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대운(大運)의 실체(實體)

작성일
2010-08-20 07:33
조회
8544

 


[제486화] (아직은 이론적으로) 대운(大運)의 실체(實體)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요즘은 눈만 뜨면 포트에 전원(電源)을 켜는 것이 맨 처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차(茶)를 한 잔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習慣)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보이차(普洱茶)의 맛이 조금씩 느껴지니까 녹차(綠茶)는 왠지 싱겁고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자꾸만 손에서 멀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날도 더운데 일없는 낭월이 대운에 대해서 한 생각을 일으켰습니다. 읽으시는 벗님께서 어떤 혼란에 빠지더라도 낭월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을 우선 참고하시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겠다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나중에 보다 확실하게 판단이 된다면 그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제안하는 것은 함께 생각을 해 보셔도 좋겠다는 의견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난 한담을 뒤적여 보니까 2006년도에 쓴 [336화]에서도 대운에 대해서 뭔가 물어 뜯을 만한 구석이 없을까 싶어서 긁어본 흔적이 있네요. 그때의 생각을 조금 더 굳히게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간을 위주로 대운을 살펴보고자 했던 시도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흔적이 남아있어서 살펴보니까 그 당시의 생각들을 비교해 볼 수가 있어서 좋네요. 함께 참고하셔도 되겠습니다.


 


  1. 대운(大運)은 과연 실재(實在)하는가?


  아무래도 강호(江湖)의 학자(學者)들께 호된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한쪽에서 자꾸만 글을 쓰지 말라고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의 초기(初期)부터 존재(存在)했던 10년의 대운을 감히 의심(疑心)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네요.


  그렇지만 낭월한담(朗月閑談)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느낀 점을 술회(述懷)하고자 합니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여러 이유(理由)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대운을 연구하고 대입하는 과정에서는 흥(興)이 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요인(要因)으로 작용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주(四柱)를 연구하거나 간지(干支)를 분석(分析)할 적에는 그렇게 신이 납니다. 그리고 십성(十星)을 궁리(窮理)하면 온 몸이 짜릿짜릿하거든요. 그런데 왠지 대운에 대해서는 흥도 나지 않고 실제로 상담을 하면서도 왠지 찝찝한 존재(存在)가 되어 깊은 궁리를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스스로 확신(確信)이 들지 않으니 연구를 해도 신명(神明)이 나지 않는가 싶습니다.


  세운(歲運)은 그래도 훨씬 낫습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풀이를 해도 남의 다리를 긁는 기분이 들지는 않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대운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서 종종 안개와 씨름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낭월이 우둔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벗님께서는 그런 기분을 느껴보신 적이 없으신지도 궁금해집니다. 어떠신가요?


  만약에 우리가 진리(眞理)를 탐구(探究)하고 있는 학자(學者)라고 한다면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는 내용을 또 전하고 전해서 이어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가끔은 생각을 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고 낭월을 유혹(誘惑)하고 있기에 이러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혹 스스로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행(多幸)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니까 말이지요.


  웬만하면 고인(古人)의 지혜(智慧)가 번득이는 대운의 발견(發見)이 위대(偉大)하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 동안은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털어버리고 또 털어버리다가 이제 더 털 것이 없으니까 그 화(禍)가 대운에 미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러다가는 급기야 사주도 없다고 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흐흐흐~  그렇게 되면 낭월은 자평(子平)의 학자(學者)가 아니라 마구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 마구니라는 말은 수행(修行)을 방해(妨害)하는 암흑(暗黑)의 고수(高手)를 말합니다. 불교의 용어(用語)일 것 같습니다.


  그럼 실제(實際)의 대입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고 이론적(理論的)으로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대운이라는 것이 생각을 하기에 따라서 좋다고 하기도 하고 나쁘다고 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임상(臨床)을 통해서 경험(經驗)하고 남은 일입니다. 이렇게 보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확신(確信)을 하기에는 뭔가 찜찜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2. 의심(疑心)의 고리를 붙잡고……


  우선 그 존재(存在)에 대해서 연구를 해 보기 위해서는 출신(出身)의 성분(性分)이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은 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월주(月柱)에서 순역(順逆)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의 초기(初期)에서부터 있어온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남(陽男)과 음녀(陰女)는 순행(順行)하고, 음남(陰男)과 양녀(陽女)는 역행(逆行)한다는 발상(發想)이 언뜻 생각해 보면 매우 합리적(合理的)이고 타당(妥當)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에도 어쩌면 함정(陷穽)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연(當然)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비판(批判)을 할 힘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것이 역행(逆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논리적(論理的)으로 본다면 황당(荒唐)하여 말도 되지 않는 이론(理論)이거든요. 간지(干支)가 반대(反對)로 흐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생각을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 낭월이 특별히 자작총명(自作聰明)으로 하는 생각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3. 역행(逆行)하는 이치(理致)는 없다.


