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 갑골문에서 찾은 바뀔 역(易)

작성일
2012-07-0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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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2화] 갑골문(甲骨文)에서 찾은 바뀔 역(易)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간밤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원한 것이 살만 하네요. 어떤 곳에서는 너무 많은 비가 쏟아진 데도 있다고 하니 피해도 발생하지 싶습니다. 다만 계룡산 자락에서는 이제 그만 내려도 되겠다는 정도의 감상입니다.


  며칠 전에 책을 두 권 읽게 되었습니다. 한 권은 최영애의 한자학강의(漢字學講義)이고, 또 한 권은 김경일의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입니다. 비슷한 주제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갑골문에 대해서 소개를 해 준 부분이 많이 있어서 그냥 막연하게 고대의 문서이겠거니..... 했던 것에서 조금 더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한자학강의 저자인 최영애 박사님은 도올 선생의 부인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고,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 저자인 김경일 박사님은 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쓴 것으로 인해서 잘 알려진 분이라는 것도 겸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한 분야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알게 된 귀중한 자료이다보니 누가 읽어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뀔 역(易)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낭월도 사실 이 글자의 생성원리가 궁금했었거든요.


  참고로 易자가 한자학강의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자학강의를 먼저 읽었기 때문에 갑골문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소개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한자의 모양이 그렇게 생긴 것에는 나름대로 그만한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대하다 보니까 글자의 자궁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문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1. 갑골문의 내용들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갑골문은 왕의 점괘를 무당이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글자들은 점괘를 기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괘를 얻고 해석했던 사람이 모두 실명제로 기록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러한 사람들을 정인(貞人)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던 것이기도 하네요. 그래서 공부에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 맞는가 싶기도 합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자신만 모르게 될 수도 있겠으니 말이지요. 하하~


  갑골문에 새겨진 문장을 구분하게 되면 대체로 세 가지의 문형(文形)으로 되어 있었던가 봅니다. 처음에는 누가 언제 점괘를 얻었다는 것이고 다음에는 무엇을 물었는가에 대한 기록이며 마지막으로 그 결과가 어떻게 적중했는지에 대해서 기록을 한 것이라고 하니까 예전의 사람들도 결과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도 점괘의 조짐에 매달리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지요. 여하튼 대부분이 이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매 점사를 묻고 해석한 첫 머리에 간지(干支)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간지의 역사는 갑골문자에서부터 있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그만큼 오래도록 이어 져 온 간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추적하여 최초의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가 언제였는지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의 어느 학자가 그렇게 시도를 했는데 산뜻한 결과에 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것은 간지학의 미스테리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2. 易자에 대한 해석


  내용 속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 모두를 소개하는 것은 또 번거로운 일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벗님은 구입해서 읽으시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요약을 하고 낭월의 관심사였던 이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본론을 삼고자 합니다.


  통상 易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도마뱀을 상징하고 있다거나, 혹은 일월을 의미하여 음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확증은 아니기 때문에 추측을 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정리를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이 되네요.


  김경일 박사께서도 도마뱀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정도는 당연히 알고 계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도마뱀과 易의 관계를 찾아보려고 시도를 하셨겠지요. 그렇게 해서 찾은 도마뱀에 대한 글자는 다음과 같이 생겼더랍니다. 내용에 나오는 이미지는 모두 소개하는 책에서 스캔한 것임을 밝혀드려야 저작권을 보호한 것이려니 생각되네요.


 



  이 글자는 전갈이나 파충류를 나타내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도마뱀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입을 할 수가 있겠는데 이 글자를 바뀐다는 뜻으로 사용한 흔적이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易자와의 관계를 찾아보는 것은 어려웠겠고, 이 글자에 대한 관심은 중국의 학자들도 마찬가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상대(商代)의 박제라고 할 수 있는 갑골문에 易에 대한 흔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미뤄서 짐작이 되네요. 그렇게 궁리를 하던 차에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던 글자가 등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 글자는 다음과 같이 생겼습니다.



