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아는 만큼 보이는 만큼

작성일
2007-02-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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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아는 만큼 보이는 만큼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무척이나 분주했던 정해년(丁亥年)의 2월도 어느 덧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1일부터 어제까지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냈네요. 대만 나들이로 보름을 보내고, 《사주심리학① 기본편》을 교정하여 인쇄소에 맡기느라고 또 보름을 보냈습니다. 어제 저녁에서야 급한 일들을 마치고 모처럼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아침을 맞이하고 보니 뭔가 제법 큰일을 한 듯한 기분도 들기는 합니다. 그러고서야 한담도 보름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래서 마음을 일으켜 봅니다.




1.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그러한 경험을 늘 하게 됩니다. 큰 스님의 말씀에 ‘모르는 놈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고 하시기에, 어린 생각에 ‘그야 말을 해 주시기 싫으니까 하는 말씀이겠지······· 사람이 말로 하는데 왜 못 알아들어? 사람이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라면 자세하게 해 주기만 하면 못 알아들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벗님의 생각에는 어떠신지요? 낭월의 이 생각에 동의를 하시는지요? 아니면 고개를 가로로 저으시려는지요? 여하튼 그 두가지가 모두 정답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니까 상관은 없습니다.




한 분야에 상당히 긴 시간을 몰두해서 연구를 한 결과를 놓고 생각을 해 봅니다. 말을 한 마디 하는데 그 말이 깊은 의미가 들어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만 그 말의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로 본다면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생각을 할 만 하겠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지만 ‘아’와 ‘어’는 이미 같은 말이 아니지요? 속담이 잘 못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같은 말인 데에도 자신의 수준에 따라서 그 내용이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예전의 큰스님이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던 말이 이제 시간이 흘러가고 나니까 이해가 된다는 것으로 봐야 하겠네요.




늘 생각을 합니다만 요즘에 와서는 더욱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알려줘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요. 즉 지혜로운 선지식이 찾아와서 낭월에게 ‘인간아, 사주팔자는 다 소용없는 것이여, 한 마음에 있는 것이거든 알았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이 수긍이 될까요? 지금의 수준으로는 아무래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만 가득할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생각에는 사주팔자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그리 많지 안다는 것을 나름대로 적지 않은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을 그대로 수용할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아마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선지식이 찾아와서 ‘낭월아 사주팔자의 년주(年柱)의 변화에 따라서 부모의 형태를 읽는 것이거든~ 그래서 년간(年干)에 비겁(比劫)이 있으면 부친의 수명이 길지 못할 수가 있는 거야’라고 한다면 그 말은 귀에 쏘옥 들어오겠네요. 왜냐면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가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러한 설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도구로 사용해 보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과연 진리라고 하는 것을 늘 생각하는 낭월입니다.




2.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




이번에는 앞의 주제와 상반되는 듯한 말입니다. ‘보이는 만큼 안다’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서로 앞뒤가 바뀌어 나타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말은 모두 정답이라는 것도 함께 포함을 시켜야 하겠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것이므로 보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만큼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풍경이 그렇고, 사물의 미추(美醜)가 그렇지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심성(心性)까지는 알 수가 없다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인 미생물(微生物)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일반 사람들은 물이나 공기 속에 미생물이 있다고 인식을 하지 못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많은 샘플을 통해서 미생물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바글바글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고 인식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그만큼 간극(間隙)이 벌어지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골 노인에게 물을 한 숟가락 떠서는 미생물의 형태와 존재와 수량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 안에 있다고 한다면 필시 그 노인께서는 ‘고얀 놈, 노인네를 갖고 놀리고 있구만~!’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면 노인에게의 미생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으니 말이지요.




