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선악(善惡)이란 말이 없었다기에

작성일
2011-10-24 09:0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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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선악(善惡)이란 말이 없었다기에.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오늘도 늦가을의 비가 촉촉하게 내립니다. 오동잎이 떨어지라고 내리는 빈가 싶기도 합니다. 낭월이야 비를 피할 지붕이 있으니 걱정은 덜 됩니다만 들짐승들은 어떻게 밤을 지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어제 저녁에 마지막으로 잠자기 전에 잠시 TV를 켰더니 오랜만에 도올 선생님이 등장을 하셨네요. 교육방송 3번에서 그 특유의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중용(中庸)을 강의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려던 생각을 바꿔서 귀한 강의에 동참을 하기로 했지요. 도올 선생님의 강의는 동서고금과 각종종교를 무비자로 넘나드시는 능력이 탁월하시잖아요.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맹자와 순자를 넘나들면서 열강을 하시는 바람에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데 뭔가 머리에서 '딱!'하고 걸리는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악설은 성오설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한자로는 모두 같은 '性惡說'입니다만 '惡'자를 악으로 읽으면 흉악한 의미가 되고, 오로 읽으면 미워한다는 뜻이 됩니다. 어차피 좋은 뜻은 아닙니다만 강약과 농도의 차이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포악(暴惡)으로 사용하면 악이 되고, 증오(憎惡)로 사용하면 오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낭월의 머리에서 걸린 것은 순자(荀子)의 시대에는 선악(善惡)이라는 글자의 조합 자체가 없었다고 하신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끙끙대면서 짊어지고 온 대만에서 구입한 중고사전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을 찾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이런 기분이 바로 '옳커니~! 잘 되었다~!'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단한 사전을 찾아보면 뭔가 자료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안에는 예전에 선악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뢰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잠을 자고, 아침에 부랴부랴 증거확인에 들어갔습니다. 열권짜리 사전 중에서 선악에 해당하는 글자를 찾으려면 2권을 찾아야 하겠다는 것은 善이 입구(口)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를 위해서 한한대자전과 함께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善惡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비교가 될 것 같습니다. (약간의 흥분감........ 이런 느낌을 아시려나요?)


1. 한한대자전과 중문대사전의 선악에 대한 설명



대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을 만큼의 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방법이 없으니까 도올 선생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증거로 삼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벗님도 알 수가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 대단한 중문대사전을 펼쳐보겠습니다.



역시 낭월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善惡에 대한 항목이 있으니 말이지요. 이제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하겠습니다. 비록 항목은 있다고 하더라도 출전의 근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또한 의문이 풀리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어디어디에서 그 말이 쓰였다는 근거를 적어놓았으니 '역시~!' 이 '대단한~!' 사전은  낭월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상세하게도 출처의 근거지를 잘 밝혀 놨네요. 그러니까 끙끙대면서 짊어지고 온 보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


2. 연대(年代)를 유추하라~!


일단 근거를 대려면 처음에 그 말을 사용한 사람보다 더 일찍 나온 문헌에 '善惡'이라는 두 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자의 생몰연대를 찾았습니다.


荀子 출생-사망 BC298~BC238 사상가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성악설(性惡說)


일단 연대가 나왔습니다. 참 옛날 사람이네요. 그리고 이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전국시대의 말기라고 되어 있으니 일단 짐작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춘추시대 이전의 문헌에 선악이라는 두 글자가 나와 있다면 도올 선생님은 이것을 모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사기.하본기]의 예가 나옵니다. 하(夏)는 BC2197~1766이니까 이 정도라면 적어도 최소한 1500년 이전이 될 것이므로 연대로는 확실하게 눌러버릴 수가 있겠습니다. 춘추시대에 나온 [춘추번로.오행오사]만으로도 충분히 감당이 되겠네요. 왜냐하면 춘추시대는 BC770~475에 있었던 것이니까 말이지요. 다만 [한서.오행지중]의 자료는 뒤지기 때문에 참고를 할 수가 없겠습니다.


