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 한문(漢文)과 중문(中文)

작성일
2011-06-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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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0화 한문(漢文)과 중문(中文)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장마가 뒤따른다고는 합니다만 오늘은 쨍쨍한 것이 아마도 비에 젖은 보릿짚을 말려서 밥 해먹으라는 하늘의 배려인가 싶습니다. 그 바람에 한 여름의 열기가 고스란히 덮치는 것 같습니다. 전기는 죽더라도 에어컨을 돌려놓고서 시원한 바람 속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어제는 어느 고객께서 삼명쇼핑몰에 책을 주문하면서 대만 책에 대해서 묻는 통화 내용을 옆에서 차 마시다가 듣게 되었습니다. 화인이 말하기를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요.’라고 하는 이야기에 낭월이 문득 한문과 중문에 대해서 구분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오후에 예고도 없이 방문하신 나그네께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가시고 다시 산중은 고요해진 가운데에서 그 생각이 들어서 간단하게나마 정리를 해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1. 한문(漢文)



우리가 생각하는 한문(漢文)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한자(漢字)로 된 문서(文書)’라고 이해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이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은 그 동안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가 있었던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책으로 논한다면 《명심보감(明心寶鑑)》, 《논어(論語)》, 《장자(莊子)》, 《주역(周易)》이 모두 한문이겠네요. 물론 《적천수(滴天髓)》도 한문입니다.




2. 중문(中文)



이번에는 중문(中文)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대학에서도 중문과(中文科)가 있는 모양입니다. 중문(中文)을 설명한다면, ‘중국어(中國語)를 문자(文字)로 담은 문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중국어라고 하면 한어(漢語)가 되겠지요. 특별히 방언(方言)을 담은 책이 아니라면 보통은 표준어, 즉 보통어(普通語)로 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금용의 《의천도룡기》, 《녹정기》, 《소오강호》도 모두 중문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팔자시공현괘(八字時空玄卦)》나 《팔자명리신해(八字命理新解)》도 마찬가지로 중문으로 된 책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책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원서(原書)를 보고서 한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구분이 되는 것으로 봐야 하겠네요.


그러니까 요즘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책들은 한국어로 쓰여 지듯이 중국이나 대만에서도 요즘 나오는 책은 중문으로 만들어 진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누군가가 한문으로 글을 쓴다면 반갑게 읽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요. 한문을 배우기 위한 책이라면 몰라도 말이지요.


지나는 길에 영양가 없는 생각도 적어봅니다. 보통 소설가 금용(金庸)을 우리는 김용이라고 부릅니다만 한국의 김씨와 같은 글자라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김씨도 중국에 가면 금씨가 됩니다. 중국인에게 김선생은 찐(jin)선생이거든요. 그런데 금용을 김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식으로 보는 것은 그만이지만 중국 사람은 못알아 들을 것 같네요. 그래서 낭월의 생각으로는 금용이라고 불러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일없이 해 봤습니다. 하하~




3. 백화문(白話文)



예전에는 백화문이라는 말을 들어 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풀어서 말하면, ‘구어체(口語體)로 이뤄진 문서(文書)’라는 뜻으로 풀어보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의 중문과 백화문은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어느 사이에 백화문이라는 말이 사라진 곳에 중문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4. 한자와 한글의 관계(關係)



우리는 한글로 글을 씁니다만 그 속에서는 많은 한자가 음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을 표기한 것이 많습니다. 순 우리말로 이루진 문장(文章)이 아니라면 대부분(大部分) 한자(漢字)가 그 속에 끼여 있기 마련이지요. 이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한문(漢文)과 중문(中文)을 이해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게나 큰 차이가 나겠느냐는 생각이 드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서 한국에 중국어를 가르치러 온 사람들에게 한문책을 보여주면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공부하지 않아서 모른다는 것이지요. 물론 박식(博識)한 선생도 있어서 잘 해독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그러한 사람들은 가끔 있다는 것이지요. 어려서 서당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명심보감을 한자로 된 것은 읽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문은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잘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5. 한문(漢文)을 알아도 중문(中文)은 어렵다.



낭월이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고서(古書)를 많이 읽으신 학자들께서도 중문으로 된 책을 만나게 되면 한동안은 혼란스러워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낭월도 절에서 한문(漢文)으로 된 것을 몇 년 배워서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하건충(何建忠) 선생의 《팔자심리추명학(八字心理推命學)》을 읽으면서 한참 애를 먹었거든요. 그 당시 만해도 중문이라는 말보다는 백화문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글자로 봐서는 뻔한데, 풀이를 해보면 말이 되어야 말이지요.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대략 60~70%는 해석이 됩니다만 넘어가기는 해도 께름칙한 느낌이 남아있으니 그야말로 ‘밥 먹고 양치하지 않은 느낌’인 겁니다. 중국어를 배워보고 나서야 확실하게 알아서 명료한 해석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자께서 어떤 책을 구입하면서 한문으로 되었느냐고 할 경우에는 내용에 따라서 한문이라고 하거나 중문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화인에게 해 줬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지가 또 걱정이라는 군요.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것도 또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6. 고서(古書)와 신서(新書)