  이 글자를 놓고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무슨 뜻인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상상과 해석을 연결하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했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설명을 하더라도 명쾌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학자들은 또 찝찝해지기 마련이지요.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남들을 설득시켰더라도 개운치 않은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미뤄서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해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오게 되었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두 개의 글자로 보입니다만 한 글자의 뜻으로 그려진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글자의 뜻은 '넘칠 익(益)이랍니다. 그러니까 물이 넘쳐나는 모습을 나타낸 뜻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그 넘쳐나는 의미를 아래의 두 그릇에 담는 것으로 의미를 주게 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것은 위의 그릇에서 넘치는 모양의 속에는 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막대기라고 하기도 그렇고....) 셋이 있는데 아래의 그릇에도 셋이 있다는 것이 보이시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파란 펜으로 울타리를 쳐 봤습니다. 그 부분만 따로 오려 낸 것이 勿의 형태가 되고 이것을 易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릇의 뒤에 붙은 꼭지가 나중에 日로 표시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그것은 조금 억지가 될 수 있겠다 싶네요. 왜냐하면 口도 있는데 日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요.


  글자를 들여다 보면 왼쪽의 그릇에는 하나가 있고 오른쪽의 그릇에는 두개가 있는 것으로 셋이 나눠진 것을 의미하였다고 보면 되겠네요. 이러한 것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챙겨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고생한 갑골문 학자들의 열정과 세심함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은 그린 사람과 읽는 사람 간에 서로 뭔가 공명(共鳴)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부분인 듯 싶어서 말이지요.


  갑골문 학자들은 이 글자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위의 글자가 바뀐다는 뜻을 갖고 있는 易이라는 것을 해독해 낸 것이지요. 그 흔적은 말 물(勿)에서 그대로 같은 족보라는 것을 읽어 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 알려주니까 비로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냥 그림만 놓고서 무슨 자를 닮았는지 찾아보라고 한다면 또한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을 뿐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여전히 易자의 윗 부분에 해당하는 日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원형에서는 보이지 않던 日을 나중에 변화하는 과정에서 해가 바뀌는 것처럼 바뀐다고 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참고로 물(勿)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말물, 없을물, 깃발이름물, 바쁠물, 털어버릴물 등으로 쓰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깃발이 바뀌어서 의미하는 바를 다르게 했을 것이고 비워버려서 없으므로 없다는 뜻이 살아나게 되고 또 털어버리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그릇에 물을 비웠다는 의미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바쁜 것은 바뀌느라고 분주했다고 이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易으로 부르지 않는 것에는 日의 유무로 인해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日이 왜 추가되었는지도 누군가 찾아내어 준다면 더욱 명쾌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석이 된 다음에 연결시키는 것은 낭월이라도 능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글자에는 쉽다는 뜻의 '쉬울 이'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릇의 물을 쏟는 것만큼이나 쉽다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조금만 망상에 대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궁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을 쏟는 것만큼이나 쉬워서 쉬울 이(易)가 되고, 그런데 물을 부으면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보고서 바뀔 역(易)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특별히 기특할 것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확한 해답이 없기에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易의 의미를 정리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낭월도 여기에 대해서 소개를 해 준 저자의 노력에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3. 책 이름은 좀......


  책의 이름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책의 이름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관성이 있어서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나서 제목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내용으로 봐서 적당한 제목을 붙여본다면 '갑골문을 읽는 코드'라던가 '갑골문에 숨겨진 비밀'과 같은 이름이라면 무난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던 것이지요. 오랜 시간을 한학에 대해서 연구하신 학자의 입장에서 약간 돌출적인 이름을 붙여보는 것은 재미있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름을 붙인 사람은 따로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살펴봤습니다. 다만 내용에서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은 노자의 도덕경이나 공자의 논어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그들이 지은 저서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알려진 것에 대한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멋모르고 책을 접하게 되었을 적에 그 제목에서 느끼는 것은 '동양사상은 모두 허무맹랑하여 믿어야 할 의미가 없다'는 정도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주역(周易)도 주나라의 역법이라서 주역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것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갑골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결과를 본다면 그러한 이야기도 또한 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어서 다른 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다음에 어딘가에서 더욱 상세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날도 궂은데 이렇게 좋은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고인들의 기록에 대한 흔적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배워가는 시간들은 아무리 할인을 하더라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이 되네요. 그래서 이러한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벗님이시라면 한 번 읽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한자의 생성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상당히 매료 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편안하신 주말 되시기 바라면서 이만 소개말씀을 줄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책을 보내주신 그 분께도 합장배례(合掌拜禮)를 드립니다.


