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제1장 화산의 노도인/ 1. 만산홍엽(滿山紅葉)

작성일
2017-01-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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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제1장 화산(華山)의 노도인(老道人) 


1. 만산홍엽(滿山紅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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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朱元璋)이 원(元)을 정벌하고 명(明)을 건국한지도 30여 년이 지난 홍무(洪武) 만년이다. 정국은 2대 황제인 혜종(惠宗)에게 나라를 넘겨주려는 시기였다.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우뚝 우뚝, 제각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절경의 바위 봉우리들이 구름 위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화산(華山). 고래로 수없이 많은 영웅호걸들의 발길이 스쳐 지나가고 또 그렇게 여전히 호기심 어린 사람을 부르는 명산이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백학(白鶴)이 두 마리 날아오르는 하늘에는 자욱한 안개가 서려있다. 안개를 아래로 하고서 그 위에는 역시 만장(萬丈)이나 되어 보이는 아득한 산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 들어온다. 멀리서 이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를 둘러봐도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깊고도 높은 화산의 협곡만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때는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10월 초순, 낮은 들녘에는 아직도 단풍의 여세(餘勢)가 남아 있었지만 이 깊은 산중에서는 이미 그 곱던 물색들이 퇴색(退色)해 버리고, 그 무성하던 나무숲들의 그늘에 가려서 여름 내내 보이지 않았던 암벽과 더 깊숙한 곳의 세세한 곳까지도 하나 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어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깊은 산중에 돌연 적막을 깨고서 깊은 한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후~~!”

그 소리는 길게 이어졌는데, 보통 사람이 얼핏 들어봐도 상당한 내공이 실린 중후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잠시 후에 카랑카랑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음...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구나! 이렇게 붉었다가 스러지는 빛깔을 보아 온 지도 어느덧 한 갑자(甲子)가 지났으니 덧없는 세월 속에 나이만 먹어가는구나......”

그는 얼핏 봐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맑고 윤택이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옷은 청색이 감도는 도포를 입었으며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데, 이미 단풍이 지기 시작한 틈 사이의 널따란 반석(盤石)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흡사 천상(天上)에서 선관(仙官)이 휴식을 취하러 하강한 것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그리고 멀리 산 아래를 응시하는 시선에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깊은 화산(華山)의 협곡(峽谷)에 누가 찾아오기로 했는지 그렇게 혼자서 독백을 하면서 가끔 산 아래를 응시하기를 한 시간 정도 흘렀다.

그렇게 다시 산중은 적막(寂寞)에 휩싸인 채로 고요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멀리서 걸걸하고 육중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지면서 공기를 흔들었고, 그 소리에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던 도포자락의 남자도 잠시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소리는 어느 사이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실로 대단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달려온다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날아온다고 해야 할는지 표현하기에 곤란한 정도의 빠른 몸동작이었다.

“혜암도인(慧岩道人)~~!”

그 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졌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도포자락의 남자도 대꾸를 했다.

“어서 오시오! 달마존자(達磨尊者).”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마존자라고 불린 인물은 허공을 걷듯이 몇 차례 몸을 움직여서 모습을 드러냈다. 형색을 살펴보니, 눈은 데굴데굴한 왕방울이었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그리고 걸친 옷은 장삼에 가사를 걸쳤는데 이미 몇 십 년이나 세탁하지 않았는지 누덕누덕 기운 천도 이미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나마 다 떨어져서 속살이 드러날 지경이었으나, 이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솥뚜껑 같은 손을 덥석 내밀어서 도포의 남자를 움켜잡았다.

“혜암도인, 오늘을 많이 기다렸소이다. 그간 법체 평안하셨소이까?”

“빈도(貧道)는 존자의 염려지덕으로 하는 일도 변변히 없으면서 세월없이 나이만 먹고 있구려, 상인께서는 그간 어찌 보내셨소?”

“소승은 도인과 약속한 후로 10년간 숭산(崇山)에서 면벽한 결과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생각을 해 보니 허접하게나마 무시를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고서 이렇게 10년이 되기를 기다려서 오늘 화산으로 한달음에 달려왔소이다. 껄껄껄~~!”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서 이미 탈속(脫俗)한 도인의 모습이 그대로 역력하게 드러난다. 주객(主客)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10년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린 것은 이 달마라고 불린 노화상을 기다린 것이었다.

“존자께서야 이미 불도의 깊은 경지를 몸소 체득(體得)하신 분으로써 자연의 풍광(風光)을 관찰하고 직관으로 통찰(洞察)하시니 그 높은 안목을 무슨 수로 벗어날 수가 있겠소. 그에 비하면 빈도는 겨우 속진(俗塵)이나 벗어나서 이렇게 산중에서 도를 닦는다고 주접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련할 뿐이오이다. 허허허.”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하시오, 실로 이렇게 높고도 깊은 안목을 갖고 세상의 이치를 관조(觀照)하시는 도인은 근래 200년 내로는 찾으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외다. 껄껄껄.”

