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시간과 공간의 중간에서 산다면.

작성일
2012-05-07 17:55
조회
5405

[제557화] 시간과 공간의 중간에서 산다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이제 제법 덥네요. 오늘 오후에는 아무래도 못 견디겠어서 에어컨을 켜봤습니다. 원래 더위라면 질색인 낭월인데 이거 아무래도 올 여름도 넘어가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그래도 달리 알래스카로 휴가를 떠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니 그냥저냥 적응을 하는 수 밖에요. 하하~


1. 시간의 의미


  요즘에 외서는, 자꾸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생각이 맴도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사주팔자도 시간에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점점 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가 봅니다. 지난 번에 대만의 서점에서 눈에 띄었던 책도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지도(時間地圖)』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찬찬히 읽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구입은 했습니다만 특별히 시간에 대한 책을 읽을 시간은 없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펼쳐 봤습니다. 일을 다 해놓고 죽으려면 죽을 시간도 없다는 어르신의 말씀이 문득 떠올라서 일들을 잊어버리고 그냥 책을 잡아본 것이지요.


  그런데 내용의 무게가 상당해서 번역이 된 책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검색을 해 봤습니다만 이미 서점에서는 절판이 되어서 구입을 할 방법이 없더군요. 그래서 논산의 도서관에서 찾아다가 비교하면서 보려고 구해 왔습니다. 번역이 된 책의 이름은 '시간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이었군요.



  아직 다 보진 않았습니다. 사실은 겨우 10여 장을 읽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마음만 들게 되는 군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늘 생각하던 시간에 대한 한 생각입니다.


2. 시간 속의 긴장감 "바빠! 바빠~!"


  외국인들이 한국사람을 보면 생각나는 첫 단어가 아마도 '바빠 바빠'일 것입니다. 중국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더군요. 이러한 말이 국민적인 언어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네요.


  정말로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한국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현대인이라고만 생각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 아무리 현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일지라도 중국인은 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벗님의 시간은 어떠신지요? 과연 큰 흐름이 이럴진대 개인적인 여유를 아무리 부려본들 그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긴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하루에 바쁘다는 말을 얼마나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바로 판단이 나올 것입니다. 물론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분주하다면 마찬가지가 되겠네요. 그렇게 바쁘다면 필시 시간에 쫒기고 있다는 것이 틀림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잊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나름대로의 시간에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점은 아마도 공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담실에서도 항상 느끼는 것이 방문자의 조급함입니다. 8년만 기다리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크게 성공을 할 기회가 주어지겠다고 하면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반면에 내년만 되면 하던 일이 크게 번창할 암시가 된다고 하면 그렇게 희색만면이 될 수가 없지요. 덕분에 고맙다는 말을 덤으로 얻게 됩니다. 낭월이 무슨 큰 선물이라도 준 것처럼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벗님도 공감을 하실 것이므로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 싶습니다. 다만 그렇게 살아서 과연 무슨 영화를 보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시자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달려 간 시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까요? 부귀영화일까요? 아니면 저승사자일까요?


  바쁘게 잠도 자지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카이스트에 들어간 수재가 적응을 못하고서 자살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슨 일이 생겼는지 전부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젊은 사람이 좌절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은 무리한 대입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3. 조바심은 죽음을 앞 당기겠지요.


 늙은이의 시계는 더 빠르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어려서의 시간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잘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장자에 대해서 생각을 할 여유만 있더라도 시간의 종이 되어서 허둥대는 것으로부터 조금은 여유를 얻게 될 수 있을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시간의 종이 되지 않는 것은 시간에 쫒기지 않고 살아갈 적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시간으로 부터 벗어나버리게 된다면 그때는 죽음이 될 것이므로 아마도 식물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또 원하는 바라고 하기 어렵겠습니다.


  네 살에 가르치면 너무 늦다고 생각하고 세살 짜리 유아를 교육원에 보내는 것부터 이미 시간의 노예로 만들어 가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에 1에서 100가지의 스피트를 갖고 있다면 너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도록 중간 쯤인 50에서 오락가락 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여하튼 산중에 살다가 보니까 조금은 시간으로부터 여유가 생기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하루 정도는 방바닥에서 리모콘과 뒹굴어도 조바심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백수의 하루와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여하튼 백수는 자신을 먹여살릴 방책이 없는 상태에서의 빈둥거림이므로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책 이름도 '느림의 미학'이라거나 '게으른 자가 깨닫는다'는 식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모두들 시간의 긴장감으로 심장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봐야 하겠습니다. 가난을 면하려고 허겁지겁 살아왔던 산업사회의 잔재가 여전히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늘 주변을 살펴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4. 공간의 의미


  시간을 생각하면 바로 뒤따라서 들어오는 녀석이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떼어 놓을래에 떼어 놓을 방법이 없네요. 그래서 또 공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거의 자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만 봐서는 액자에 그림을 담아 놓은 것 같습니다만 책입니다. 보시다시피 『공간지도(空間地圖)』입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간이 되었었군요.



  '공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대만에서는 이렇게 시리즈처럼 만들어서 진열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구입해서 읽을 수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절판이 된지 오래 된 책이니 말이지요.


  공간이야 이렇게 머물러 살아가는 곳인 줄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만, 공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지요.


