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컴퓨터가 고장 난 김에 드라마 보기

작성일
2006-11-27 22:54
조회
6943

제 333 화 컴퓨터가 고장 난 김에 드라마 보기


오늘은 온 종일 비가 내리네요. 겨울을 재촉하는 비려니 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부터 컴퓨터가 맛이 오락가락 하더니만 결국에는 문제가 일어나서 병원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되었네요. 늘 자료를 저장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근래에 분주함을 핑계로 조금 게으름을 부렸더니만 일부분은 포기를 해야 할 모양입니다. 그래도 많이 살려줘서 복구가 상당부분 된 것이나마 감사해야 할 장면이네요.


그런데 컴퓨터가 없으니까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는 것은 또 무슨 일일까요? 아마도 중독증세와 금단증상이 겹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은 듭니다만, 여하튼 감로사에서의 오전 강의를 마치고 나면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뭔가 허전한 것이 참 얄궂네요. 하하~


그런데 미리 이러한 것을 감지(?)라도 했는지 『소설 호설암』을 읽다가 번역을 한 것이 부족하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한 다음에 드라마로 나온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세트 구입을 했지요. 중국의 천진에서 발송을 한 것인데 인터넷이 좋기는 참 좋네요. 그래서 미리감치 받아 놓고 언제 시간을 내어 봐야겠다는  계획만 세워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기회가 바로 찾아 올 줄이야 미쳐 몰랐지요.


지난 주부터 줄기차게 드라마에 푹 빠져서 중국어사전을 옆에 놓고 한 주일을 보냈네요. 내일은 다시 서울로 강의를 하러 가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서야 드라마를 다 보고 종결을 지었습니다. 역시 낭월도 편재가 있어서인지 하던 일을 중도에 미뤄놓으면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아서 말이지요. 여하튼 장장 40편의 드라마를 마치고 나니까 비로소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을 알겠네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삶에 묻혀서 보낸 모처럼의 휴가(!)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홍정상인 호설암>>이라는 제목인데, 청말의 난세를 상하이와 항주를 중심으로 펼쳐가는 한 상인의 일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적수공권으로 강호에 나서서 사람과 재물을 경영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벼슬하는 사람과 사업하는 사람의 같은 점과 다른 점도 많이 생각하게 되고, 또 재물이 늘어가면서 부인들도 함께 늘어가는데, 12명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인간적으로 따스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노력을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책에서 보는대로 아편을 피우는 장면은 중국정부에서 금지하였을 것으로 짐작을 해야 하겠고, 잘 꾸미면 요란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화려한 여성인연들에 대해서도 너무 중국식(?)으로 처리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기는 했습니다만, 인간적인 면을 설명하는데에는 별 무리가 없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해피앤딩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인생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대사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인생살이에서 해 볼 것은 다 해봤구나~!"


 



정도로 이해를 했습니다만, 글쎄요 사람이 일생을 살고 나서 자신의 뒤를 돌아다 보면서 이러한 말을 던질 수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 할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요.



드라마의 촬영도 그의 멋진 정원에서 해서인지 어느 사이트의 사진을 가져왔는데, 같은 곳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겠네요. 그리고 관련 자료를 좀 찾아보는데, 마침 자세하게도 설명을 한 것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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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ng.nate.com/nh2378/27890668에 가서 읽어보세요.


너무 많아서인지 가져오기에 문제가 있어 보이네요.


                2006년 11월 2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중국인의 처세술-상경(商經)
2006.10.30 18:52





http://tong.nate.com/nh2378/27890668  




상경

스유엔 지음/김태성․정윤철 옮김


더난출판/2002년 3월/564쪽/18,000원




▣ 저 자  스유엔




▣ 역 자 


김태성


1959년 서울 출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중국학 연구공동체인 漢聲문화연구소 대표와 호서대학교 중국어과 겸임 교수로 있다. 역서 및 저서로 『호설암』『중국사 뒷이야기』『양자강 저 너머』『담판병법』『중국어와 중국문화』 등 30여 권이 있다.




정윤철


1970년 인천 출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어학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역서로 『신중국어』『오픈 중국어회화』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중국의 거상인 호설암의 행적을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이 책은 수수께끼를 푸는 하나의 열쇠라 할 수 있다. 근대 중국 상업사에서 호설암은 고대의 ‘상성(商聖)’‘이라 불린 도주공에 견줄 만한 인물로서 흔히 ’아상성(亞商聖)‘이라 불리고 있다.