3. 보이는 것을 키우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




결론은 많이 보이도록 한다면 아는 만큼 보이게 되므로 점차로 시야가 넓어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보이는 것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된다고 해석을 한다면 앞의 두 명제에 대해서 적절한 결론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많이 보이도록 공부를 할 것인가에 포인트를 맞춰야 하겠는데, 그 방법은 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와 궁리를 통해서 확장시켜가는 방법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가끔 독자의 메일을 받아보면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절반도 이해를 못했는데, 반복해서 보게 되니까 점점 이해가 많이 되어서 지금은 거의 90%는 이해를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아직 다 안다고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다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아마도 낭월의 수준보다 더 높아야 다 알게 될 것이며, 최소한으로 보더라도 같은 수준은 되어야 설명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 모두를 이해하게 될 날이 당연히 오겠지요. 낭월만큼의 노력을 한다면 능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이번에 사주심리학을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낭월의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독자들을 만나겠지만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얼마나 되는 독자는 그 내용을 거의 모두 이해할 것이며, 또 얼마나 되는 독자는 더욱 혼란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지요. 분발을 하게 된다면 상당부분의 기본내용을 연마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또한 이해를 한 만큼의 평가를 내려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책은 다음 주쯤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야 동국대학교에서 강의교재로 사용을 할 수가 있겠기에 좀 서둘렀습니다.




4. 목격도존(目擊道存)




경봉노사님께서 늘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던 단어입니다. 목격도존이라는 말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지요. 그래서 의미하는 바는 능히 짐작을 합니다. 이것은 뜻으로 이해를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체감하는 것도 같을까요? 눈앞에 도가 있는 것은 능히 알겠는데, 그 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는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낭월이 사용할 적에는 ‘눈앞에 도가 있다고 하므로 열심히 찾아보자’는 것이 정답이겠습니다. 이번에 대만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진 선생님의 스승께서는 늘 ‘도재안전(道在眼前)’이라고 하셨답니다. 그 말이 그 말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이 사무쳐서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게 되는 경지를 맛보지 못하니 머리로만 분석한 것은 가슴에 전달하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도재안전(道在眼前)이든 목격도존(目擊道存)이든 결국 내가 그러한 경지를 느낄 수가 있으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벗님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선생이 하나의 상황을 놓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세 사람이 듣습니다. 낭월, 화인, 그리고 조성희 양이지요. 그런데 세 사람의 목격도존에 대한 이해도는 각기 다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자신의 귀를 통해서 들어온 이야기를 분해하여 정리하는 과정이 같을까요? 물론 그럴 수가 없겠다고 해야 정답이겠습니다. 일예로 성희 양의 화장품이 가방에 있다는 말을 했을 적에 낭월은 순간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사주구성에 의해서 단번에 해당 부분의 글자가 화려한 빛을 뿜으면서 도도하게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데 두 낭자는 왜 그러한 말이 나왔는지를 못 알아듣고서 열심히 말의 꼬리만 쫓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못 알아듣는 이유도 능히 짐작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로 합의를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호텔로 돌아와서 낭월이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이 알아 들을 수가 있는 어휘를 구사해서 아는 만큼을 이용한 설명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다 알아 듣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순간순간 진리를 발견하는 듯합니다.




5. 듣는 자의 수준




말을 한다는 것은 들으라고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듣는 자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어느 수준에 따라서 이해가 되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할 것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머리만 아프다고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생이 한 사람의 제자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사람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가장 못 알아듣는 사람의 수준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또한 말은 되겠습니다만, 이미 알아들은 사람은 지루할 것입니다. 지루하면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는 긴장이 된 상황에서 스파크가 ‘팍팍~!’ 튀는 가운데 진전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3월이 되면 또 동국대에서 제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한 명이 아니고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공부수준은 물론이고, 성별, 나이, 환경, 전공, 지혜의 정도가 모두 천차만별(千差萬別)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월은 그 들의 지혜를 높여놓기 위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과연 어느 수준에 놓고 설명을 해야 모두가 즐겁다고 할까요? 중간을 생각할까요? 아래를 생각할까요? 벗님이라면 어느 수준을 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시는지요? 여하튼 낭월은 그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두 같은 수업료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강의를 하는 선생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강의를 듣는 학생은 반응이 또 각각이겠지요. 어렵다. 쉽다. 지루하다. 재미있다는 등등의 반응이 나와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 모두를 만족시키는 강의는 가능할까요? 석가모니는 원음(圓音)을 사용해서 설법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법을 듣는 최상승의 아라한뿐만 아니라 사슴이나 토끼와 같은 동물들도 능히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양반입니다. 그렇지만 사슴이 이야기를 알아들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지는 낭월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6. 개인지도와 그룹지도




