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대운의 미스터리

작성일
2006-12-1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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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6화] 대운(大運)의 미스터리










오늘 감로사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 대운에 대한 대입이었습니다. 그 동안 대략 2개월여에 걸쳐서 열심히 안내를 한 것이 용신에 대한 대입이었다고 하겠는데 이제부터는 대운을 살피면서 세운까지도 고려를 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네요. 대체로 잘 이해를 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만, 아마도 나름대로는 답답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해 봅니다. 왜냐면 이 공부가 그렇게 한두 달을 두고 달려든다고 해서 모두 소화가 된다고 보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이 되어서지요. 그래서 늘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급한 마음으로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이해를 한다는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라고 권하곤 하네요.




1. 대운은 실체(實體)하는가?




우선 대운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벗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운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의심을 해 보시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 함께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과연 대운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원래 매년의 간지가 실재하는 것은 인정을 하고 시작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즉 간지의 매년 한 단계씩 전진하는 것은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사주학의 성립 여부가 이미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인정을 해야 하겠고, 질서정연하게 매년 한 간지씩 전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운은 뭔가요?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한 사람의 운명에 깊숙이 간여하는 성분이라고 본다면 참으로 미스터리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면 그 실체부터가 의심스러운데 그 작용까지 믿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하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면 그렇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가요? 우리는 사주팔자를 나타낸 다음에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대운을 적어 놓고 나이를 기입한 다음에 운의 흐름이 좋고 나쁜 것을 찾아내기에 여념이 없잖아요. 그래서 잠시 이러한 것을 뒤로 미루고 객관적으로 살펴 볼 여유도 좀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2. 대운의 성립이 의심스럽다.




아시는 대로 대운은 월주를 배경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평진전에서도 제강(提綱)이라고 한다지요. 제강은 투망의 손잡이를 이르는 말인데, 이것을 확대해석하게 되면 대운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자리라는 의미가 되는 셈입니다. 월령(月令)이 제강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만큼 대운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자리라고 보라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월주일까요? 년주도 있고, 일주도 있으며 시주도 있는데, 하필이면 월주(月柱)에서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도 사실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월에서 나오는 것이 절기의 변화이고, 그래서 대운도 월에서 나와서 절기를 따라 변화를 하듯이 한다고 하면 말이야 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결과에 꿰어 맞추기 위한 설명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월주에서 대운이 나온다는 것은 낭월의 좁은 견문(見聞)으로는 자평명리학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다른 역학분야에서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운의 존재가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게 되는군요.




3. 순운(順運)과 역운(逆運)도 의심스럽다.




대운은 양남음녀는 순행으로 나타내고, 음남양녀는 역행으로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양남(陽男)인지 음남(陰男)인지는 년간의 글자가 음인지 양인지를 보고서 구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역으로 흐르는 간지가 존재한다는 것이 추호의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까요? 아니면 어불성설에 해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까요? 물론 일상적인 이치로 본다면 고려의 여지가 없이 황당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때로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과연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참으로 심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보통 운명을 해석하면서 대운의 흐름을 보면서 길흉을 이야기하게 되고, 또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건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상이라고 한다면 과연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낭월이 괜히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곰곰 생각을 해 보시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를 하실 것으로 봅니다.




4. 역운을 무시한 학자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학자라고 한다면 역운에 대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순이 있다고 하면 바로 수정을 하는 것이 용감한 학자라고 하는 것도 당연하겠네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예 자신의 상담자료를 놓고 음남양녀의 경우에는 모두 순운으로 대입해서 해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대입인지는 뒤로 미룬다고 하더라도 그의 도전정신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낭월의 팔자도 정유생에 해당하므로 역운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팔자를 놓고 순운으로 적어서 대입을 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순운으로 적어놓고 대입을 하는 과정에서 왠지 껄꺼러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운으로 대입을 하면 훨씬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고개만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기사 고인께서 그 정도의 상식이 없어서 애초에 음남양녀의 역운설을 제조하였겠느냐는 생각은 이 후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자작총명(自作聰明)을 지었던 셈이지요. 자작총명은 스스로 잘났다고 떠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헛 다리를 짚어 본 다음에서야 고인의 고민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스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미스터리가 되겠어요. 하하~




5. 사람의 음양이 년주가 되어야 하는가?




음남양녀는 역행하고, 양남음녀는 순행하는데 그 기준이 년간이라라는 것에 있습니다. 왜 연간이 되었는지는 참으로 미스터리입니다. 아마도 짐작하기에는 원래 자평명리학의 원조는 년주부터 출발을 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대운을 대입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흔적으로 인해서 년간의 음양에 따라서 사람의 기준을 음양으로 구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이 팍팍 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일간이 바로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일간이 양간이면 그 사람은 양의 성분이 발동을 하고, 음간이면 음의 성분이 발동한다는 것은 사주심리학을 연구하면서 항상 만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년간을 음양으로 본다는 것은 현실성이 그만큼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히려 일간이 갑병무경임이면 대운은 순행하고, 을정기신계가 되면 대운도 역행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이론을 제기해 볼 수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주를놓고 연구를 해봐야 하겠습니다만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년간기준설에서보다 훨씬 설명하기에 부드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당장 자신을 놓고 연구를 해보면 좋으련만 자신의 일간도 기토에 해당하니 또한 둘러치나 메치나 같은 음간이라는 것이 문제네요. 벗님이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해당하시는지 살펴보시고 대운의 관찰을 새롭게 해 보시는 헛수고를 해 보시라고 권해 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6. 그래도 대운은 살아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의심 투성이요, 모순덩어리인 대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운은 천여 년을 두고 의연하게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미스터리입니다. 만약 허술하게 구성이 되었더라면 바로 사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즉 수많은 지혜로운 선생님들이 그냥 뒀을 리가 없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순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때로는 대운이 없으면 차라리 세운으로 길흉을 대입할 것이므로 오히려 간단명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운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인생의 길흉에 대한 해석은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 어떤 선생님들은 대운을 무시하고 세운만으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비록 그 원리는 의심스럽지만 하는 짓은 무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으되 시간을 두고 또 무슨 구멍이 있는지를 호시탐탐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러한 허점이 드러나게 되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바로 잡아 족쳐야지요. 그리고 그때까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냥 따라가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또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운은 미스터리야.......’




         2006년 12월 11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