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시간을 끊는 단시(斷時)

작성일
2008-04-1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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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시간을 끊는 단시(斷時)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싱그러운 봄 풍경이 산천을 아름답게 꾸미는 요즘이네요. 봄날의 풍경들이 긴 겨울을 보내면서 더욱 곱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수양버들의 고운 연두색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네요. 벗꽃이며, 매화며, 봄의 색을 담아 본다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카메라에서 셔터를 누르면서 시간을 끊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한자로 하게 되면 ‘단시(斷時)’가 되는 것인데, 단시라는 말은 점(占)이라는 글자가 뒤에 붙음으로 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른바 ‘단시점(斷時占)’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것들입니다. 들판으로 다니면서 몸은 바쁘지만 머릿속에서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올 봄의 화두(話頭)가 아닌가 싶습니다. 함께 생각을 해 보십시다. 시간을 끊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시간이 무엇인지 말이지요.


 


1. 명리학과 단시(斷時)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을 들어 보셨거나 해 보셨을 것입니다. 명리학을 공부하게 되는 이상은 시간에 대해서 인연이 없다고 못하겠네요. 당장에 공부를 하게 되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시간에 대한 계절의 흐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니 말입니다.


만세력(萬歲曆)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주를 작성하는 자체부터가 어려운 장면에 도달하게 때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철저하게 시간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자평명리학이라고 해야 하겠고, 어쩌면 동양철학의 전반적인 운명이라고 해도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고인들은 그렇게 시간과 운명의 고리를 느끼고 연구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 봅니다.


사주팔자는 시간에 의해서 길흉화복이 정해지므로 어제 고생하던 사람이 오늘은 부유해지고, 어제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 오늘은 무력하게 변하는 것이 모두 운명이라고 하겠지만 결국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타나는 하나의 정해진 현상이라고 이해를 했던 것으로 봐서 무리가 없겠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영욕(榮辱)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시간이 도대체 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낭월입니다. 항상 그렇게 말하지요. ‘때가 되면.....’이라고 말이지요. 때가 되면 물러나고, 나아가고 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 뒤를 수식하게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라는 것은 뭔가를 생각해 보니까 또한 틀림없는 시간(時間)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때의 사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2. 때의 사이, 시간(時間)


‘때’라는 것과 ‘그 사이’라는 것이 만나서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때의 사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면서 느낌이 드는 것은 ‘버스가 떠나고 나서 다음 버스가 오기 전’의 상황이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의 말만 봐서는 때는 나눌 수가 없고, 그 사이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때가 되면 버스는 오겠지만 그 사이가 얼마나 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10분마다 온다고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 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다음 버스가 얼마 후에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면 어디 가서 김밥이라도 한 줄 사 먹고 와서 기다리겠습니다만 그 사이에 버스가 와버리면 또 못 타게 되므로 그러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이제나 저제나’하면서 버스가 오는 방향만 보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공감이 되시지요?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에 책이라도 펴들고 독서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또 다음 버스가 올 것이므로 요기를 하고 오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 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이러한 것이 생각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바로 그 때의 사이가 도대체 무엇이냔 말이지요.


 


3. 시간이 없다는 것


‘시간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거나 듣게 됩니다. 그 말은 때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때의 사이가 없다는 말이라고 분해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때의 사이는 때와 때를 이어주는 공간이라고 이해를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틈이라고 해야 더 잘 어울릴 것도 같네요. 그 상황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 사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 봅니다.


낭월도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면 모든 시간은 강의에 써버리기 때문이지요. 즉 시간을 따로 낼 틈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간이라고 하는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다가 보면 점점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생각을 하는 자신도 사라지고, 그냥 때의 사이라고 하는 것만 커다랗게 구멍을 남기고 앞에 드러나 있는 것 같네요.


시간, 즉 ‘때와 때의 사이’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카메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카메라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시간이네요.


