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독야청청 혹은 어우렁더우렁

작성일
2007-01-21 12:59
조회
6617
 

[제344화] 독야청청 혹은 어우렁더우렁








벗님들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오늘아침에는 겨울날씨답지 않게 화창한 햇살이 온 뜨락과 마당에 가득하여 상쾌하기가 그지없네요. 그래서 삭발도 하고, 면도도 한답시고 부산을 좀 피워 봤습니다. 비록 바깥의 날씨는 쌀랑~하겠지만 그래도 바라다보는 경치는 머지않아서 봄의 소식이 올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대한(大寒)도 지났네요. 다음의 절기 입춘까지는 보름밖에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또 겨울이 다 갔구나... 하네요.




1.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은 이러한 생각을 잠시 해 봤습니다. 제목을 보셔서 짐작을 하셨겠지만 저러한 제목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즉 ‘처세술(處世術)’에 해당하는 단어의 조합이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됩니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 단어를 더욱 압축시킨다면 두 마디로 요약이 되겠습니다. ‘혼자 혹은 함께’라는 말이 되겠지요. 혼자 살거나 함께 살거나....... 그야말로 극단적(極端的)인 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벗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어떻게 살겠어요? 혼자 사실래요? 아니면 함께 사실래요? 그리고 그 답은 별도로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나름대로 낭월의 소견을 적어 볼 것이니까 함께 생각을 해 보시도록 하시자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네요. 그러면서 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는 것도 이 시점에서 무익(無益)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2. 독야청청(獨也靑靑) 좋지요




남들이야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주변이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나 혼자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서 살아가는데, 청청(靑靑)이라는 말이 있어서 좀 걸리네요.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청청을 전제로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까지 피해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까 봅니다. 적어도 절개를 지켜야 어울리는 용어라고 했네요. 그러니까 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봅니다. 여하튼 그냥 편안대로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간섭도 하지 않으면서 나 혼자 내 편한 대로 살아가련다.’로 봐도 별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떠오르네요. 그들이야말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사람으로 정의가 되어 있어서입니다. 백과사전에서는 죽림칠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어놨네요. 네이버에서 찾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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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적(阮籍)·혜강(嵆康)·산도(山濤)·향수(向秀)·유영(劉伶)·완함(阮咸)·왕융(王戎) 등으로서 그들은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지배 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식에 벗어난 언동을 감행하였다. 루쉰[魯迅]은 그들의 도피적 처세술이나 기교(奇矯)한 행동이 정치적 압력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그룹을 형성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집권자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타협하여 관계로 돌아가거나 하여 모두 흩어졌지만, 그 풍부한 일화는 그 후 《세설신어(世說新語)》 등 인물평론이나 회화의 좋은 제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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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봐서는 결국 그들도 끝까지 독야청청을 하지는 못 했던가 봅니다만 여하튼 일정한 시점까지는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다고 해 둘랍니다. 그리고 왜 그러한 즉, 독야청청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3. 독야청청(獨也靑靑)-난세(亂世)의 불사법(不死法)




아무래도 혼란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면 세상이 하도 혼탁(混濁)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말을 하면 목숨을 보장 받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그들과 타협을 하여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차라리 그들 전체를 부정해 버리고 홀로 자신의 정부를 만들어서 대통령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으로 보면 되겠기에 해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난세일까요? 난세의 처신법이라고 한다면 그에 전제(前提)해서 지금이 난세라고 하는 타당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태평성세라면 누가 자신의 할 말을 다 하면서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살고자 할 일을, 숨어서 세상을 비웃으면서 그렇게 고독한 삶을 살겠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난세의 성립이 전제되고 나서야 거론을 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누가 알겠습니까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난세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난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난세(亂世)의 기준이 뭔지도 중요하겠네요. 벗님이 생각하는 난세는 어떤 곳인가요? 실직자가 많은 것이 난세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도 난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어려운 세상의 의미는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큰 의미에서의 난세는 ‘정의(正義)가 구현(具顯)되지 않는 세상(世上)’ 정도로 보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물론 말로만 정의로운 사회인 것은 의미가 없지요. 당대(當代)의 국민 모두 혹은 대다수가 그렇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국민의 대부분이 ‘세상 살기 어렵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난세인 것이 분명하다고 전제를 해 놓아 봅니다. 그래 놓고 흔적들을 찾아보면 되겠지요.