중국 책이라도 초판이 100년 전에 나온 책이라면 한문(漢文)으로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시기가 짧아진다면 과도기의 글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치 개화기에 사용된 한글과 같은 느낌일 것이라고 짐작만 해 봅니다. 아무래도 요즘 문체에 익숙한 독해력으로는 읽기가 좀 어렵지요? 중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대(唐代)나 송대(宋代) 혹은 청대(淸代)라고 하더라도 말기 이전이라고 한다면 한문으로 기록이 되었을 것이므로 그대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만 민국(民國)이후에 나온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참고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7. 고서(古書)는 자전(字典)



고인의 향기를 느껴보기 위해서 고서를 읽으시고자 한다면 옥편이나 자전이 있으면 됩니다. 가능하면 옥편(玉篇)의 진화(進化)버전인 자전을 권하지요. 엄청나게 오래 된 한대(漢代)의 서적이 아니라면 자전으로 보는 것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사실 옥편은 조선시대에 휴대용으로나 사용하면 딱 좋을 책이지요. 이 시대에도 옥편을 펼치고 글자를 찾고 있다면 아무래도 남들보다 3년은 뒤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만큼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지금은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는 시대입니다. 노트북도 느리고 불편하다고 해서 뒤로 밀려나는 시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에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옥편을 손에 쥐고 있다면 심각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법은 열정의 다음으로 중요한 공부의 요소가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다면 괜한 걱정을 한 셈이네요.




8. 신서(新書)는 중한사전(中韓辭典)



가끔은 중한사전과 한자사전의 책 이름에 혼동을 하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한자사전(漢字辭典)은 자전(字典)의 다른 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즘 나온 책을 보기 위해서는 중국어사전(中國語辭典)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두지 않으면 또 고생을 할 수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모처럼 큰마음을 내어서 곽목량 선생의 《팔자신기묘괘(八字神機妙卦)》를 샀다면 필이 중한사전을 한 권 구입하시라는 당부를 드리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으로 인해서입니다. 또는 고서(古書)에 주해(註解)를 한 책을 구입했다면 이번에는 자전과 중한사전을 같이 놓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9. 시간(時間)의 효율성(效率性).



낭월은 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만큼 알뜰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데 고속열차와 완행열차가 있다면 벗님은 어느 교통편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제외합니다. 어떤 일을 보기 위해서 출장을 간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이 선택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만약에 정재(正財)의 성향이 강한 경우에는 교통비(交通費)를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편재(偏財)의 성향이 강한 경우에는 소요되는 시간을 먼저 생각하겠네요. 물론 낭월은 시간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경비가 따리주지 못한다면 어쩔 수가 없이 완행을 이용해야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다음에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선택이 옳은지는 여러 가지의 경우에 해당하는 수가 있을 것이므로 한 마디로 단언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사람마다 스타일이 있어서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나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시간에 신경을 쓰냐고 한다면 바로 주어진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방문한 사람 중에서도 한 이야기를 또 하게 만들면 잘라버립니다. 그것은 피차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상담실에서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간단해질수록 좋아합니다. 가장 짧은 상담시간은 6분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5시간을 달려서 찾아온 방문자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묻고 답을 얻는데 걸린 시간으로 6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생각해서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1년이 걸렸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낭월은 답을 얻었다고 하면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방문객은 ‘그래도 멀리서 왔는데......’라는 소위 본전생각이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거든요. 물론 이해하지요. 그래서 상담시간을 얼마나 주느냐고 하면 궁금한 것은 다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래봐야 결국은 20~30분을 넘기기는 어렵겠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어제는 더 대단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과 아들을 보기 위해서 전화로 상담을 의뢰했는데, 5분이나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야말로 순식간에 답을 얻고는 잘 알았다고 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이 풀렸으니 더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 물었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다른 가족들을 의뢰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기는 합니다.


물론 간혹 한 시간을 이야기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들어줄 때도 있지요. 왜냐하면 그 방문자의 질문 속에서는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질 때도 있기는 합니다. 사전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튀어 간 느낌이 있네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보낸 시간이 허비한 것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싶은 염려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낭월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한담으로 글을 쓰고 있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낭월의 글 쓰는 시간으로 인해서 벗님이 읽으면서 공부의 방법을 터득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시간(時間)은 유형(有形)의 자산(資産)입니다. 결코 공기처럼 무형(無形)의 자산이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산책을 나가면서도 이면지와 네임펜을 챙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생각이 떠오른 것을 지금 메모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물론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이기도 하고요. 벗님의 시간 관리는 어떠신지요?


혹시라도 한문이나 중문을 공부하시는 벗님이시라면 약간이나마 참고가 되실까 싶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 봤습니다. 모쪼록 알찬 나날을 투자하셔서 지혜로운 성취가 있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6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