셔터를 누르는 시간이 나타나고, 사진을 찍어야 할 시간이 나타나고, 찍으면 안 되는 시간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놀이의 방향을 바꿔봐도 여전히 시간이라는 존재는 이마 한 중앙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네요. 때의 때의 사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그 시간이 주어진다면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삼각대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요즘에는 사물을 찾을 생각의 틈과 틈의 사이에서 스승을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4. 스승의 존재는 때를 줄여주는 것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스승은 바로 그 시간을 벌어주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것 말이지요. 혼자서 동분서주하고 헤매가면서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는 지혜로운 경험을 쌓은 스승에게 공부를 한 다음에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훨씬 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지요. 아마도 벗님의 생각에서도 이러한 경험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여기겠습니다.


요즘은 부산에 살고 계신다는 어느 사진쟁이를 한 번 뵙고 법을 청했으면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의 책을 한 권 봤더니 뭔가 만나서 잠시 시간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알갱이를 얻을 것만 같은 생각이 문들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동합니다만 문제의 그 시간이 없다는, 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잠시 옆길로 가서 지혜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다는 안타까움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스승을 찾아서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시간을 끊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겠고, 사실은 끊는 것이 아니고 원래 끊어진 시간의 틈새를 찾는다고 해야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을 끊고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예 24시간이 모두 내 시간인걸요~~!’라고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미 마음이 동했으니 그러한 틈의 사이는 나타날 것이고, 그 찬스를 포착하게 되면 바로 부산으로 날아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호시탐탐(虎視耽耽)’이네요. 하하~


 


5. 카메라의 셔터와 시간의 관계


어제 저녁에도 뒷산에 올라가서 셔터를 누르다가 이 화두에 빠져들었습니다. 셔터를 누를 적에는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 말은 때와 때의 사이가 바로 셔터를 누를 시간이라고 하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언뜻 생각을 해 보면 시간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데 어느 사이가 끊을 사이인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틈이 없어 보여도 찾는 자에게는 나온다네요. 그래서 카메라 화인더를 보면서 그 끊을 사이를 노리고 있는 것이지요. 가령 행인이 있다면 앞발을 들고 있을 적에 셔터를 누르면 모양이 이상해 진답니다. 뒷발을 들고 있을 적에 눌러도 이상하다는 것이지요. 절호의 순간은 바로 앞발을 들었다가 땅에 내려놓으려고 하는 그 순간이랍니다. 참 어렵지요?


그냥 퍽퍽 누르면 되는 셔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네요. 그러면서 자꾸만 ‘때의 사이’ 화두가 머리를 맴돌게 됩니다. 어느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그러한 순간을 1초만 미리 알 수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물스몰 기어나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1초 전에 그 때를 안다는 것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투자의 시기를 1일 미리 알고자 하는 것과 서로 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6. 운명의 셔터 단시(斷時)


사실 이것이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카메라를 앞에 놓고서 피사체를 바라다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운명의 셔터를 언제 눌러야 가장 멋진 그림이 나올까요? 이번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기로 셔터를 눌렀던 사람들은 모두 성공을 한 것일까요? 물론 당선이 된 사람은 성공을 했다고 생각 하겠습니다만 낙마를 한 사람은 모두 실패를 한 것일까요?


운명을 읽어서 그대로만 노력을 한다면 개선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이 당신은 탐욕으로 몸을 태우게 될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탐욕을 끊으라고 하는 말에 수긍을 하고 그렇게 한다면 변화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의 상담을 통해서 얻은 결론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인간의 노력이 있으면 운명의 개선이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말이 있음에도 구하고 결론은 ‘생긴대로 산다’라는 것이지요. 운명을 바꿀 수는 있지만 바꾸지는 못한다는 숙명론에 동의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결론이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질문을 할 적에 그 시간을 끊어보면 바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가 나타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있다는 것도 성립이 되는 셈입니다. 378화의 재미있는 팔자괘를 계속해서 임상하고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가는 것 같네요.


