 그러셨습니까? 의심해서 송구합니다. 소견이 협소하여 누군가 아는 체를 하면 소생이 항상 긴장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자신도 모르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이오~! 이해하고말고. 그러니까 아까 본 모습에서는 극심한 냉기(冷氣)와 극렬한 열기(熱氣)가 교차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음이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인데 그래도 그러한 고통을 잘 견뎌 내는 것을 보면서 필시 내공이 최상승(最上昇)이라는 것을 짐작했소이다만, 과연 자오검이셨군요.”

“그런데 그러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자오검이라는 것을 알아보셨는지 그것이 소생은 더욱 궁금합니다.”

“그야 혜암(慧岩)에게는 약간의 관형찰색(觀形察色)에 대한 잔재주가 있다오. 그렇기에 얼굴에 타고 흐르는 기운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얼굴이 반홍반청(半紅半靑)으로 보였더란 말이오. 그런데 겉으로는 여느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소이다.”

“과연~! 탄복(歎服)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것은 아니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어떻게 연마하셨기에 그러한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게 궁금하고 또 그것을 알아야 원인에 대해서 분석(分析)할 수가 있을 것이니 치유(治癒)의 해결책도 찾아낼 수가 있지 않을까 싶소이다마는......?”

“사실 말씀을 드리자면 이야기가 좀 길어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진 대인께 이러한 정황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고통의 열빙지옥(熱冰地獄)에서 벗어날 길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견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좀 지루하시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셔서 한 중생의 번뇌를 해결해 주신다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나도 사실 확신은 없소이다. 다만 어쩌면 해결의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어서 괜히 해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감히 개인의 문제에 끼어든 것이나 아닐까 그것이 저어될 뿐이오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그렇게도 천하를 누비면서 이 기묘한 증세를 치료할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봤습니다만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증세라는 말만 할 뿐이고 어느 누구도 해결책은 고사하고 원인조차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사느니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왜 아니겠소. 능히 그 고통의 극렬(極烈)함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해도 되지 싶소. 빈도(貧道)가 과거에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고통도 짐짓 느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모한 짓도 망설임 없이 했더란 말이오.”

자오검 오혜량은 짐짓 진중하고도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까지 된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들려주려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인(奇人)을 만나는 것도 천재일우(千載一遇)인데 이러한 기회에 자칫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놓쳐버린다면 아마도 천추(千秋)의 한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 두서없는 이야기나마 소상히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명찰(明察)하셔서 지혜의 힘을 베풀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뿐더러 은혜가 백골난망(白骨難忘)이겠습니다.”

혜암은 점원이 갖고 온 따끈한 차를 잔에 따르면서 오혜량의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