                      2012년 7월 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다음은 오늘 문득 발견한 기사입니다. 한가하신 벗님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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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1500억, 은나라 도자기 한국에있다…중국들썩
    기사등록 일시 [2012-07-07 07:02:00]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제목(殷商古物現身韓國 占星紅陶罐出土) 아래 7개 서브타이틀(前言, 輾轉經手 不知是寶物, 陶罐甲骨文 暗藏天機, 熱釋光檢測 真偽解惑, 殷古物 總算驗明正身, 歷史價值 金錢難衡量, 專訪甲骨文專家 朴大鍾: 紅陶罐 來歷不凡)로 대서특필했다.

◇은나라 유물 한국에 현신(現身),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토

원래는 단지 어깨부위에 꽃무늬가 있는 일개 화병으로만 여겨졌던 향토적 홍도관이었다. 처음엔 그 둘레에 원형으로 새겨진 불규칙적 꽃무늬가 곧 갑골문임은 명확히 인지되지 않았다. 고증을 거치면서 이 일단의 갑골문은 역사적 '목야(牧野)의 전쟁' 사실과 관련이 있고 이 물건은 중국역사의 은상 유물인 것으로 능히 검증돼 현재 한국에 현신(現身)했다.

1899년 중국대륙 은허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 이후 지금까지 약 15만 편의 갑골이 출토돼 세상에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은 귀갑수골 위에 새겨진 것이고 또한 대부분은 모두 파손된 불완전한 것들이며, 도기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드물 뿐만 아니라 물건이 거의 완정에 가까운 것은 더욱 보기 어렵다. 그리고 출토된 물건 위에 새겨진 갑골문 내용을 연구해보면 점복으로써 길흉을 묻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점 사실(史實)을 기술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은(殷) 주왕(紂王) 홍도관의 출토는 별도로 상조문화의 신영역에 대한 일개 연구를 개창하는 것이 된다.

특히 홍도관 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주왕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이 홍도관이 상나라 주왕의 왕실유물일 수 있음을 증명, 가히 일건의 세계급 문화유산이자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 및 역사 형성에 대한 충격은 모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손으로 옮겨가는 동안 보물인 줄 몰랐다

한국인 골동품 수집가인 안 선생은 중국대륙을 자주 다닌 사람으로, 1992년 또는 1993년 요녕성 부신(阜新)시 외곽지역에서 현지 골동상으로부터 1차로 물건들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 이 홍도관이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안 선생은 이 물건을 요녕성 심양시 만융촌 내 거주지에 보관해두었다. 2005년 7월20일 전후로 안 선생은 이 홍도관을 또다른 한국인 골동품 수장가인 석 선생에게 팔았고, 석 선생은 8월18일 홍도관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중국 북경공항에서 X레이 검색을 받은 뒤 북방항공편을 이용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들여왔다. 홍도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석 선생은 또 8월 말에 또다른 김 선생에게 팔았고, 접수자인 김 선생 또한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에게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동 과정 중에서 소유인 모두는 홍도관 상에 새겨진 것을 단지 꽃무늬가 수려하고 독특하다라고만 생각했지, 그 특별한 의의와 가치는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 선생은 홍도관을 획득한 후에도 특별히 중시하지 않고 단지 일반가정에 진열해놓았다. 텔레비전 받침대 위에 놔둬 평시에는 그것을 수장함(收藏盒)이 되게 하고 손길가는대로 일부 잡동사니와 어린 아들의 장난감들을 담아놓았다. 2005년 12월24일 저녁시간, 조 선생은 TV를 보는 도중, 동시에 시선이 이 홍도관에 이르렀는데, 곧 그것을 손으로 붙잡고 자세히 한 번 감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문득 이 독특한 꽃무늬가 중국 고문자와 닮았고, 만일 그렇다면 이 홍도관은 진정한 골동품일 수 있음을 경각(驚覺)했다. 또한 이 고문자에 대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에 이튿날 그는 즉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을 찾았고 그때부터 홍도관이 갖는 진정한 신분의 역정(歷程)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천기가 암장된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갑골문

