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알 수 없는 동성애의 심리구조

작성일
2006-10-2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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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화] 알 수 없는 동성애의 심리구조












서점에 가서 느긋하게 살펴보노라면 참으로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시간의 낭비가 없이 알찬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일상의 일이 되어버렸는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가끔 신문에 소개되는 책에 대해서도 눈여겨 봐 뒀다가 서점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살펴보고 재미있겠다 싶으면 구입을 하곤 하는데, 아마도 벗님의 모습도 낭월의 이러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1. 동성애의 심리학




얼마 전에는 심리학의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흥미로운 제목이 있어서 한 권 구입해 왔습니다. 바빠서 늘 미루다가 비가 내리는 틈을 이용해서 핑계를 대고 한 번 읽어 봤습니다. 책은 학지사에서 나온 윤가현 님의 《동성애의 심리학》입니다. 내용을 보면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각자의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가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은이의 말을 들어보면, 동성애와 지적(知的)인 능력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뉴욕의 뒷골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지고(至高)한 생각으로 인생의 길에 등불의 역할을 한 사람들도 또한 동성애적인 성향은 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나름대로 동성애와 사회적응능력에 대해서는 차별을 할 수가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알렉산더 대왕, 로마를 창건한 씨이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영국 철학자 베이컨, 작곡가 슈베르트, 동화작가 안데르센,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등, 웬만한 독자는 이름만으로도 대략 어떤 사람인지 짐작을 할 정도의 위인들에 대한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선입견으로 볼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더구나 근래에 영화에서 히트를 친 ‘왕의 남자’ 등을 생각해 보면, 이제 ‘동성애(同性愛)’라는 단어는 특별히 문제시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 동성애는 하나의 취향




혹 동성애적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신체적으로도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봤습니다만, 조사를 한 자료에 의하면, 특별히 신체적으로 무슨 특징이 있어서 동성애를 원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보다는 그냥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방향으로 끌리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신체적인 특징을 생각해 본 것은 낭월도 나름대로의 경험(?)이 있어서입니다. 남자는 남자인데 목소리나 태도가 여성적인 사람을 만나봤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취향은 대략 남성적인 것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낭월의 생각으로는 신체적으로 이성(異性)에 대해서는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동성(同性)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일 것이라고 봤었습니다. 물론 태도에 의해서 그러한 성향을 참고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것으로 완전히 몰아 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사당패는 동성애 공급원?




남사당이니 여사당이니 하여 예전에 유랑극단으로 자유로이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러한 이야기는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잘 묘사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복색을 하고 대감님을 찾아가서 하루 저녁의 서비스를 하고 화대(?)를 받아서 또 다음 고을로 떠나가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동성애라고 하기 보다는 동성매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남사당을 일명 ‘남색(男色)’이라고 했다고도 하네요. 그것은 아마도 ‘여색(女色)’과 대비되는 말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남자로써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두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일명 ‘비역’이라고도 한다는데, 네이버사전에는 한자표시가 되어있지 않아서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에서도 동성애는 암암리에 묵인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네요.




4. 여성처럼 생긴 남성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의 남성을 보셨을 것입니다. 낭월도 두어 번 정도의 만나 본 경험이 있어서 문득 생각이 나네요. 여기에 대해서 약간의 느낌을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당시의 나이는 대략 23~4세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한 번은 모처에서 머물면서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절에서 일을 봐주던 고등학생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하는 태도와 행동은 영판 여성의 애교라고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물론 외양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 녀석이 밤이 되면 방에 들어와서는 미적미적하면서 나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가서 자라고 호통을 쳐봐야 노여워하기는커녕,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가는데, 왜 그 느낌 있잖아요. 정말로 찝찝한 친구였다고 하겠습니다. 이 친구로 인해서 항상 방문은 잠그고 자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또 한 번은 모처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나그네 스님이 찾아 온 것입니다. 대략 봐서 나이는 60세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 절은 협소하여 따로 방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하루 저녁을 그냥 함께 지내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화상이 저녁을 먹고 나더니만........ 자신은 동성애의 성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왠지 강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여성과 관계를 하면 더러운데, 남성과 관계를 하면 깔끔하다나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기분이 찝찝하여 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법당으로 가서는 밤새 기도나 하자고 그야말로 억지로 철야정진[밤새워서 수행하는 것]을 했지 뭡니까 하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스타일에서는 여성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태어 날 적에 삼신할머니가 깜빡 졸아서 잘못 성기를 붙여주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사람을 만나봤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여성이면서도 남성적인 취향이 강한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바꿔서 생각해서 무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낭월에게 접근(?)을 했던 사람들은 여성역할의 취향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5. 무슨 심리일까....???