교육방법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인원을 모아놓고 그 모두가 아쉬움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강의를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말귀를 알아들을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전달(혹은 전수)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단 세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들음에도 서로의 공부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고 하면 많은 숫자일 경우에는 더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숫자의 강의는 그만큼 저렴한 것일까요? 각자의 형편에 의해서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면 반드시 개인적으로 전수를 주고받아야 할 영역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 넘은 공부가 된다면 그 다음에는 개인적으로 전수를 받고, 그 다음에는 면벽수련을 하여 비로소 완전한 달인(達人)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주공부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세상의 모든 분야에 이러한 논리는 그대로 대입이 될 것입니다.




7. 같은 한 마디의 값




여러 선생을 만나는 경험을 이번에 대만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선생의 한 마디 말을 듣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정할 수가 있겠다는 것이지요. 못 알아들으면 소음에 불과하고, 알아들으면 진리의 감로수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처음에 입문을 한 사람에게 지고무상의 진리를 알려준다면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으로 벌벌 떨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절정고수의 문턱에 있는 사람에게 스승의 손길이나 눈짓이 한번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엄청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혼자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단 하나의 의문을 풀지 못하고 많은 스승을 찾아서 수십 년을 헤매고 다니다가 어느 산골 암자에서 노화상을 만나 그의 일성(一聲)에 모든 의심이 다 해결되었을 적에 한 말씀의 가치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을 금전으로 환산한다면 수십억으로 감당을 할 수가 있을까요? 즉 아는 만큼, 준비한 만큼만 담을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의 감로수를 퍼부어줘도 자신의 그릇이 구멍이 나있다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뭔가 받기는 받았는데 뭘 받았는지 모르게 될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벗님의 공부 과정에서도 그러한 경험이 있으실 줄 압니다. 낭월도 늘 느끼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이러한 가치가 있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궁리해야 할 것인지는 더 말을 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그 동안의 많은 연구와 고민들을 한 방에 풀어주는 스승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러한 인연이 왔을 적에 놓치지 않는 지혜로움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회(機會)를 포착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낭월도 늘 연구하면서 쌓이는 의문덩어리를 코끝에 매달아두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밝은이를 한번 만나기만 하면 일 순간에 날려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글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젊은 시절의 석가’라고 하는 제목으로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답을 얻고자 숲에서 고행을 하는 그에게 진리의 소리가 울려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니라.”




이 말을 듣고 석가는 온 몸이 상쾌해짐을 느낍니다. 자신이 구하던 답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때의 한 마디 가치는 금전으로 환산일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찰귀를 발견합니다. 나찰귀는 사람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군요. 그가 그 말을 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물었습니다.




“좀 전에 한 말은 그대가 한 것이오?”


“뭔 말? 아마도 배가 고파서 헛소리를 한 모양이지.”


“뭘 먹으면 되겠소? 나머지 말을 듣고 싶소.”


“놀라지 마라. 나는 사람을 먹고 산다.”


“그야 내가 사람이니 어려울 일이 없구려.”


“우짤라꼬?”


“나머지 말을 들려주면 내가 저 나무에서 뛰어 내리겠소.”


“그러면?”


“당신은 나를 먹고 나는 당신의 그 말을 갖고 서로 만족하지요.”


“그럼 잘 들어봐라.”


“귀를 활짝 열었습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이 말에 석가는 삼매에 들어서 그 말의 뜻이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도록 버려뒀습니다. 한없는 기쁨이 온 몸을 감쌌지요. 그리고 나무와 돌에 그 글귀를 적어 뒀습니다.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궁금증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그 말을 보면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나무에 올라가서 뛰어 내렸다고 하네요. 그 다음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 저 글귀의 내용이요? 알려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답은 석가에게 필요한 것이지 우리 사주학자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하하~




벗님의 인연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두는 지혜로 도달하는 지름길이겠거니 하고 물러나지 않는 분발심을 가져 보십시다. 멋진 길을 발견하시고 혼자 덩실덩실 춤을 추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노력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일 뿐이고 그 누구도 대신 주거나 받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행복하신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7년 2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