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물을 움켜 쥐려면 될까?

작성일
2007-03-17 08:00
조회
8142

제353화 물을 움켜쥐려면 될까?


 


 





공부하는 사람은 늘 욕심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서도 항상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보다 높이 오르고 싶고, 또 보다 멀리 내다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하겠네요. 아마도 벗님의 생각도 여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실 것으로 짐작을 해 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누군가 진리를 알려준다고 하면 곧바로 달려가서 진수(眞髓)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고, 또 그러한 진리를 누군가 알려달라고 한다면 신이 나서 진리를 전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 진리가 물과 같다면......



진리(眞理)의 모습을 사물에 비춰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물의 형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다만 어떤 사물이거나 관찰하고 이치를 궁구하다가 보면 진리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은 되지요. 무엇 하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치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가장 유사한 것으로 논할 경우에는 물의 형태를 보면서 사색(思索)에 잠겨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물에 포커스를 맞추고서 진리에 대한 생각을 전개해 보려고 합니다.


물은 특별한 개성이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릇에 따라서 언제라도 변하고, 도랑이나 하천이나 강이나 바다의 조건에서도 그대로 적응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하겠네요. 그 뿐인가요. 열기를 만나면 분해가 되어서 공기 중으로 떠다니기도 하고, 나무줄기를 만나면 열심히 타고 올라가기도 하니 이와 같은 변화를 읽으면서 물의 대단한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물보다 더 유연한 것이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사물에 의해서 관찰을 할 경우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공기(空氣)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를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기는 육안(肉眼)으로 관찰을 하기가 좀 어렵지요? 그 변화를 보기에는 눈이 너무 둔하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대신에 물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하겠고, 아마도 조물주의 배려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렇게 더 이상 유연(柔軟)할 수가 없는 상태의 물을 보면서 진리의 모습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어디에서나 존재하면서 어디에서나 주변의 조건에 따라서 변화(變化)를 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보습을 생각해 봅니다. 만약 물이 컵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컵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직경은 얼마고, 깊이는 얼마로 변화를 해야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망상(妄想)입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난감한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그런데 물은 이러한 것에 관계없이 바로 변화하여 거의 순식간(0.000001초라고 해두지요)에 물체에 따라서 반응(反應)한다는 것은 관찰을 하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오묘(奧妙)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일단 이렇게 변화를 하는 물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진리는 얼마나 순식간에 변화를 보여줄까요? 이것이 사실 관건이지요. 관심을 두는 것은 물의 변화가 아니라 진리의 변화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물이 변화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진리가 변화하는 것이 빠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매우 적은 간발의 차이라고 하더라도 진리의 변화가 쬐끔, 더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냐면 물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은 진리라고 하는 바탕 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현상(現象)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론을 내려 본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리의 변화라는 것은 과연 신속하기가 바람보다 빠르고, 아니 빛보다 빠르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면 빛도 진리의 안에서 움직이는 사물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빛으로 진리의 형태를 삼기에는 너무 뻣뻣하네요. 그러한 것으로 진리가 된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울 것이 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물의 유연함으로 빛을 제어하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2. 진리를 움켜쥐는 방법



사실 탐욕스러운 말세의 학자들은 뭐든지 움켜쥐려고 안달이 납니다. 낭월부터 그러니까 다른 학자들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 보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진리를 손아귀에 움켜 쥘 수가 있을 것인지에 골몰하기를 수 십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진리의 본체를 움켜쥐는 것은 요원(遙遠)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러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군요. 진리를 물처럼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꾸 골몰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를 움켜쥐고 희롱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이것을 물과 연결시키게 되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물은 움켜쥘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먹을 수도 있고, 바라다 볼 수도 있고, 옮겨 담을 수도 있지만, 정작 움켜쥘 수는 없다는 현실은 뭘 말하는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아서 의미를 찾느라고 뒷짐을 쥐고 마당을 수백바퀴 돌았습니다. 왜 그게 되지 않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제서야 약간의 감(!)이 왔습니다.



“옳거니~~~!!”