4. 난세(亂世)의 흔적들




낭월의 소견으로는 억울한 사람이 많으면 난세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억울한 사람은 뭔가 스스로 자신이 받는 상황들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므로 다분히 주관적(主觀的)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만, 이러한 것을 제3자가 듣고서 과연 억울하겠다고 느낀다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기준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면 억울하기로 든다면 이빨 썩는다고 과자값을 감봉당한 5세 소년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지요.


며칠 전에는 황우석박사의 이야기를 보면서 참 억울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난세의 조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엇 그제는 이명호교수의 법관에게 석궁을 쐈다고 해서 뉴스에 뜨거운 열기를 뿜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도 알고 보면 참으로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분명히 여러 가지의 조짐으로 봐서 난세가 아닌가 싶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전에 삼청교육대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참으로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제를 할 방법, 즉 그들을 억울하지 않게 해 줄 방법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해 줄 수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 난세일 것이라고 봐야 안 되겠나 싶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어제 밤에는 억울한 간첩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내용도 봤습니다. 그 많은 억울한 간첩들은 수십 일간 죽음의 체험장(고문장)에서 서명을 한 증거에 의해서 그렇게 판결이 나버린 다음에는 가정도 깨어지고 인생도 망가졌더군요. 그래도 그들을 억울하지 않게 해 줄 방법이 없고,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면서 또한 난세의 흔적들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느 여성 심리학자의 말에 ‘억울하게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게 되면 영혼의 진화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고, 계속 그 자리를 배회하게 됩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귓가를 맴돌더군요.


하긴, ‘실미도’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참 억울한 사람 많구나⋯⋯ 했습니다만, 광주항쟁의 시민들, 매향리 주민들, 노근리 주민들,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을 했다가 외교부의 무관심(혹은 무력함)으로 다시 북으로 보내진 사람들 등등등⋯⋯ 일일이 열거를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더러는 예전의 사건들로, 또 더러는 현재의 사건들로 얽히고 설켜서 구분도 되지 않는 사연들도 포함한 채로 그렇게 역사의 뒤쪽에서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크게 개선(改善)이 된 것은 없고 억울한 사람은 여전히 그렇게 억울해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본능(本能)을 믿으라고 해야 할까 싶기도 하네요. 말은 수시로 변하지만 본능은 변하지 않거든요.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갖고 가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결론은 ‘지금현재에도 난세는 진행 중’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난세를 전제로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독야청청을 논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적당하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독야청청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어우렁더우렁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강요를 받을 것입니다. 그 강요가 외부에서 일어나거나 혹은 내부에서 일어나거나 그러한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지요.




5. 독야청청하는 방법




일단 독야청청을 하기로 했다면 방법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거나 출세하는 것은 포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적인 주체성으로 자유를 누리기 위한 대가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끝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잡아야 하겠네요. 그러자니까 부귀공명(富貴功名)은 애초에 인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주변에서는 이렇게 독야청청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말이 없는 대다수의 소시민을 포함해서 나름대로 혼자서 세상을 향하여 얻을 기대를 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內面)으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사람은 양심선언(良心宣言)이라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많은 일시적인 독야청청주의자들은 양심선언을 함과 동시에 세상에서 잊혀져가는 장면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양심선언을 한다면 다수의 무력한 시민은 잠시나마 대리충족을 얻을지라도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 동조하는 눈길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꺼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면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양심선언자는 질서파괴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지요.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질서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 질서가 올바를 경우에는 ‘준법질서(準法秩序)’라고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관행(慣行)’이라고 한다는 것쯤이야 벗님도 알고 계시겠군요. 결국 어우렁더우렁으로 살아갈 작정을 한 사람에게만 부귀영화는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요 하다못해 부녀회장을 하려고 해도 정치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에 정치를 하지 않고 얻을 권력(權力)은 아무 것도 없을 모양이네요. 여하튼 독야청청을 한 대가로 무슨 불이익이 주어지더라도 모두 감수하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 갈 수만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틀린 판결을 내린 판사를 쏜 사람은 독야청청인 것은 맞나요? 낭월이 보기에는 또한 일부독야청청의 형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억울한 것으로 봐서는 이해가 되지만 자신에게 해로움, 즉 불리함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에게 불리하면 나서서 따지고, 유리하면 그냥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모두의 선택사항이면서 필수가 아닐까요? 벗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독야청청..... 이거 참 생각 할수록 알쏭달쏭 하네요.