“과찬(過讚)은 실례라고 합디다. 이제 그만하시고 석실로 들어가시지요.”

“예, 그럽시다. 오늘은 밤을 새워서 나눌 이야기가 적지 않겠구려. 껄껄껄.”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한바탕 칭찬한 후에 석벽으로 다가갔다. 혜암이 암벽을 향해서 손을 한번 휘두르자 이끼가 잔뜩 붙어있는 절벽에서 스르릉 소리가 나면서 동굴의 문이 열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문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문(石門)이었는데 밖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구조로 만들어서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달마도 담담하게 혜암도인 뒤를 따라서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은 그 넓이가 대략 30평 정도 되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천연적인 동굴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인공 동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벽에서는 야명주(夜明珠) 두 개가 붙어있어서 어두운 석굴을 밝히고 있는데 안력을 돋워서 살펴보면 천장 부근에는 상당히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예전에는 기름이나 나무를 이용해서 조명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안쪽에는 소박하게 만들어진 침상이 있고, 그 곁에는 책상이 놓여 있는데 빛이 바랜 고서가 몇 권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한쪽에는 간단한 침구와 약간의 의류가 있었다. 혜암은 방석을 내어서 손님에게 권하면서 자신도 앉았다.

“그나저나 참으로 오랜만에 귀한 벗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방문을 해 주셨는데 변변한 대접도 없으니 손님에 대한 예의가 말이 아니외다. 허허허!”

“무슨 결례의 말씀을... 껄껄껄~! 빈승이 남의 손님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혜암도인이 참으로 입에 발린 예의를 차리시는구려. 그럴 필요 없소이다. 껄껄껄~!”

달마의 웃음소리는 대단히 컸으나 그리 넓지 않은 동굴의 석실에서는 울림이 크게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소리를 흡수하는 무슨 장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자, 우선 이리 앉아서 목이나 좀 축입시다. 마침 남해에서 선물로 들어온 명주(名酒)가 있는데 아직 개봉하지 않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외다.”

“저런, 그렇게 진귀한 보물이 이렇게 깊은 산 구석에 있었다니 참으로 혜암도인의 도력은 대단하여 놀라울 뿐이구려. 남해라면 그 해상선인(海上仙人)이 보낸 모양이오. 그 늙은이는 사람을 골라가면서 선물을 하는 모양이구만.. 고얀 늙은이로고.”

“원, 그럴 리가. 허허허.”

혜암이 항아리를 꺼내어서 마개를 열었다. 그 순간 맑고 청아한 향이 석실에 넘쳤다. 두 사람은 그 향에 취해서 잠시 말을 잊고 멍하니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혜암이 문갑의 서랍을 열고서는 벽옥(碧玉)으로 다듬은 술잔을 두 개 꺼냈다. 야명주의 빛을 받은 벽옥의 술잔은 거무스레하게 빛을 내면서 은은하면서도 더욱 신비한 광채를 뿜어냈고, 그 빛으로 인해서 석실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자, 우선 목을 축이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눠야지요.”

“이거 향적(香積) 보살이 벌써 감응을 하시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영험이 있는 불공이 되겠소이다. 그럼...”

혜암이 주는 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혜암과 달마는 그렇게 한 잔씩을 나누고서는 또 온몸을 감도는 청아하고 온후한 음양의 조화가 이뤄진 기운을 느끼면서 각기 한 시진(時辰:2시간) 정도의 삼매로 젖어 들었다. 한 잔의 술에서 이렇게 기이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다.

기운이 청아하면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술의 기운이 온후하려면 술의 성질은 뜨거워야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해 선인이 보냈다는 이 명주는 참으로 보통 사람이 빚은 것이 아닌 특이한 술이었다.

술은 그 성질이 더운 것인데, 약초의 배합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이 한 잔의 술은 10년간 쌓인 몸속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고 다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충분한 묘약이었다. 그래서 아까운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 싫어서 두 사람은 조용하게 그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돌도록 기의 통로를 지켜보면서 희열감을 즐긴 것이다. 이윽고 먼저 달마가 입을 열었다.

“그 남해 선인은 허구한 날 이런 미주(美酒)만 들고 있으니 원기(元氣)가 더욱 넘칠 수밖에 껄껄껄.”

“참으로 그렇소이다. 이 술 한 잔이면 한 달은 아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시장기를 느끼지 않을 기력이 들어있다고 생각되는구려. 참으로 보기 드문 명주를 보냈다는 것을 이제 알겠소이다. 허허허.”

문득 혜암은 지난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념(想念)들이 한바탕 일어나는 것을 조용히 음미하면서 추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