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선(線)과 면(面)의 음양적 관법

작성일
2012-04-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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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5화] 선(線)과 면(面)의 음양적 관법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오늘 화인이 점심을 먹고 논산 전화국에 갔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국에서 광케이블을 설치해 달라고 하도 청원이 들어와서 실사를 나왔다고 하기에 뭔가 변화가 생기나보다 했는데 설치를 해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면서 서류를 만들게 나오라고 했다는군요. 이렇게 되면 산골에서도 인터넷방송을 꿈꿔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벌써 인터넷방송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책을 주문해 놓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일정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부하는 강의실을 만들어 본다면 그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말이지요. 물론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만 동영상서버도 있고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조금 이해를 한다면 시험방송(!)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삼명방송이라는 말이 비로소 앉은 자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화인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차 한 잔 마시면서 케이블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선에 대해서 한 생각이 일어나서 중언부언 적어보고자 합니다. 말이 될지 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읽어보시고 나면 거짓말을 하고 뺨을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하하~


 


1. 선(線)의 음양(陰陽)


  우선 음양으로 시작합니다. 선을 시간에다 연결시키고 면을 공간에다 연결시켜놓고 생각해 보니까 시간은 양이고 공간은 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선은 양으로 보고 면은 음으로 대입을 할 수 있겠습니다.


  금휘에게 선과 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점을 이으면 선이고 선을 이으면 면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답을 하네요. 그야말로 수학적인 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답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또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차 한 잔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 금휘도 꽤나 흥미있어 하거든요.


  선에는 속도가 붙습니다. 도로도 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로에서는 속도가 따라붙게 되지요. 1차선, 2차선에 따라서 주어진 속도가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선에는 속도가 붙어있고 속도란 1초에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시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광케이블(VDSL)도 또한 틀림없는 선이네요. 그래서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는 것에 의해서 선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게 되는 것이겠습니다. 물론 전파도 모두 선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선의 끝에는 또 면이 붙어있습니다. 어찌보면 선이란 면과 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면이 없는 선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직장에서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뭔까 쓸모가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직장이 없는 상태의 시간은 그야말로 빈둥빈둥이 될 수 있는 것일테니 말이지요.


  문득 뜨게질로 만드는 옷이 생각나네요. 하나의 털실을 끊임없이 엮어서 옷이 만들어지는데 그 것은 선이 모여서 면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면은 저장의 의미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결이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분명히 선은 시간에 가까우면서 양적인 성분이라고 하겠고 반대로 면은 공간에 가까우면서 음적인 성분이 많다고 이해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합의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낭월의 생각에 동의를 하셨다면 의견에 대해서 일치를 본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2. 선적인 사람과 면적인 사람


  사실 낭월이 해보고 싶은 생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를 풀어가기 전에 벗님께 먼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잠시 사유를 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선적(線的)생각과 면적(面的)생각이 있다고 했을 적에 벗님의 생각은 어느 쪽에 가까우십니까?"


  이것이 낭월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하나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두 가지의 성향이 서로 어우러져서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어 가고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볼 것은 과반수라는 것입니다. 가령 6대 4라고 한다면 그 6을 차지하는 것이 선인가 아니면 면인가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선명하게 자신의 성향이 나타난다면 이해가 쉽겠습니다만 애매하다고 생각이 되신다면 5 대 5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어느 한 쪽으로 성향이 몰려있어야 하는 것은 흑백논리일 뿐이니까 말이지요. 여하튼 그렇게 판단을 하셨다면 이제 낭월의 분류법에 대해서 살펴보시면서 공감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서예와 그림의 선호도


  만약에 서예와 그림을 놓고서 어느 것이 좋으냐고 질문을 한다면 답변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선에 민감한 벗님은 서예의 긴장감을 즐긴다고 생각할 것이고 면에 민감한 벗님은 그림의 여유로움이 편안하다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분이 되시는지요?


  낭월은 절간에 살다 보니까 서예를 좀 배워놓으면 잘 써먹겠다는 생각으로 서예학원에 몇 번인가 등록을 했었더랬습니다. 그럼에도 3개월을 겨우 넘기고는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그만두곤 했지요. 그래서 마침내 성공하지 못한 일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아쉬움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까 낭월은 색깔에 민감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대상을 보게 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색감(色感)이거든요.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성향이 면(面)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예의 작품은 보기 싫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교를 해 보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4. 사진을 찍는 사람의 성향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들로 나가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뽑아서 벽에 걸어놓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어떤 성향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선과 면의 성향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봅니다.


