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이성과 감정의 사이

작성일
2006-04-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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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화]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의 사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사방에 꽃바람이 일렁이고 있으니 그 마음은 이성적인가요? 감정적인가요? 이런 생각을 뜬금없이 해보는 아침이네요. 항상 심리(心理)분야의 공부를 하게 되면 이성적(理性的)인 면에서의 관찰과 감정적(感情的)인 면에서의 관찰을 놓고 살피게 되는 것이 습관인가 싶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1. 동시에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일 수도 있을까?




이런 생각이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일 수도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생각을 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낭월의 생각으로는 사람에 따라서는 가능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정도의 문제는 있겠네요. 사람이 극히 감정적으로 치우친다면 이성적인 면은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극이 이성적이라고 한다면 감정적인 면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의 본질(本質)은 과연 어떻게 구성 되어있는 심리구조를 갖고 있길래 이성적일 적에는 성현(聖賢)과 같다가도, 감정적일 적에는 금수(禽獸)와도 같은지 과연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곰곰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




2. 양간(陽干)은 감정적이다.




갑병무경임(甲丙戊庚壬)은 양간(陽干)입니다. 이러한 성분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일생 그 사람의 성향이 감정적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양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감정이라는 방향에서 어떻게 이성적일 수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숙제를 안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이성적이고자 노력하는 마음에서도 항상 감정적인 면은 바탕에 깔려서 자극을 조금만 받아도 이내 벌떡~! 일어날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그래서 스스로 감정에 치우진 것으로 인해서 이성적이고자 노력을 하겠습니다만 애초에 바탕이 그러하므로 참으로 어렵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놓고 관찰을 하게 된다면 음양의 이치와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즉 빛이 양(陽)의 대표라고 한다면 과연 빛을 향해서 이성적으로 부드럽게 행동하라고 하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과연 말이 되지 않겠습니다. 빛은 있는 그대로를 모두 쏟아 내어야 하는 성분인데 이러한 성분에게 조절을 하라고 한다면 맘대로 되겠느냔 말이지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직선(直線)이기도 합니다. 양간(陽干)의 모양새가 그렇다고 관찰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불구불하게 굽어진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빛과 직선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관찰을 해서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3. 음간(陰干)은 이성적이다.




음간은 을정기신계(乙丁己辛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일생을 이성적인 형태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늘 감정적인 것을 사귀고자 마음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석을 해 봅니다.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음적(陰的)인 사람이네요. 그래서 뒤에서 바라다보면서 관찰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마치 영화를 찍는 장면이라고 한다면 감독(監督)에 해당하겠습니다. 양적(陽的)인 성분은 배우들이겠지요. 그리고 음에 해당하는 성분은 감독입니다. 관찰하고 살피고, 명령을 내리지요.


배우보다 더 뛰어나다고요? 아무래도 총체적으로 지휘를 하므로 그렇게 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배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봐도 되겠습니다. 그럼 감독에게 배우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잘 할까요? 아마도 잘 못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스필버그나 임권택씨가 배우로 출연을 한다면 영화가 될까를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음은 음의 자리에 있을 적에 그 재능이 돋보이는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배우는 영화에 찍히고, 감독은 영화를 찍는 것이지요. 이것이 영화제작의 음양이라고 관찰을 해 봅니다. 그리고 감독의 역할은 얼음같은 이성으로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일언반구를 모두 감독해야 합니다. 그러게 잘 하면 좋은 영화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함량이 미달인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독에게 이성적이면서도 감정적일 수가 있느냐고 질문을 던져본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요? 아마도 머리가 차가워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객관적인 내용을 담지 못하고 주관적인 내용으로 결과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관객의 일부분만 수용이 될 것이고, 다수는 외면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영화는 얼음같은 머리로 관찰하면서 만든 것이라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4. 벗님은 감독이세요? 아니면 배우세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나는 배우 형인가 아니면 감독 형인가를 살펴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시를 하는 일이 많으면 감독 형이고, 실행을 하는 일이 많으면 배우 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낭월은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사이를 관찰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태어난 성분은 음간(陰干)인가 싶습니다. 하는 짓을 보면 기본적인 함량의 성분을 알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벗님도 사주팔자는 잊어버리고 하는 행동을 통해서 사람을 관찰하는 시간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사색(思索)을 즐기는 사람은 감독 형이고, 음간입니다. 그리고 행동(行動)을 즐기는 사람은 배우 형이고 양간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색을 즐기고 또 대로는 행동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두 성분이 포함되었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은 다 이렇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5. 치우치면 병이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거나 치우치면 병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치우치게 되면 현실에 적응을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몽상가(夢想家), 공상가(空想家)에 해당하는 영역이네요. ‘실현 못할 이론가’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생산성이 최대로 대우를 받는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적응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뭐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도태(淘汰)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현장은 생존이냐 사망이냐로 구분되어지는 냉정한 것인가 싶습니다.


반대로 너무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적응하기 어렵겠지요. 이렇게 되면 아마도 여럿이서 공무를 해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될 지도 모릅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한 세상에서 아무도 써 주지를 않을 것이므로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6. 이론가(理論家)와 실천가(實踐家)의 특성(特性)




무슨 일이거나 어느 방면이거나, 이론가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고 궁리를 하고 발표를 하지요. 이렇게 연구하는 것은 자평명리학의 이론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론가의 극단적인 면은 ‘탁상공론’이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도 되겠습니다. 여하튼 이론은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은 사실인가 싶습니다. 적어도 이러한 사람들은 옆에 폭탄이 떨어져서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가만 있어봐~!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고. 이 폭탄이 테러용인지 전쟁용인지, 그리고 어느 국가에서 제도되었는지 지금 판단하지 않으면 폭발을 한 다음에는 확인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냉정히 살펴보자구~!”