변혁의 혼란이 소용돌이 친 19세기 후반 호설암은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신화적 드라마를 연출한 장본인이었다. 가난하고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시대와 권력의 흐름을 이용해 거대한 재산을 형성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태평천국의 난 등 개혁의 혼란 속에서도 청 조정에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통해 사업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수완은 타고난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양무운동이 일어나자 서양의 기술과 설비를 적극 받아들였으며, 좌종당의 서역 원정 때는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서양 상인들로부터 차관을 끌어들임으로써 국방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전장과 전당포를 이용하여 대륙적인 금융망을 건설하는 동시에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호경여당’이란 약국 체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오랜 시련과 경험을 거치면서 호설암은 일개 전장(錢莊)의 점원에서 중국 역사상 유일한 홍정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당시 흠차대신이었던 좌종당은 그를 가리켜 “상인 중의 기인으로서 호협의 기질이 있다.”고 칭찬했으며 사상가이자 대문호인 노신도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설암은 화려한 상술과 신비한 매력, 그리고 탁월한 인품으로 비즈니스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동시에 후대 상인과 기업가들의 숭배대상이 되었다. 그는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지모와 사상의 이치를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상업수완을 흡수하여 성패 득실의 이치를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가 자신의 전략과 경영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호설암의 학문적 소양이 깊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업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혼란이 연속되는 역사적 배경이 원인이기도 했다. 그 역시 임종 직전에 이러한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나의 귀중한 경험과 경상의 원리를 후대 사람들에게 책으로 정리하여 남겨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호설암이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과 지혜의 언어들이 있어 우리는 이를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정리하여 『상경』이란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이는 ‘홍정상인’ 호설암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마지막 유지이기도 했다. 『상경』에서는 호설암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경험, 그리고 지혜를 결집함으로써 경영자로서의 인격과 매력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상경』은 한 마디로 비즈니스의 이론과 실천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단히 실용적인 교과서라 할 수 있다.




1. 기회를 만들 줄 아는 지혜


최고의 기회는 사람을 얻는 것이다


“나는 원래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선친께서 타개하신 후부터 호구지책으로 신화 전장에서 도제로 일하고 있었다. 청소와 주인어른의 차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수금을 담당하는 포가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평생 이렇게 머물러 있고 싶진 않았다. 난 항상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독립해 따로 전장을 열어 사업가의 대열에 뛰어들거라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5백 냥의 은자를 왕유령(王有齡) 공에게 주어 경사에 가서 투공(投供)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돈의 쓰임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기회와 인물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호설암은 이름이 광용(光墉)이요, 자가 설암(雪巖)으로 1823년 휘주(徽州) 적계현에서 태어났다. 휘주는 예로부터 상인들이 많이 배출되던 지역으로 휘주 출신 상인은 중국 전역에 두루 퍼져 있었다. 이런 환경에 영향을 받은 호설암은 부친이 사망하고 집안이 몹시 어렵게 되자 열두 살의 나이에 홀어머니 곁을 떠나 항주(杭州에) 정착한 후 신화 전장의 도제가 되었다. 그는 주변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사태의 추이를 한눈에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 영특한 소년이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항상 웃음으로 대하는 아량이 있었다. 덕분에 대인관계가 매우 원만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이런 성품 덕택에 호설암은 도제생활을 시작한 지 3년만에 신화 전장의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창구에서 손님을 맞는 일을 했으나 그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한 주인은 마침내 그를 수금사원으로 발탁했다. 호설암은 일처리가 워낙 성실하고 꼼꼼하여 단 한번도 실수를 하거나 부정한 이득을 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결손 처리된 자금으로 왕유령이라는 사람을 도와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되었지만 사실 호설암의 화려한 인생 역정은 왕유령의 연관(捐官)을 도와주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이 그에게 ‘홍정상인’이라는 지위와 명예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어느 해 여름, 호설암은 ‘매화비’란 찻집에서 우연히 왕유령이란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이미 염대사란 자리를 연관해 놓았고, 곧 경사에 가서 ‘투공’하여 정식 관직을 얻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데다 힘이 되어 줄 배경도 없었던 왕유령은 매일 찻집에 앉아 싸구려 차로 빈속을 달래면서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다. 왕유령은 아직 투공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보결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호설암은 비록 학문이 깊진 못했으나 “불행이 다하면 행복이 찾아오고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찾아온다.”는 인생 철학을 깨닫고 있었다. 호설암은 관직에 오르는 것도 운세에 따라 돌고 도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또한 지금은 형편없이 몰락해 있지만 장차 왕유령이 부귀와 권세를 크게 누릴 인물이라 확신했다. 호설암은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에 꿈 많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마음 속에 그리는 자신의 모습은 정의롭고 용감하여 어려운 사람을 구해 주는 호협의 모습이었다. 비록 자신이 귀인은 못 된다 하더라도 수중에 이미 결손으로 처리된 공금 5백 냥이 있는 만큼 남을 도와 대업을 이루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설암은 일생의 중요한 기회를 왕유령에게 걸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형님, 뭐가 그리 바쁘십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한 가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호설암은 허리춤에서 헝겊 주머니에 겹겹이 싼 5백 냥짜리 은표 한 장을 꺼냈다. 이 돈은 신화 전장에서 이미 결손 처리된 것으로 운좋게 수금을 하긴 했지만 전장에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따로 전장을 차리는 데 자본금으로 쓸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사람으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멋지고 고명한 방법이라 생각한 호설암은 자신의 전 재산을 왕유령이란 인물에게 투자하였다.