  선을 선호하는 작가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선에 대해서 먼저 교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읽는데 불편하다고 생각되면 면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지워버리려고 시도를 하겠지요. 그러한 그림으로 떠오르는 것은 담쟁이 넝쿨을 찍은 흑백사진입니다. 그리고 벽이 거슬리게 되면 과감하게 칼라를 지워버리고 흑백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그 작가의 선호하는 취향을 읽을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선을 선호한다고 해서 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하튼 선에 대해서 먼저 느낌이 꽂힌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한다면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면을 중시하는 사진가는 색감에 민감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컬러사진으로 작업을 하게 될 것이고 그의 사진에는 색상적인 요소가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낭월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소니알파900인데 이 카메라의 장점이 바로 풍부하고 화려한 색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 맘에 들었는데 그것이 알고보니 자신의 선호도였던 셈이지요.


  예전에 사진수업을 받을 적에 일우 선생이 항상 낭월의 사진을 보면서 한숨을 쉬셨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일우 선생은 면의 지루한 설명보다는 선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각자 너무나 강한 개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5. 선(禪)과 경(經)의 선택


  선객(禪客)은 직관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시간만 존재하고 공간은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상태라고 이해를 해 봅니다. 그래서 길게 설명을 하게 되면 하품을 할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을 선(線)으로 이해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리가 같은 선이라서가 아니라 의미하는 바도 역시 같은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經典)에는 긴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너무나 자상하고 친절하지요. 그래서 우둔한 사람도 반복적으로 이해를 하면서 깨달음으로 향해서 한 걸음씩 발전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낭월의 글을 보신 벗님은 잘 아시겠지만 역시 설명하는 스타일입니다. 이러한 것이 직관을 중시하는 독자에게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지요.


  선(線)적인 성향의 독자는 긴 말이 지루합니다. 그래서 시집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다. 면(面)적인 낭월은 시집에 대해서 큰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 있는 것도 같거든요. 이야기에 대해서는 흥미가 동하는데 시집과 같은 형태는 자신의 이야기만 강요하고 있는 것 같더란 말이지요.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이겠습니다만 독자를 배려하기 보다는 나를 따라 오라고 강제로 견인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읽다가 덮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6. 글과 문장의 이해


  낭월은 문장을 비교적 잘 만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에 민감한 성향은 문장보다는 글자에 민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면적인 관점으로 선적인 성향을 바라다 본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셔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배려하는 것도 사실은 면적인 성향의 표현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지요. 참 어쩔 수가 없는 제 버릇입니다. 개를 줘 버릴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하~


  화인은 글을 잘 뜯어냅니다. 그래서 교정을 보는데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낭월은 문장을 만들어 놓고는 손을 대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봐도 잘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화인은 문장을 보기 보다는 글을 보기 때문에 글의 오류를 읽는데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하는가 보네요.


7. 사주의 관점과 운의 관점


  이제 사주이야기도 해 보지요. 원국의 여덟 글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것은 면이라고 한다면 시간의 의미로 대입이 되는 대운이나 세운은 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선에 민감한 철학자는 운에 따라서 성패(成敗)의 관건에 비중을 두고 추명(推命)을 하게 될 것이고 결과는 명료하게 느껴질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낭월은 그러한 것보다는 원국의 상황에 더욱 관심이 많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바탕에 관심을 두는 것도 어찌 생각을 해 보면 선이 아니라 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면에서는 정보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간단명료하게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가 봅니다. 지금도 '운세성패(運勢成敗)'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원국의 상황을 놓고 대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대략 이 정도의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이제 벗님의 성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기준을 삼을 힌트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향을 얼른 파악한 다음에 그것을 살리거나 혹은 고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낭월의 소견으로는 잘하는 것을 살리는 것이 못하는 것을 고치는 것에 비해서 훨씬 효과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인터넷의 선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또 여러 가지의 생각들을 하면서 궁리하는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생각의 조각들은 선이지만 이것을 묶어서 적어놓으니 또 면이 되었네요. 그래서 선은 원동력이 된다고 하면 면은 자산(資産)이 되고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삶의 여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하루 해가 저물어서 어둠이 산곡을 덮어버리는 시간입니다. 모쪼록 깊은 사유와 명상 속에서 많은 깨달음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2012년 4월 23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