  노자의 말씀에는 '금잔과 흙잔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었지 싶네요.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거나 도자기잔에 술을 따라 마시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같다는 투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간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5. 물질에 대한 집착


  같은 술을 마셔도 금잔에 마시는 것이 더 맛이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간에 구속이 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서 요즘 명품가방이나 시계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버랩되어서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군요. 가방은 소지품을 담아두는 것인데 500만원 짜리에 담아서 들고 다니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인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10만원 짜리 가방에도 얼마든지 담을 수가 있건만 그러한 가방을 들고 나서면 사람들이 얕잡아 볼까봐 불안한 것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공간의 개념으로 대입해야 할 것 같네요.


  물론 기능이 다른 것은 논외입니다. 작은 화면으로 보는 영화랑 대형 화면으로 보는 영화가 같다고 하는 것은 없는 자의 자기위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비싸긴 하지만 발이 편해서 하루 종일 걸어다녀도 발이 피곤하지 않은 비싼 신발과 십리만 걸어도 발바닥이 부르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집은 어떤가요? 10억짜리 집에서 사는 것과 1억짜리 집에서 사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집이라는 공간이 휴식하고 충전하는 곳이라는 점에 대해서만 비중을 둔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기준이 잡힐 수도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조립식 법당과 골기와의 목조 법당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기도를 하는 의미에서는 같은데 어떤 사람은 안에서 기도하는 공간이 주어졌음을 감사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겉의 모양에 마음을 기울여서 천막 법당에서는 기도를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낭월에게도 자꾸만 법당을 지으라고 하겠지요. 법당의 의미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전시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노자의 금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노자의 말씀이 귓구멍에 들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공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말도 할 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주를 보지 않아도 말뽄새만 딱 보면 바로 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네요. 아마도 나이를 먹어가는 흔적이 이러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가끔은 해 봅니다.


6. 시공(時空)의 조화(調和)


  아마도, 저 두 권의 책을 읽어봐야 하겠지만 만약 낭월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면 시간과 공간의 중간에서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시간이 흐르는 그 가운데에서 치우침이 없이 살아가고, 공간이 머무는 그 가운데에서도 치우침이 없이 살아가면 그것을 일러서 도인(道人)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삶이 되겠지요.


 



  이렇게 나타내 봅니다. 줄을 직선으로 긋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솜씨가 없기도 한 탓이지만 시간이나 공간이 그렇게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다소 의도적으로 구불구불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가로의 공간(空間) 선은 공간에 대한 집착으로 생각을 해 볼 수 잇을 것입니다. 왼쪽으로 갈수록 무욕(無慾)으로 흐르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탐욕(貪慾)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 중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이 있어서 없는 이에게 베풀어 주면 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잘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문득 예전에 상담을 했던 사람이 생각나네요. 자신은 많이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100억원만 모으면 90억은 사회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자신은 10억만 갖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노력을 해 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오른쪽 끝에 쯤 가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세로의 시간(時間) 선에서 맨 꼭대기 쯤에 있는 사람은 잠을 자면서도 다음 날의 일정을 세울 사람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물론 맨 아래 쪽에 있는 사람은 거의 식물인간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부처의 가운데 도막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 부근이 우리가 찾아야 할 장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떠나서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삶을 유지할 것인지를 모르겠고, 공간을 떠나서는 어떻게 자신의 한 몸이 지탱할 수가 있을 것인지도 알 수가 없어서 과연 그러한 것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 의미를 알려주셔서 이 무딘 눈꺼풀을 벗겨준다면 공손히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시공의 사이에서 조화(調和)를 얻을 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자유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일을 할 적에는 열심히 몰입해서 하고, 휴식을 취할 적에는 일이고 내일이고 다 잊어버리고 놀이에 몰입할 수가 있다면 아마도 조화를 얻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7. 음양으로 균형을 이루기


  산다는 것이 뭐 별 것 있느냐고 하는데 가끔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음이면서도 양이고, 양이면서도 음에 해당하는 그 언저리에서 자유롭게 머물 수가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잘 사는 것이겠거니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되니 말이지요. 물론 낭월도 순간순간 시간에 끄달리고 공간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여하튼 당분간 이 생각에 휩싸여서 시간을 잊고 생각에 빠져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심증은 갑니다만 그래도 확실하게 체득을 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될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이렇게나마 생각을 하면서 시공을 잊을 수가 있는 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또 한없이 행복하네요. 혹시 이것을 시공초월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과거와 미래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시간의 노예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을 그대로 인식하고 즐기지 못하면 물질의 노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순간순간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전체로 사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사주를 이해한다는 것도, 용신을 찾아서 균형을 살피는 것도 모두가 이렇게 시공의 중간에서 막대기를 들고 줄의 한 가운데에 우뚝하게 버티고 서서 삶을 관조하는 외줄타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타고난 시간의 소산인 사주팔자를, 공간의 현실인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만 가장 행복한 자신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 말이지요.


  줄을 타고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잡아당기고,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면 이번에는 왼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중심을 잃고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말고,
  조심조심 걸어가노라면 해탈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줍잖은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뭔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보실 힌트를 드렸다면 다행입니다. 모쪼록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시는 시간이셨으면....... 합니다.


                 2012년 5월 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