은표를 받은 왕유령은 정신이 나간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큰 돈을 낯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선뜻 건네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설암의 진심과 성의를 알고는 그만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인 호설암에게 절을 올렸다. 이어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잔을 들어 성공을 다짐하여 금의환향을 기원했다.




다음날 왕유령은 배를 타고 경사를 향해 출발했다. 왕유령에 대한 투자는 일종의 도박이요, 모험인 셈이었지만 호설암은 한 가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일단 그가 관직에 오르기만 하면 자기가 베푼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2. 인재를 마음대로 부리는 재주


세상에 완전한 인재는 없다


“상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남의 능력도 잘 활용할 줄 아는 법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경영자의 능력과 자질을 고루 갖췄다 하더라도 큰 일을 해내기 어렵다. 나는 사람을 쓰는 방법과 원칙이 남들과 다르다. 나는 아주 강한 사람들만 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재는 없다. 따라서 쓸 만한 구석이 있기만 하면 다른 단점들이야 전부 덮어두면 그만이다. 나무 한 그루로는 숲을 이룰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인재들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성공의 비결은 남들이 감히 데려다 쓰지 못하는 인재들을 과감히 받아들인 덕분이다.”



“세상에 완전한 인재는 없다.” 호설암은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이 점을 대단히 중시했다. 세상의 편견에 좌우되지 않는 자신만의 혜안을 가지고 사람들의 장점을 찾으려고 했다. 그의 주변에 특출한 인재들이 많았던 것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진세룡은 별명이 ‘땡중’으로 원래는 도박판을 전전하면서 일없이 먹고 마시며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던 건달이었다. 그러나 호설암은 이 ‘땡중’에게서 한 가지 특별한 장점을 발견했다. 전장을 관리하는 당수가 될 재목은 못 되지만 밖으로 뛰면서 잔일을 해결하는 데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땡중’을 훈련시키고 개조하기로 먹었다.



진세룡은 생각과 행동이 대단히 민첩한 인물이었는데 호설암이 진세룡을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비단 가게의 당수가 진세룡에게 호설암을 욱사(郁四)에게 대려다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이때 호설암이 건넨 몇 가지 질문에 진세룡은 빠르고 정확한 대답을 했고 호설암은 그가 쓸 만한 재목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또한 호설암은 욱사를 통해 그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혈기가 왕성하고 언변이 좋다는 것이었다.




호설암은 진세룡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그를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번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자 50냥을 건네주며 용돈으로 쓰라고 했다. 당시 진세룡은 호설암에게 노름을 끊겠다고 다짐해 놓은 상태였지만 호설암은 노름꾼에게 공돈이 생기면 손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호설암은 그가 언행이 일치하는 인물인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 날 저녁, 진세룡은 도박장 근처를 맴돌긴 했지만 끝내 마음을 다잡고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때부터 호설암은 진세룡을 믿기 시작했다. 사람됨을 알려면 먼저 그의 언행이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는 것이 호설암의 지론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의지력이었다. 결점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의지력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개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인재는 유불재다. 유불재는 본명이 유삼재로서 호설암의 애첩인 부용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었다. 부용의 집안은 대대로 ‘유경덕당’이란 약방을 경영했던 명가로서 그녀의 부친 대에는 상당한 부와 명성을 구가하기도 했으나 부친이 사천에서 약재를 실어오다가 배가 암초에 부딪혀 사망하는 사고를 당하자 유삼재에게 약방의 운영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유삼재는 노름에 미쳐 있었으므로 약방은 유삼재의 손으로 넘어간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남에게 넘어갔고, 그 후로는 살림살이나 옷을 전당포에 잡혀 생계를 이어갔으며 아예 외상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친조카인 부용마저도 그를 절대 구제가 불가능한 대단히 한심한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설암은 이미 그의 또 다른 일면을 보고 있었다.