갑골문은 일종의 매우 중요한 고한자(古漢字) 자료이다. 절대 부분은 은허에서 발견됐는데 기본적으로는 모두 은상왕조 통치자의 점복기록이다. 은허는 저명한 은상시대 유적지로 그 범위는 하남성 안양시 서북 소둔촌, 화원장, 후가장 등지를 포괄한다. 이곳은 일찍이 은상 후기 왕조들의 도성 소재지인 까닭에 은허라 불리운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 하나는 바닥부위에 있고, 나머지 60개 글자는 도관 견부에 있는데, 중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총 49자이다. 도관 견부의 60개 글자들은 각자 모두 하나의 완전한 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결코 조금의 간격도 없이 단원횡행(單圓橫行) 방식으로,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서사돼 있다. 그 주요사항은 성상(星象)을 관찰하고 전쟁결과를 추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연구에 따르면 '주왕(紂王)'이라고도 하는 은상 최후의 황제 '제신(帝辛)'의 재위 만기 시에 '태백경천'이라고 하는 금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반란 및 국가기강을 파괴하는 대흉조였으니 은상으로서는 왕조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경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때마침 주나라 무왕이 기병해 주(紂) 왕을 치려는 시기여서, 주왕은 화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에 출병 전에 제사의 예를 거행하고 성상을 관찰, 그 결과를 구해 물었다. 주왕이 평상시처럼 그 결과를 수골(獸骨) 위에 새기지 않은 까닭을 규명해보면, 그 주된 원인은 중국전통의 천간과 지지는 60으로써 한 사이클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주왕은 응당 천자의 군대가 작전 중에 전체 과정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에 꽉 차게 표시를 한 것은 승리를 획득해 상왕조의 사직을 지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주왕은 특수한 정황에 직면한 상태에서 특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장차 결과는 60개의 글자들을 둥근 도관 위에 새겨 구웠으니 이것이 곧 현재의 이 홍도관이다.

60개의 갑골문자는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다. 제1조 복사는 '금(金)'에서 '후(侯)'까지로, 추구해 묻는 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제2조복사는 '조(祖)'에서 '어(御)'까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구함과 아울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년 전 주왕과 주후서백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진위 의혹을 풀기 위한 열석광검측(熱釋光檢測)

옛 물건에 대한 진위를 고증하는 일은 일단 힘들고 고생스러우며 또한 완전무결함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각 방면으로부터 힐책이 따르게 되는데, 물론 선의도 있고 혹은 악의도 있다.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상세하게 하나하나 해설을 해줘야 한다. 진정한 것인지에 이르러야 의문자로 하여금 진심으로 신복(信服)하게 만드니 오직 '진인사청천명(盡人事聽天命)' 밖에 없는 것이다.

홍도관의 고증에 대해 갑골문 방면의 의혹이 따랐는데,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 저 '상제신(商帝辛)의 점도문(占陶文)에 관한 연구' 논문에 매우 상세하게 설명돼있어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해, 이 갑골문은 도대체 어느 때 새겨졌는지, 도기를 굽기 전에 새겼는지 아니면 도기를 구운 후에 새겼는지 등의 의문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7호인 김일만 옹기장은 비록 홍도관 상의 각문을 한 글자도 알지 못하지만 집안 대대로 6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옹기 명인으로, 그가 제기한 견해는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권위도 있다. 그는 "홍도관 위에 새겨진 문자는 점토로 기물의 형태를 완성한 다음 완전히 굳기 전에 새기고 나서 자기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며, 이미 구워낸 도기에 이처럼 섬세한 곡선을 새겨넣는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홍도관과 글자'는 함께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이 홍도관은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가 낮고 묵직해 일반적인 그런 맑고 듣기 좋은 소리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장기간 흙속에 매장돼 습기를 받았기 때문이며, 사용한 도토는 곧 강 근처의 토질이다”고 표명했다. 이 두 가지 견해 또한 홍도관이 장기간 지하에 묻혀 있었던 것과 은상 도성의 위치 및 실제정황이 모두 완전히 부합한다.

이밖에, 갑골문이 발견된 연대가 1899년이므로 그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문자를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자연히 위각(偽刻)이 나타나기는 불가능하므로, 홍도관의 소성연대가 1899년보다 더 이르다는 것이 증명되기만 하면 홍도관 상의 갑골문의 진실성은 실증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홍도관 소장자인 조 선생은 중국 고문자학자인 중산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선진의 '열석광검측'을 진행, 홍도관의 연대를 판단키로 결정했다.