    지구(地球)는 서(西)에서 동(東)으로 회전(回轉)하고, 그래서 태양(太陽)은 동에서 떠서 서로 넘어간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말을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는 벗어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갖고서 천동설(天動說)이니 지동설(地動說)이니 하면서 말을 할 필요도 없지요. 다들 알고서도 그냥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지(干支)도 자(子)에서 시작하여 해(亥)로 흘러갑니다. 세상(世上)의 만물(萬物)은 모두 생(生)에서 사(死)로 흘러갑니다. 생명(生命)이 없어 보이는 것은 멸(滅)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거꾸로 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평학(子平學)에서만 그것이 존재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긴, 십이운성(十二運星)도 역행(逆行)을 하는군요. 혹 대운의 순역(順逆)이 그곳에서 탄생(誕生)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원래 ‘역행(逆行)’이라는 말은 ‘진행(進行)을 거스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自然)의 이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가을이 된 다음에 여름이 온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자문자답(自問自答)입니다. 특히 음간(陰干)의 해에 태어난 남자는 역행을 한다는 것도 참 거시기 합니다. 물론 양간(陽干)의 해에 태어난 여성도 마찬가지겠네요.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물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태어나서 그렇다고는 합니다. 남자는 양년에 태어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연주(年柱)를 위주(爲主)로 해서 살피는 결과(結果)물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그 사람의 본성(本性)의 음양(陰陽)은 연간(年干)으로 논하지 않고 일간(日干)으로 논합니다. 이것도 뭔가 어색합니다.


  예전에 부산에서 살고 있는 어느 명리애호가께서 감로사에 방문을 해 주셨는데, 낭월이 평소에 의심하던 ‘연간순역설(年干順逆說)’을 확실하게 뒤집어 버리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생각이시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소개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미안합니다.


 그래서 대만의 어느 학자께서는 모든 사주의 대운을 순행(順行)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 책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약 500여 명식(命式)을 놓고서 순행(順行)으로 풀어놓은 노력(努力)을 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그 이야기도 또한 공감을 하지 못한 낭월이 채용(採用)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일견(一見) 그럴싸하기는 했습니다만 확- 당기는 무엇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 순행(順行)도 허상(虛像)이거늘(이론적으로)


  허상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실체(實體)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허깨비라고도 하지요. 불교에서는 이 몸도 허상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조금 다른 관점(觀點)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몸에 매달려서 수행(修行)을 게을리 하는 것을 경계(警戒)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분바르고 보약(補藥) 먹여가면서 매달려봐야 결국은 무너지고 말 몸이라지요?


  대운이 허상이라는 것은 이해(理解)가 되시는지요? 실제(實際)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놓고서 길운(吉運)이니 흉운(凶運)이니 하면서 방문자(訪問者)를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은 과연 잘하는 것인지 고민을 해 보셨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왜 허상인지는 설명을 조금 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운이 월주(月柱)에서 출발을 합니다. 순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역행(逆行)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선(于先)은 그럴싸합니다. 그렇지만 원국(原局)에서 보게 되면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요. 역운도 아니지만 순운도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낭월에게 증명(證明)을 하라고 하시면 스스로 생각을 해 보시고 믿거나 말거나 판단을 하시라는 말씀을 드릴 참입니다. 이것은 귀신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증명도 하기 어려운 것을 무책임(無責任)하게 토설(吐說)하면 되느냐고 호통을 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호통을 치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요구를 한다고 해도 답은 얻기 어렵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해서 증명이 되는 것이었다면 이미 지혜(智慧)로운 고인들께서 그대로 놔뒀을 리가 없지 않겠어요? 낭월은 그렇게 믿습니다.