첫째, 그는 도박에 미쳐 엄청난 돈을 날렸으면서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제약의 비방은 끝까지 팔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이는 언젠가는 다시 가업을 일으키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었다. 둘째, 술과 담배를 지독하게 좋아하면서도 아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호설암은 그에게 아직 구제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방이를 끌어들여 서양 상인들과의 거래를 시작하고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점령했을 때 자신의 노모와 처자를 의탁했으며, 항주를 수복하기 위한 사업의 기초를 다진 것 등도 모두 유불재의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인재를 선발, 활용하는 데 있어서는 장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단점을 덮어주는 관용이 필요하다.





3. 형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열쇠


흐름을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업을 하려면 세상의 큰 흐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모르면 뒤쳐지게 되고 나중에 따라잡으려고 아무리 애써 봐도 소용없다. 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흐름을 타는 것만 못한 법이다. 어려워 보이는 일들이 의외로 순조롭게 성취되는 것은 대부분 현실의 흐름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원대한 안목으로 4~5년 후의 일들을 내다보고 큰 흐름을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비상할 수 있다.”




사업이나 투자가 확실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종합적인 변화의 추세를 파악하고, 변하지 않는 발전의 법칙과 방향을 찾아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호설암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의 커다란 흐름을 놓치지 않는 거시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 상인들을 상대로 생사 교역을 펼치는 과정에서 그의 이러한 안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호설암은 시장과 가격을 순조롭게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호주에서 구입한 생사를 상해로 운반해 놓고서도 그 이듬해 생사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물건을 처분하지 않고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상해 소도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반인들이 생사와 차 같은 물건을 상해로 가져와 서양 상인들과 교역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외국 대사관들은 각기 본국 교민과 상인들에게 소도회와 접촉하거나 돕지 말라는 지침을 공포했다. 또한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의 항의를 무시하고 상해에 세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흐름은 분명 호설암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서양 열강들이 본국 상인들과 소도회의 접근을 금지하고 세관의 설치를 극력하게 반대한 것은 중국과 장기적인 무역관계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이 계속 유지되면서 서양 상인들과 적절한 협상을 진행한다면 이미 확보해 놓은 물건을 아주 좋은 가격에 파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설암은 그 순간에 생사를 대단히 불리한 가격에 팔기로 결심했다.




호설암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의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면밀하게 종합한 결과였다. 당시 태평천국군은 엄청난 기세로 청 조정을 압박하고 있었고 서양 상인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조정에서도 비록 중국 상인들과 서양 상인들 간의 교역을 금지하긴 했지만 전란이 평정된 다음에는 시장을 회복시키고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해 금령을 해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전까지의 관례에 따르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서양 상인들과 교역 활동을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업은 전적으로 상인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측을 토대로 호설암은 조만간 서양 상인들과의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선 미리 은혜를 베풀어 그들과의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이 거래를 토대로 호설암은 서양 상인들과의 장기적인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1862년 2월, 호설암은 신임 절감순무인 좌종당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호설암이 절강 땅에서 돈을 벌어 그 세력을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을 지의 여부는 좌종당과의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호설암은 왕유령의 위임을 받아 상해에서 구입해 놓은 채 아직 항주로 운반하지 못한 군수용 양곡을 좌종당에 대한 상견 예물로 사용했으며 이로써 20년 동안 계속된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과 교류가 시작될 수 있었다.