항상 ‘올커니’를 하게 될 적에는 짜릿짜릿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곤 하네요. 그러한 느낌이 어떤 상태인지 아시겠지요? 혹 모르신다면 아직은 이 이야기를 읽으실 수준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진리가 물과 같다면 물을 움켜쥘 수가 없듯이 진리도 움켜쥐려고 해서는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혼자서 호들갑 떨고 있지요? 낭월은 항상 이렇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기뻐서 겅충겅충 뛰기도 하거든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말로는 ‘어린아이’와 같다고도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진리를 움켜쥐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세숫대야에서 물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진리는 그냥 바라다보다가 잠시 사용하고는 버려두는 것이라고 하는 관찰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요할 적에만 사용하고는 이내 잊어버리는 물과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진리를 생각해 보니까 또 새로운 영역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은데 이것이 올바른 관찰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3. 진리를 소유한다는 것



예전에는 그러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궁리하다가 뭔가 한 소식을 얻게 되면 그것을 남에게 그냥 알려 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나도 애쓰고 알게 되었으니 장롱 깊숙하게 넣어두고 혼자서만 완미(玩味)해야 하겠다는 일종의 독점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장롱 속에 담겨있어서 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진리는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이지요. 내가 알게 된 것을 남에게 알려주면 남은 또 즐겁게 사용하고 또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옹달샘에서 물을 떠먹고 남은 물을 버리면 또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그렇게 해서 바다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이 마시고 버리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냥 인간의 탐욕일 뿐이고 진리는 그렇게 유유자적(悠悠自適)으로 대자연을 벗 삼아서 떠돌아 다니고 있을 뿐인데 그것을 무슨 대단한 보물인양 하고 깊숙이 간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퍼낼수록 더욱 맑은 물이 가득 고이는 옹달샘을 생각해 봤습니다. 가만두면 이내 썩어버리고 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진리도 그와 같다는 것을 미처 모르는 것은 아마도 천성이 둔하기 때문이려니 합니다. 그래도 조금의 미련은 남지요. 다만 그것을 미련으로 생각한다면 탐욕이 되는 것이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비로소 진리에 쬐끔은 가까워진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낭월입니다.


즉 진리를 소유하고자 하는 순간에 이미 십만팔천리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경봉스님께서는 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더라도 이미 십만 팔천리니라.”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는 말이 아닌가 싶은 뜻으로 요즘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놀다가 버리는 것이지 소유하고 아끼고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곤 합니다.


참, 동국대학교의 명리학과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지난 학기에 중급반에서 강의를 들으셨던 몇몇 선생님들이 올 봄에는 고급반으로 가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초급반으로 이동을 하신 것입니다. 자연의 순서대로라고 한다면 뭔가 잘못 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만, 진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알지요. 진리라는 것은 중급반에서 고급반으로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기초적인 원리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초급반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활~짝 웃는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면서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약간이나마 진리의 맛을 본 까닭이려니 하겠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무슨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관찰력에 있기 때문이지요. 현명하신 벗님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낭월의 뜻을 헤아리신 것 같아서 고맙기도 하고요.


진리는 수료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곳에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가끔은 동국대에서 강의를 들으면 낭월스님의 수료증을 주느냐고 하는 문의도 있더군요. 물론 의미가 없습니다. 수료증이 뭐라고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아마도 그러한 질문을 하는 벗님이라면 아직은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엇길로 새어나갔네요. 에구~~



4. 진리 수집가



진리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소위 ‘비법(秘法)’을 수집하는 것이지요. 그래 놓고는 수집품을 애완하면서 만족을 느끼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진리는 그렇게 몇 쪽의 종이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도 하지요. 대단히 귀중한 것이라고 하면서 전하면 받은 사람은 또 영문도 모른 채로 그것을 고가에 구입하여 애장하곤 한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역학(易學)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취미이자 희망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낭월도 이러한 귀중품에 대해서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그래서 예전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한 번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에도 약간의 변화가 발생하는가 싶습니다.


진리는 수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물도 수집품이 아닌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면서 진리도 그와 같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또한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생각해 봅니다.



“나에게는 사람을 놀라자빠지게 할 비법이 있다.”
“나에게 좀 알려 주시오.”
“그렇게 쉽게 알려주면 비법이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연이 되어야지.”
“인연이라고 하시면.....????”
“그릇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
“저의 그릇은 어떻습니까?”