  도대체 왜 허상이라고 하느냐? 그것이 중요(重要)하겠습니다. 실은 인위적(人爲的)으로 조작(造作)이 된 감이 상당히 많습니다. 월주(月柱)는 태어난 월주(月柱)만이 실체(實體)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순행(順行)을 하거나 역행을 한다는 말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의미가 있어 보이기도 하네요. 강제로 끌어다가 붙어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주는 연월일시(年月日時)의 간지(干支)로 작성(作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덧붙여서 뭔가 단서를 붙일 만한 근거(根據)가 부족(不足)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월주만 갖고 순역으로 대입(代入)하느냐고 반문(反問)을 한다면 답변을 할 학자(學者)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계절(季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낭월도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보를 양보(讓步)해서 순행(順行)으로만 대입을 해야지 무슨 계절이 역행을 하느냐?’고 말하는 눈 푸른 혜안종사(慧眼宗師)의 일갈(一喝)을 막을만한 방패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벗님은 이 경계(境界)에서 무슨 말로 답변(答辯)을 하고 도망치겠습니까? 참 난감(難堪)한 일입니다.


  혹시, 연주(年柱)로 대운을 잡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또 일주(日柱)로 대운을 잡으면 안 되나요? 아니면 시주(時柱)로 잡는 것은 어떨까요? 오히려 시주로 잡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이라고 우기면 그래도 계절이라고 변명(辨明)을 하는 것보다는 좀 나아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유일(唯一)하게 버티는 방패는 ‘그래도 실제(實際)로 확인(確認)이 되어 나타나니까요……’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사용할 정도로 확인은 되는 것일까요? 낭월을 고민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타나기만 명료(明瞭)하게 나타난다면 물론 그냥 일소(一笑)에 붙이고 마음 편안하게 사용을 하겠습니다.


  여하튼 순행이 왜 허상인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셨지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허상입니다. 원래의 그림 위에 무엇이라도 덧칠을 하면 그것은 가짜가 되어버립니다. 예전에 누군가 ‘어느 선생에게 상담을 하러 갔더니 대운도 적지 않고 풀이를 하더라.’는 말을 듣고서 학문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습니다만 요즘에는 전혀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학자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5.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슨 대안(代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휘저어 놓으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괜찮습니다. ‘낭월이 더위 먹었내벼~!’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하하~


  그런데 결론(結論)은 간단(簡單)합니다. 그것도 매우 간단하지요. 중국말로는 ‘헌젠단(很簡單)’입니다. 그냥 세운(歲運)으로만 대입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사람이 20년 후나 50년 후를 알면 뭘 할 것이냐는 생각을 해 보면 괜히 머리만 복잡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과히 어렵지 않거든요. 오늘 그것도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하고부터는 십년 후를 알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허상(虛像)으로 삶을 논하다가 보니까, 간지(干支)를 10년으로 묶어서 봐야 한다느니, 위는 3년 아래는 7년으로 봐야 한다느니, 각각 5년씩 대입을 해야 한다느니, 천간(天干)은 별 것이 아니고 지지(地支)에 비중(比重)을 두고 대입을 해야 한다느니, 간지는 한 세트기 때문에 나누면 안 된다느니…… 참으로 다양한 편법들이 거론(擧論)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신살(神殺)을 쳐 박아 놓고 사용하지 않으면 되듯이, 12운성을 문밖에 내어 놓고 쓰지 않으면 되듯이 대운에 대해서도 뭔가 결단(決斷)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오늘 아침에 차 한 잔 마시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6. 그렇다면 동지기준설도?


  예전에 동지를 기점으로 연주가 바뀌는 문제를 궁리하다가 미뤄뒀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밀어부치지 못한 것은 운의 대입에서 명료하게 나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이것에 대해서도 대운의 작용에 비중을 적게 두고 관찰을 하게 된다면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나네요.


  그야말로 여덟개의 글자만 놓고서 관찰을 한다면 연주의 변수에 따라서 부모에 대한 관점이 분명히 차이가 날 것이므로 확인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한 생각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다시 해당하는 기간 중에 태어나신 사주를 만나게 되면 확인작업에 들어가야 하겠네요.


  여하튼 이론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동지를 기점으로 연주를 세워야 할 것이니까 말이지요. 잘 하면 묵었던 숙제들이 해결 될 힌트를 얻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다시 눈가에서 광채가 발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자료가 있을 경우에는 대운의 대입을 통해서 길흉으로 판단하지 말고, 인간관계에서의 부모와 인연의 차이점을 살펴서 대입해 보시기를 권하겠습니다. 뭔가 찾아 보십시다.


           2010년 8월 20일 아침에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