좌종당이 “가진 것 없어도 천하를 걱정하고,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하여 고인들과 교왕하리라.”는 그의 원대한 웅지와 포부를 펼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호설암이었다. 호설암이 무기 구매와 군량 조달 등을 통해 좌종당이 태평천국군과 염군, 섬서 회족의 반란 등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의 청나라 조정으로서는 생사존망이 걸린 대단히 중대한 국사였다. 호설암은 좌종당의 양무를 측면에서 지원했고 그가 예순의 나이에 대원수가 되어 아구파 등의 분열 세력과 각축을 벌일 때도 서양 상인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차관을 유지함으로써 좌종당의 신강 수복에 결정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좌종당의 정적들이 하나같이 지원을 거부하고 각 성에서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좌종당의 눈에는 더욱 더 위대한 상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호설암이 좌종당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여 천신만고의 노력과 대가를 치르면서 그의 신임을 얻게 됨에 따라 좌종당과 친분을 맺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과 1884년 사이 한때 파산 직전의 위기까지 몰린 호설암은 좌종당의 권력에 의지하여 곤경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좌종당을 대표로 하는 양무파 대신들의 수하에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상장(商場, 상업과 교역행위가 펼쳐지는 비즈니스의 세계)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관리들의 뇌물수수가 만연해 관아에서도 상인들의 업무를 처리해 줄 때는 업무의 경중에 따라 뇌물의 액수가 정해질 정도였다. 호설암은 이러한 상황에서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하느니 청렴하고 권위 있는 관리에게 공경하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문제가 발생할 경우 관아가 스스로 나서서 돕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원로 관리들에게 효경을 다함으로써 그들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는 특권을 얻게 되었고, 이를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여 큰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나중에 호설암의 부강 전장이 전국 각지에 지점을 개설하게 되자 각 성의 대신들과 경사의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돈을 맡겼다. 호설암은 고관들의 예금을 유치하면서 이들에게 안전한 금고와 넉넉한 이자를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의 거래를 통해 자신의 지명도와 전장의 영향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오늘날은 이처럼 권력에 기대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위법행위에 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바른 의미에서 ‘임세(任勢)’의 실천은 경영의 실천에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4. 고상한 신념을 지키는 의지


신념이 없으면 큰 상인이 되지 못한다


“나는 비록 상인이지만 국가의 이익을 벗어난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법을 어기는 일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조정의 법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누구든지 이에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법에서 규정하지 않은 일에 있어선 우리 의사대로 행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조정의 법령을 잘 지키고 관리들도 조정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으면 천하가 태평하지 않을 리 없다. 관리들이 조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확실히 한다면 사업하는 사람들도 감히 법을 어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관리들이 조정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우리에게만 책임을 강요한다면 필연적으로 부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내가 굳게 지키는 한 가지 신조는 관리든 상인이든 반드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호설암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대였다. 중국에 아편이 유입되면서 귀한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외세의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주정에서도 나라를 지킬 방도를 찾지 못했다. 백성들은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압력에 시달렸고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의 폭정과 아편의 피해로 질곡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폭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을 이끌고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부르짖으며 난을 일으켜 그 세력이 십 수년 동안 청에 필적할 정도였다.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염군과 신강 회족의 난이 일어났고, 방회 세력이 난립하면서 난세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호설암은 시국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홍수전은 난을 일으킨 직후 상해로 사람을 보내 호설암을 찾아 그를 태평천국군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 시기 호설암은 상해에서 서양 상인들과 지속적인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양무에 익숙했기에 홍수전은 그를 통해 서양 상인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자 했다. 홍수전의 사자는 호설암에게 한족으로서 어떻게 만주족이 중화를 다스리는 데 대해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있느냐고 힐문했다. 또한 적지 않은 수익을 보장해 주


“서양 사람은 절대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우리 자신이 단결하지 못하고 개인의 작은 이익을 위해 민족을 저버리고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는 것이다. 중국이 강대해지려면 먼저 온 국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지금의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 외교와 같은 대사에는 관리들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있어야지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업에 있어선 나의 본업인 만큼 최선을 다해 국익을 보호할 것이다.” 그는 자신 관점에서 볼 때 호설암은 법과 원칙을 잘 준수하는 훌륭한 국민이었던 셈이다. 그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청 조정을 옹호하는 정치노선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온갖 변화와 혼란이 휘몰아치는 변혁의 시대에 살면서도 안정적인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호설암의 사상은 백성들에 대한 애정과 보살핌에도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가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이요,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위대한 상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과감히 서양 자본과 무력에 맞섰기 때문이다.




한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중국 무역의 일인자’, ‘중국 공업의 아버지’라는 명예스러운 칭호가 붙게 되었다.


겠으니 태평천국군을 위해 서양상인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오늘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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