애초에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자연이 알려 준 힌트를 조금 미리 눈치 챈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바람의 속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비법이 될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비법이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일지도 생각을 해 봐야 하겠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노라면 뭔가 매우 단순한 것에서 심오한 느낌을 얻기도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깊은 인생의 운명을 논하는데 단순한 음양오행으로 관찰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물을 보면서 물을 이해하는 것과 매우 닮았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할 인연이야 없다고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비법을 알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같다는 말이지요. 다만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놀라서 자빠질 비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상거래를 위한 수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진리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과거의 쓰레기더미를 지키면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지난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지요.



5. 진리에 자유롭게 되면



이렇게 음양오행과 자평명리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진리에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은 물속에서 수영을 하면서 노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를 해 봅니다. 아마도 벗님의 꿈이기도 할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그렇지요?


비단 자평명리학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와 같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도인들께서도 ‘불이(不二)’라고 하셨으리라고 짐작을 합니다. 목이 마르면 그냥 물을 퍼먹듯이 진리가 필요하면 그냥 이용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진리를 물을 퍼먹듯이 이용할 안목이 되느냐는 것이 화두(話頭)가 되겠네요.


그런데 묘한 것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까 학문의 영역이라고 할지, 그러한 경계선이 참으로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평명리학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점쟁이도 되고, 학자도 되고, 또 실없는 건달도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시겠네요. 엇그제는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리 예약을 한 방문자가 있었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의 아침이었습니다.



“스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밖에 안개가 보이던가요?”
“예.”
“그와 같습니다. 지금은 안개 속에서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마음이 급하거든요. 나이도 먹고....”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서두른다면 안개 속에 빠집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머지않아서 길이 보일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손님이 나가는데 밖을 보니 이미 안개는 절반이나 걷혀있더군요. 그래서 스스로 자연의 풍경을 퍼다가 썼다는 것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다시 방문자가 왔습니다. 좀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집안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겠습니다.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장사를 하면 어떨까요?”
“지금 밖이 어떤가요?”
“깜깜합니다.”
“그와 같습니다. 장사를 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옷장사를 하고 싶은데요......”
“무슨 장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밤인 것은 예약시간이 그래선데요....(억울억울)”
“그것도 운명의 암시입니다. 운명의 암시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럼 장사도 못하고 어떻게 합니까?”
“손님이 입은 옷은 무슨 색입니까?”
“검은 색........”
“그러니까 진리의 힌트는 도처에 있는 것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기도를 한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혜로운 판단을 하셨습니다.”



손님을 보내놓고는 이것이 상담이 맞는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현재의 운을 봐도 또한 그와 다름이 없으니 진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치를 알고 나면 모든 자연의 삼라만상이 힌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사주를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는 대만의 어느 선생님 말씀이 구구절절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를 공부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만약에 벗님에게 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자신의 길을 봐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낭월의 힌트를 잘 적어뒀다가 써먹어 볼까요? 당신은 지금 길이 보이지 않으니 기도를 하라고요? 아마도 그것은 부합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상황의 다른 해석이라는 말을 하신다면 실수는 하지 않으시겠지만 도인의 비법문서에 매달려 계시다가 혹시라도 이러한 짝이 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소름이 오싹 돋기도 합니다.



6. 진리는 일회성



아마도 그런가 싶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 사람과 만난 순간에만 유용한 것이 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기록을 한 것은 대체적인 것은 몰라도 구체적인 것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도 일회성이잖아요? 옹달샘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면 한번 떠 먹고 흘러가면 그만입니다. 다시 그 물을 가둬두지는 못하니 말이지요. 그래서 물과 진리를 자꾸만 비교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낭월입니다.


일회성의 진리에 하나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벗님의 공부에 약간의 힌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에 밝게 깨어있기 위해서는 묵은 책더미를 안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눈으로 빛을 반짝이면서 사물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왜냐면 어제의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인의 말씀이 또 떠오르네요.



“지금 현재 여기에~~!!”


 



                     2007년 3월 1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