6. 어우렁더우렁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이면서도 좋은 양으로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라면 고역일 테니 말이지요. 사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노래방에 가서 아무 노래라도 하라고 부추김을 받으면서 늘 느끼지요.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물론 예전보다 많이 발전을 했다고는 하는데 본색은 변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야 모두가 편안하다는 말로 합리화를 시키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왜 누군들 자신의 내부에서 외치는 정의(正義)가 없겠나요? 아마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모두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양심(良心)이라고도 하고, 마음의 소리라고도 한다지만 의미는 갖겠지요. 다만 마음의 소리대로만 행동을 한다면 어우렁더우렁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독야청청기질로 분류를 해서 따로 제외시켜야 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생긴 대로 살아야 편안하다고 하잖아요. 어우렁더우렁은 비가 오면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남의 우산 속으로라도 들어가야 하고, 바람이 불면 무덤가에서라도 몸을 웅크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혼자만 잘났느냐고 외칠 수도 있지요. 여하튼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는 것은 생존법칙(生存法則)에서 제일칙(第一則)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나서 다른 것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비록 대학에서 총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이상 어우렁더우렁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명예(名譽)이기 때문이지요. 말을 듣지 않으면 명예를 까뭉개버린다고 하면 얼마나 두렵겠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7. (   )가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우린 곳잘 흥분하지요. 참으로 사소한 것에 잘도 흔들리는 마음인가 봅니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식이지요.




교육자(敎育者)가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대통령(大統領)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부모(父母)가 되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자식(子息)이 되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종교인(宗敎人)이 되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법관(法官)이 되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그런데 정치인이 되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라는 항목은 넣고 싶지 않네요. 왜냐면 국민정서가 ‘정치인은 그럴 수도 있어’가 될 것으로 느껴져서 말이지요. 그리고 ‘장사꾼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도 제외합니다. 삼대(三大) 거짓말에 장사꾼의 말은 이미 공인이 된 것이니까 말이지요. 밑지면서 판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가 봅니다. 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분위기는 그러고도 남아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겉에 보이는 것은 그냥 장식용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장식용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일수록 권위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옷의 내부에서는 자신의 몫은 철저하게 챙기고 남의 몫까지 넘보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것이 해롭진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려 보면 이렇게 되겠네요.




(백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모두는) 다 그럴 수 있어.




왜냐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본능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조종하면서 살아가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 본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궁금하지요.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관심을 두고 살핍니다만 천성이 둔재인 낭월은 늘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에게 물어야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 많은 시간을 사색(思索)해야 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것만 늘 깨닫게 됩니다.




8. 제 3의 법칙-표리부동(表裏不同)




여기에서 말하는 제3의 법칙은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야청청으로 살자니 인생이 고달프고, 어우렁더우렁으로 살려니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대안(代案)입니다. 귀가 솔깃하시지요?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이곳에서 공부라도 할 마음이 있으신 벗님이야 당연히 귀를 기울이시고 싶으실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이미 독야청청이면 운명 나부랭이에 관심을 둘 일이 없을 것이고, 어우렁더우렁 파(派)라면 부귀공명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자평명리학에 대해서 관심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 제삼의 법칙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감이 무척 나쁜가요? 그렇다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하하~




9. 난세를 살아가는 한 방법




낭월이 알기로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최선(最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 자신의 환경에서 지혜롭게 적응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러므로 최선을 꿈꾸신다면 그 꿈은 그야말로 몽상(夢想)일 뿐입니다. 얼른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는 살아있는 삶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지요. 겉으로는 어우렁더우렁으로 살면서 속으로는 독야청청을 꿈꾸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합의(合意)를 보자는 것이지요. 그래도 ‘권력을 얻어서 올바른 정치를 하고자 한다’는 고시지망생의 말보다는 솔직합니다. 왜냐면 잘났거나 못났거나 상관없이 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 그 순간부터는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실 아무렇게 살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질뿐이지요. 그리고 스스로 행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보면 아무리 혼자 잘산다고 해봐야 내 맘대로 되는 것도 별로 없는가 싶네요. 그래서 겉으로는 섞여서 살아가고 속으로는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시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시라고 권해 드리겠습니다.




10. 빈 배처럼




결국은 이렇게 되네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돌이켜보니 빈 배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결론이 멀찌감치 보이는 듯해서 말이지요.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두둥실 떠서 흔들리고 있는 빈 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 지혜롭게 사는 법을 생각하기에는 지력(智力)이 부족하네요. 그냥 화창한 겨울 한 날의 독백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산보나 가야 하겠습니다. 하하~




         2007년 1월 21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주문진항의 겨울풍경입니다.갑자기 짙푸른 바다가 그리워지네요. 바다만 홀로 독야청청인가 싶기도 합니다. 저 배도 빈 배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하역장으로 향하고 있네요. 그리고 얼른 빈 배가 되어야 비로소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