3. 내친 김에 원문을 찾아서


한 번 실끝을 잡으면 또 파고 들어가는 것이 못말리는 낭월의 천성인 모양입니다. 이것만 찾아놓으니까 괜히 쓸데 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사전에 인용이 된 본문을 찾아서 중국의 사이트를 뒤졌습니다. 이거 참 일이 한정없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도올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공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먼저 사기의 하본기 편에 나온다는 대목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본기의 내용 중에 포동선악(布同善惡)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인용이잖아요? 그래서 과연 그런 말이 있는지 그래서 이 중문대사전을 믿어도 될 것인지가 궁금해 진 것이지요. 사전의 생명력은 무엇보다도 정확성에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렇게 조금 뒤지다가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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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第一通史:史記(11) 


作者﹕司馬遷


禹曰:“于,帝!慎乃在位,安爾止。輔德,天下大應。清意以昭待上帝命,天其重命用休。”帝曰:“籲,臣哉,臣哉!臣作朕股肱耳目。予欲左右有民,女輔之。余欲觀古人之象。日月星辰,作文綉服色,女明之。予欲聞六律五聲八音,來始滑,以出入五言,女聽。予即辟,女匡拂予。女無面諛。退而謗予。敬四輔臣。諸觽讒嬖臣,君德誠施皆清矣。”禹曰:“然。帝即不時,布同善惡則毋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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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전국시대 이전에도 '선악'이라는 글자의 조합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춘추번로에 대해서도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춘추번로에 있다는 '오행오사(五行五事)'라는 글귀 때문이지요. '오행'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 바로 전기에 감전이 되어버리듯이 온 몸이 빳빳해지는 낭월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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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董仲舒 (BC179 - 104)


春秋繁露、五行五事第六十四

王者與臣無禮,貌不肅敬,則木不曲直,而夏多暴風。
風者,木之氣也,其音角也,故應之以暴風。
王者言不從,則金不從革,而秋多霹靂。
霹靂者,金氣也,其音商也,故應之以霹靂。
王者視不明,則火不炎上,而秋多電。
電者,火氣也,其陰徵也,故應之以電。
王者聽不聰,則水不潤下,而春夏多暴雨。
雨者,水氣也,其音羽也,故應之以暴雨。
王者心不能容,則稼穡不成,而秋多雷。
雷者,土氣也,其音宮也。故應之以雷。
五事,一曰貌,二曰言,三曰視,四曰聽,五曰思。何謂也?
夫五事者,人之所受命於天也,而王者所修而治民也。故王者為民,治則不可以不明,準繩不可以不正。王者貌曰恭,恭者敬也。