행인의 비유를 들었습니다만 앞발을 들었을 적에 질문을 하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뒷발을 들었을 적에 찾아와서 질문을 할 때는, 때가 지났다고 말하며, 앞발을 땅에 내려놓기 직전에 질문을 하면 비로소 ‘때가 되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가요? 모두 때가 오지 않았거나, 때가 지나간 다음에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셔터를 누를 찬스를 놓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7. 때란 반드시 그 때가 있다


제목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네요. 때란 때가 있다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이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뭔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돈을 벌 때가 있고, 공부를 할 때가 있으며 셔터를 누를 때가 있고, 놀이를 할 때가 있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그 때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은 때를 잘라보면 안다고 하겠네요.


때를 잘라 보는 것이 바로 단시(斷時)이고 단시점(斷時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질문을 한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크게 본다면 그 시간에 태어난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역학자(易學者)는 이러한 ‘때’를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내공을 쌓고 있는 수련가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크게 보니까 사주팔자를 타고 태어나는 그 순간도 단시(斷時)요, 지구가 생겨나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그 첫 순간에 이미 지구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한다면 또한 단시(斷時)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은 온통 시간의 질서 속에서 엮어가고 있는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며칠 전에는 다급하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끊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간지가 나타나네요. 물론 사주쟁이가 끊으면 그렇게 됩니다. 사진사가 끊으면 작품이 나타나겠고, 방사선과의 의사가 끊으면 뼈를 찍은 사진이 나타나겠네요.


丙辛己丙戊
申未卯辰子


이렇게 시간을 끊어놓고 보니까 사업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겠습니다. 재물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운명의 흐름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업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태어난 시간을 끊어 봤습니다.


壬辛己丙
辰卯亥辰


신금(辛金) 일간이 무력하니 월간(月干)의 기토(己土)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재물의 인연은 전생의 빚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겠고 말이지요. 일단 이러한 사람은 재물에 대해서는 꿈을 버려야 하지만 그것도 전생의 인연인지라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대운의 시간을 끊어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운을 살펴보게 되지요.


31대운 계묘(癸卯)의 계수(癸水)가 흐르는 시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용신이 힘을 못하는 시간인 것이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년운의 시간이라도 끊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올해는 무자년(戊子年)이 되고, 무토(戊土)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자수(子水)로 인해서 무력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 겉으로는 사업을 한다고 노력을 하지만 갈수록 수렁에 빠진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물론 방법은 또 있습니다. 이러한 점괘를 통해서 이 사람에게는 지장기도를 하면 일말의 회생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은 그야말로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노력은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노력의 이전에 이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단시(斷時)에서는 어느 것 하나 희망적으로 보이는, 즉 자신의 욕망을 이룰 암시는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과연 사람팔자는 시간문제라는 말이 헛 말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다시 시간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빠져들게 됩니다. 어쩌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7. 사진의 셔터와 운명의 단시


이렇게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는 셔터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같이 운명은 시간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큰 울타리 밖에서는 여전히 시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거대하게 자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리고 운명을 연구하는 학자는 그 시간을 들어다보고 읽는 방법을 연구하느라고 또 일생을 바쁘게 보내는 것이겠거니 합니다.


팔자괘를 임상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필이면 '그 날에 그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병자(丙子)일에 질문하는 사람, 경오(庚午)일에 질문을 하는 사람의 고민은 달라도 고통은 비슷하다는 일관성을 찾아 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오묘한 조화에 대해서 다시 경외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고정된 간지의 흐름이 아니라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역동하는 바다의 파도와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봅니다.


 


벗님의 학문 연구에 약간의 힌트가 되었으면 하고 모처럼 생각을 정리 해 봤습니다만 답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일생을 두고, 어쩌면 다생(多生)을 두고 찾아야 할 여행의 목표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네요. 열심히 정진하셔서 시간의 사이를 손아귀에 움켜쥐는 날이 있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여서, 한담이 올라오지 않으면, 아직도 그 고민에 빠져있는가 보다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주 올리지 못하는 맘에 죄송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2008년 4월 11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