◇검측으로 정신(正身)이 증명된 은나라 유물

2008년 3월 조 선생 등은 홍콩의 고동감정유한공사(古董鑑定有限公司), 중과연발유한공사(中科研發有限公司), 성대전업고문유한공사(城大專業顧問有限公司) 및 중국상해박물관 문물보호 고고과학실험실에 열석광검측을 신청했다. 홍도관의 안전을 고려해 한국에 방문해 시료채취(샘플링)하는 조건이었는데 결과는 오직 성대(城大)만이 받아들여 그 책임자인 량보류(梁寶鎏) 박사가 4월15일 방한했다. 이와 동시에 조 선생 등은 또한 상해박물관 하군정(夏君定)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홍도관 분말을 칼로 긁어내어 국제우편으로 상해박물관에 보내 검측을 진행했다.

2008년 4월23일 홍콩 성대(城大)의 검측보고가 나왔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465년이었다. 이는 홍도관이 옛 물건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이어 바로 며칠 뒤 4월25일에 상해박물관 또한 검측결과를 제출했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미만이고, 또 홍도관은 모방제작한 모조품이라 말했으니 양가(兩家)의 감정결과가 1000년 이상 차이가 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해 전자우편으로 연락, 상해박물관은 제2차검측 및 하군정을 파견키로 결정한다. 그는 2009년 12월14일에 친히 한국을 방문해 직접 시료채취를 했는데, 22일자 발표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이고 오차는 ±100년이었다. 이러한 검측결과는 비록 홍도관이 진정한 옛 물건임을 실증하는 것이었지만 검측연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신복(信服)케 하기 어려운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유감을 풀 길이 없어 조 선생 등은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에 요청, 최종 검측을 진행키로 결정한다.

2012년 2월26일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는 요원들을 한국에 파견, 시료를 채취했다. 3월8일자로 발표된 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700~2700년 전이었다. 홍도관은 출토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비로소 열석광검측을 진행했고 더욱이 출토 후 뜨거운 햇빛을 받고 뜨거운 물로 세척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검측결과로 인해, 물건의 연대가 오직 감소할 수는 있지만 증가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지금에 이르렀음을 감안하면, 홍도관은 정신(正身)을 밝힌 것으로 응당 은상의 고물(古物)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문도 없게 된다.

◇역사적 가치 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무왕벌주(武王伐紂)', '목야(牧野)의 전쟁'은 우리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제신홍도관의 출토는, 고대도자발전사 발전과정을 명백히 나타냈다는 의의 외에 도관상의 갑골문 또한 은상시대 언어문자학 및 천문성상학 방면에 대한 천석(闡釋)을 갖추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인 의의는 상(商)과 주(周) 왕조가 서로 대항하는 균형성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기(史記)', '상서(尚書)'에 기술된 역사 내용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검증해줬다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돈으로 값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갑골문 전문가 박대종 전방(專訪), 평범치 않은 홍도관의 내력

박대종은 갑골문을 연구한 한국인이다. 그가 2005년 12월25일 처음으로 제신홍도관을 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거의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홍도관 바닥 부위에 새겨진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가 은상시대 복사 전문용어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것이 은나라의 유물임을 알고 놀랐다. 그가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지 15년간에 오직 보통의 점복 사건을 기재한 100여 건의 갑골문만을 접촉한 적이 있었을 뿐이고 이번 경우는 전연 그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홍도관은 현저하게 그 내력이 평범치 않았다. 갑골문을 연구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구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고 또한 만날 수는 있으나 구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의 손은 바야흐로 한 건의 완정한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3000년된 유물일 가능성을 붙잡고,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말 청천벽력 같았으며, 일순간 온 몸의 감각이 소름이 끼치고 전율했다고 한다.

3일이 경과해 자지도 쉬지도 않고 연구한 끝에 그는 홍도관 견부상의 60개 갑골문자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것은 상왕조 말엽 국가가 긴급사태에 직면해 황제가 별점을 쳐 점괘를 구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었다. 또한 그 새김 문자들 중에는 황제와 강적 라이벌의 이름이 명백하게 나와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이것이 상 왕조의 역사 사실을 완정하게 기술한 홍도관이며 이처럼 완정하게 보존된 세계 유일의 국보급 유물임을 인식했다.

2006년 2월 박대종은 제신홍도관의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뒤이어 수년 동안 그는 부단히 논문을 개진했고 외부의 질의들에 대해 일일이 해설해 지금은 의심을 품은 목소리가 갈수록 적어지게 됐으며, 홍도관의 신분은 점차 모두의 인정과 동의를 획득하게 됐다. 이 모두는 박대종의 공헌이며, 그 공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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