감정적인 사람을 실천가(實踐家)라고 이름을 붙여 봤습니다. 가능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보다 행동에 비중을 두는 사람이라고만 이해가 되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고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웃습니다. ‘비겁한 겁쟁이들...’이 되겠네요. 그래서 직접 자신이 나서서 일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겠습니다. 그러니까 실천가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말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하겠습니다. 앞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아니,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나온단 말여? 정말 미쳤구만, 미쳤어~~! 얼른 수구리고 엎어지던지 아니면 냅다 튀어~! 우선 살고 나서 뭔 이야기를 해야지. 여하튼 머리만 쓰는 것들은 한심하기가 말로 다 할 수도 없다니깐.”




하하~ 스스로 생각해보니 좀 우습기도 하네요. 그래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있을 것 같네요. 이와 같이 이성적인 사람의 생각하는 모습과 감정적인 사람이 행동하는 모습은 서로 큰 차이가 난다고 전제를 하시고 관찰하시면 되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질러 놓고 보는 형’과 ‘생각해보고 시작하는 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7. 목화(木火)성향과, 금수(金水)성향




다시 오행으로 관찰을 해보게 되면 목화는 행동부터 하는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하겠고, 금수는 생각부터 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상(五常)을 보면 목화는 예의에 밝으니, 행동하는 것에 비중이 맞춰져 있다고 하겠고, 금수는 지혜에 깊으니, 생각하는 것에 비중이 맞춰져 있다고 관찰을 해도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넓은 것과 깊은 것의 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넓은 것은 ‘사물의 상황에 대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고, 깊은 것은 ‘사물의 상황에 대해서 거기까지’ 생각하는 스타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늘 용의주도하다고 하는 금수지만 또 음험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반대로 예의에 밝은 목화지만 또 경박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겠으니 이것도 알고 보면 다 음양(陰陽)의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8. 토(土) 성향은?




항상 뒤에 남아서 거리적거라는 것이 토임에는 분명합니다. 여기에서도 어디엔가 끼지를 못하고 어정대다가 다시 끝에 걸려드네요. 토의 모습에서는 늘 어정쩡함을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늘 제3의 관망자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고도 하겠습니다.


다시 여기에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봅니다. 이성적이냐 감정적이냐는 문제였군요. 토는 이성적인가요? 아니면 감정적인가요? 이렇게 물어야 하겠습니다만, 답은 찾으셔도 좋고, 그렇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낭월이 준비한 답변으로 상을 차리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낭월의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의 성향은 상대적(相對的)입니다. 상대성(相對性)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어느 물리학자가 상대성이라는 말을 해서 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만 그래서 낭월도 이러한 말을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는 상대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을 해야 하겠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상대적으로 경우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감정적인 사람에게는 이성적인 면으로 나타납니다. 서두르고 허둥대면 차분하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분명히 이성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런 때에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을 만나면 감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침체되고 생각에 골몰할 적에는 잠시 전환을 하기 위해서 산책이라도 나가라고 하겠습니다. 생각만으로 치우치게 되면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주의 구성과 무관하게 오행의 구성을 설명해 드리는 것인데 다행히(?) 공부가 되셨다면 사주를 적어 놓고 관찰을 해 보시는 수고를 하신다면 그 값은 나올 것으로 생각되네요. 하하~




그래서 이성적인 사람이 토를 만나서 활동력을 얻게 되고, 감정적인 사람이 토를 만나서 차분해 진다면 토는 참으로 필요한 성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색깔이 문제입니다. ‘누리끼리’한 것이 이 녀석의 색이잖아요. 그래서 선명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양쪽에서 죄인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따돌림을 당하겠지요. 사실 토는 따돌림을 당해서 혼자 있을 적에 가장 토다운 면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허공(太虛空)’과 같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럴 수가 없겠네요. 이내 목화금수(木火金水)의 성분들이 혼자 생각만 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요.




이 토(土)는 다른 곳에서 찾으시면 안 됩니다. 바로 벗님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슨 소리’가 바로 토의 소리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본성(本性)의 소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神)의 계시’라고도 하겠습니다만, 결론은 같은 것입니다. 저울에 달아보면 완전히 같은 중량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놓고 구분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이 없는 넘이 밭고랑이나 세고 있는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는 토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을 떠난 곳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선명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냥 언뜻 스쳐서 지나가는 듯한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요. 다만 이러한 것을 주시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 사이에 번득이는 지혜의 창고를 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벗님의 공부는 끝이 나는 것이겠네요. 비로소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낭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처럼 이해를 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 것이 아니고요. 낭월의 희망이고 꿈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모처럼 생각의 시간을 얻어서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 관찰을 조금 해 봤습니다. 날씨가 참으로 화창하네요. 그런데 왜 하늘이 뿌연하게 변해 있나요? 온통 누리끼리 한 것이 토의 천지 같네요. 그야말로 ‘황사’로군요. 토가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이렇게 온 천지에 먼지가루를 뿌릴 적에는 그런 생각을 취소하고 싶어진다니까요. 하하~




       2006년 4월 1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