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감자구이 이야기(옮김)

작성일
2009-02-1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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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감자구이 이야기(옮김)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아무리 바쁜 중에도 손에 잡히는 책이 있으면 몇 장은 훓어보면서 여유를 갖곤 합니다. 오늘도 손바닥만한 책이 하나 있길래 뒤적여보다가 문득 읽은 대목을 보면서 예전에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살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네요.


그리고 그 내용이 재미있어서 한 대목의 전문을 옮겨봅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구해서 보시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되네요. 어느 스님이 겨울 한 철을 오대산 상원사에서 기거하면서 겪은 이야기들과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그야말로 [선방한담]이라고 할 수 있을 내용인데 편안하게 산사의 고즈녁함에 동참을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방일기] 중에서 발췌함


 






13번째 이야기 식욕(食慾)의 배리(背理)



11월 23일


 



겨울철에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맛은 일미(逸味)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맛이 있다.



요 며칠 전부터의 일이다.


군불을 지핀 아궁이에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庫房)에서 감자를 몇되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넣고 재로 덮어 버린다.



저녁에 방선(放禪)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감자구이 담당 스님이 아궁이로 감자를 꺼내러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맛이다. 서너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시정도 좋아지니 여유가 생겨서다.



처음에는 화대(火臺)스님이 주동이 되어


몇몇 스님만 방선 후에 아궁이 앞에서 재미를 보았었는데


이제는 아예 뒷방에서 재미를 본다.



살림살이 책임자인 원주(院主)스님은


큰 방에서 자지 않고 별채에 있는 원주실에서 잔다.


그러기 때문에 뒷방의 감자구이가 가능하다.


 



규모가 커졌다.


공모자가 많으니 감자의 절취량도 많아야 한다.


감자껍질 뒤처리는 당번스님이 철저히 한다.



그러나 계량심(計量心)의 천재인 원주스님이


갑자가 없어지는 것을 오래도록 모를리 없다.



그렇다고 대중공사를 열어서


감자를 구워먹지 못하게 할 정도로 꽉 막힌 스님은 아니다.


그래서 고방문에는 문고리가 박아지고 자물통이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감자구이 공모자 가운데


못과 손톱깍기만 있으면 웬만한 자물통은 다 따는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의 재주를 미처 몰랐던 원주스님의 실책이었다.


 



아무 말 없이 감자 유출을 막기 위한 비상책을 강구하던 원주스님이


강릉을 다녀왔는데, 손에는 큼직한 번호 자물통이 들려 있었고


틀림없이 고방에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계속되었다.


그냘 감자구이 당번은 40대의 원두(園頭)스님인데


이 스님은 묘한 습성이 있는 분이다.



어느 절엘 가거나


절간 방에 문이 채워져 있으면 돌쩌귀를 뽑아버린다.



중이 감출 게 무엇이 있으며 도둑맞을 것은 무엇이 있느냐면서


중생의 업고와 무명을 가두어 놓은 것 같아


갑갑하다는 지론을 가진 스님이다.


 



원주스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잠갔던 고방문이


돌쩌귀째 뽑혀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스님은 언짢아서 우거지상을 지우질 못했지만


감자구이 동호인들의 희색은 만면하다. 원주스님의 판정패다.



그렇다고 판정패를 당하고


선선히 감자를 대중에게 내맡길 원주스님은 아니다.


와신상담의 며칠간 고심 끝에 묘책은 강구되었고


드디어 실천에 옮겨졌다.


 



주(主)부식의 원료가 감자 편중(偏重)이다.


잡곡과 감자의 비율이 6대4이던 점심이 4대 6으로 뒤바뀌고


잡곡과 감자가 비율이 반반이었던 저녁은 3대 7로 뒤었다.


부식도 매끼마다 감자국에다 감자나물이 올랐다.



대중이 항의를 하자 원주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감자 먹기가 얼마나 포원이 되었으면


그 부족한 밤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감자를 자시겠소.


스님들의 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감자 일변도의 메뉴를 짰을 뿐입니다.


일주일 내료 메뉴표를 고칠 것을 약속합니다.’


 



대중들은 틀림없이 감자에 질리고 말았다.


감자구이는 끝이 나고 동호인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인간 식성(食性)의 간사함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원주스님의 판정승이었다.


역시 살림꾼인 상원사 원주스님다운 책략이었다.



우리는 그 때부터 상원사 원주스님을


조계종 원주감으로는 제일인자라고 공인 해주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음극즉양생(陰極卽陽生)'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원주스님의 해결책은 결국 성공을 할 수 밖에 없었군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비잉 돌아서 번호잠을통까지 사 날랐던가 봅니다.


그리고 선원에서는 과연 온갖 재주를 가진 스님들이 많습니다. 밥이 질릴 때쯤이면 자장면공양을 제안하는 스님도 있었는데, 중국집을 운영하다가 치우고 입산을 했던 요리사였더군요. 그래서 맛있는 자장면을 먹을 수가 있었던 기억도 나네요.


불량배가 나타나면 무술을 연마하신 스님이 등장해서 해결을 하고, 다른 종교인이 들이닥쳐서 스님들을 골탕먹이려고 할 때에는 부친이 장로인 스님께서 나서서 호통을 쳐서 바로 도망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 시절에 아무런 근심이 없이 오로지 공부가 잘 되지 않고, 잠이 많은 것만 걱정하던 때가 있었네요.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엇그제의 일인 냥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젊어서의 경험은 나이들면서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는가 봅니다. 즐거우신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09년 2월 12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