言曰從,視曰明,明者知賢不肖,分明黑白也。
聽曰聰,聰者能聞事而審其意也。
思曰容,容者言無不容。恭作肅,從作乂,明作哲,聰作謀,容作聖。何謂也?
恭作肅,言王者誠能內有恭敬之姿,而天下莫不肅矣。
從作乂,言王者言可從,明正從行而天下治矣。
明作哲,哲者知也,王者明則賢者進,不肖者退,天下知善而勸之,知惡而恥之矣。
聰作謀,謀者謀事也,王者聰則聞事與臣下謀之,故事無失謀矣。
王者心寬大無不容,則聖能施設,事各得其宜也。
王者能敬,則肅,肅則春氣得,故肅者主春。春陽氣微,萬物柔易,移弱可化,於時陰氣為賊,故王者欽。欽不以議陰事,然後萬物遂生,而木可曲直也。春行秋政,則草木凋;行冬政,則雪;行夏政,則殺。春失政則。
王者能治,則義立,義立則秋氣得,故 者主秋。秋氣始殺,王者行小刑罰,民不犯則禮義成。於時陽氣為賊,故王者輔以官牧之事,然後萬物成熟。秋草木不榮華,秋行春政,則華;行夏政,則喬;行冬政,則落。秋失政,則春大風不解,雷不發聲。
王者能知,則知善惡,知善惡則夏氣得,故哲者主夏。夏陽氣始盛,萬物兆長,王者不搶明,則道不退塞。而夏至之後,大暑隆,萬物茂育懷任,王者恐明不知賢不肖,分明白黑。於時寒為賊,故王者輔以賞賜之事,然後夏草木不霜,火炎上也。夏行春政,則風;行秋政,則水;行冬政,則落。夏失政,則冬不凍冰,五谷不藏,大寒不解。
王者無失謀,然後冬氣得,故謀者主冬。冬陰氣始盛,草木必死,王者能聞事,審謀慮之,則不侵伐。不侵伐且殺,則死者不恨,生者不怨。冬日至之後,大寒降,萬物藏於下。於時暑為賊,故王者輔之以急斷之事,以水潤下也。冬行春政,則蒸;行夏政,則雷;行秋政,則旱。冬失政,則夏草木不實。五谷疾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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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동중서였군요. 내용이 좀 길기는 합니다만 분명히 그 내용에는 선악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일일이 풀이는 하지 않을 요량입니다. 참 쓸데 없는 일에 애쓴다고 생각이 되면서도 그 바람에 또 새로운 책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손해를 보진 않았다고 생각이 되네요. 이렇게 해서 도올 선생님이 잘못 알고 계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순자 이전에도 선악이라는 용어는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문서의 구석구석을 뒤져서 선악의 용도를 챙겨놓은 학자들의 노력과 열정에 또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대단한 분들이시네요. 이러한 노력이 또한 후학의 길잡이가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이렇게 시간을 투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 결론이 빠졌네요. 그러니까 순자의 性惡說은 성오설로 읽을 것이 아니라 '성악설'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서 선(善)의 상대가 되는 글자로는 악(惡)이 더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선과 악은 독립적으로 뜻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착하다', '모질다'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선량(善良)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량한 것이고, 악독(惡毒)하거나 악랄(惡辣)한  사람도 또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악독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오(惡)는 미워한다, 증오한다, 혐오한다 는 등의 용도로 쓰인다면 이것은 악은 선척적으로 상대적인 대상이 없이도 악독한 것이지만 오는 상대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혔을 적에 나타나는 일종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즉 본래는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일종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봤을 적에 아무래도 오(惡)로 이해하기 보다는 악(惡)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맛깔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낭월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악설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들어가서 생각을 해 보면, 선(善)한 사람은 선한 일에 반응을 보이고, 악(惡)한 사람은 악한 일에 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선한 환경에서 더욱 선해지고, 악한 사람은 악한 환경에서 더욱 악해지는 것이지요. 그 말은 선한 사람은 악한 환경에서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당연히 악한 사람은 선한 환경에서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 말은 결국 생겨난대로 살아간다는 말이라고 해야 하겠고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의 바탕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은 아무리 교화시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말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럼 교화를 포기해야 하느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99.99%의 사람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화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다만 0.01%의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소용없다는 것도 생각해 두자는 말씀입니다. 앗, 계산기 들고 근거를 묻지는 마시지요. 그냥 '아주 조금은....'이라는 뜻으로 드린 말씀을 갖고서 괜히 또 4500만명 나누기를 하실까봐 괜히 걱정스럽습니다. 스스로 어디에 반응을 하는지 생각해 보시면 될 겁니다.


불쌍하고 측은한 일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온다면선량한 것이고, 못된 놈이 활약하는 것을 보면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면 아무래도 악마가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신가요? 아마도 항상 그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희노애락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강연을 듣고 있었던 청중과 시청자들께서 성악설이라고 하면 틀리지 않을까 싶은 혼란을 겪을까봐 괜히 걱정을 해 보는 낭월입니다. 그래도 도올 선생님의 강의는 재미있습니다.


 


이제 이 정도로 하고 마무리를 하렵니다. 그만하면 재미있었으니 또 공부를 해야지요. 낭월은 이렇게 놀고 있답니다. 즐거우신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0월 2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