물론 낭월의 관심사는 심리적인 구조에 대한 것입니다. 보통 자연의 이치에서는 이성을 만나서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상식인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다소 색다른 관점으로 동성을 사랑하는 심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사람의 심리구조에 대해서 파고들다가 보니까 여기에서도 마음속에서 궁금증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심리적인 관점의 기준은 십성(十星)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자의 경우에는 재성(財星)을 여성으로 보고, 여성의 경우에는 관살(官殺)을 남성으로 보고 대입하는 것인데, 과연 동성애의 경우에는 어떻게 봐야 하겠느냐는 것이 낭월의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관점을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6. 여성역할의 남자와 여성역할의 여자




이러한 경우에는 아무래도 관살(官殺)을 남자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이 재성(財星)의 역할을 하고자 하기 때문에 사주에서 관살을 보게 되면 동성애의 기질이 된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확인을 할 방법이 없네요. 그냥 하나의 추론으로 그쳐야 할 모양입니다. 사실 확인을 할 방법이 없기도 하지만 사주에 관살이 있는 남자나 여자에게 ‘당신은 여자의 역할이 어울린다’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있겠나요? 그러다가 그야말로 볼때기를 얻어맞기 십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동성애로 보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하겠으니 또한 소용이 없는 공상일 뿐이네요.




그렇다면 ‘동성(同性)은 비견(比肩)이므로 사주에 비견이 작용을 하고 있으면 동성을 좋아하게 된다’는 설은 어떨까요? 오히려 답은 가까이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공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비견(比肩)이거나 겁재(劫財)의 영역에서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몇몇 주어진 동성애의 자료를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냥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둬야 할까 봅니다.




여하튼 동성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뭔가 그에 대한 심리적인 연결고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살피고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백쌍 정도의 자료는 있어야 뭐라고 관찰을 한 결과를 생각해 보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이것은 통계적으로라도 확인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답을 얻는데 더욱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망상은 그만 접습니다. 물론 황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다만 낭월의 화두는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심리가 사주에 나타날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흔적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인데, 앞으로 이러한 낭월의 생각에 도움을 주실 동성애적인 기질이 있으신 벗님께서 자료를 보내 주신다면 참으로 소중한 힌트를 찾을 수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 주시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형편이 되면 동성애자들의 모임과 같은 곳에서 연구를 해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관찰을 해 보고자 하는 생각도 드네요.




사람의 심리가 사주에서 출발한다고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 망상은 이제 동성애자의 성향까지 침범(?)을 하고자 하는 낭월입니다. 물론 실패를 전제로 시도하는 것이므로 잃을 것은 없겠지만, 답을 얻을 수가 있다면 오히려 음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동성애적인 성향의 멋진 사람들에게도 큰 방향의 제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노력의 결실이 적다고 하기 어렵겠습니다. 사실 동성을 좋아하건 이성을 좋아하건 그것은 순전히 자유일 것이고, 어느 것이라야 한다는 것도 또한 인간의 기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목적은 ‘행복(幸福)’에 있는 것이고, 또 ‘자유(自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동성애적 성향이 인격(人格)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입니다. 동성애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마음에 고통을 받으시는 많은 벗님들께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6년 10월 29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