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칭다오와 라오샨

작성일
2006-03-28 17:17
조회
6221
 

[제297화] 칭다오(靑島)와 라오샨(嶗山)








동천선생의 손님 접대는 확실합니다. 그만큼 돈이 많이 부서지겠지만, 편관의 ‘확실한 봉사정신’은 어김없이 발휘가 되는 것 같습니다. 가게자리를 살펴보고 호텔에 짐을 풀고는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칭다오는 바다와 접해 있습니다. 우리의 태안반도과 거의 마주보고 있는 셈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가장 풍경이 좋은 위치의 멋진 해산물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면, 낮에 같으면 그 풍경이 다 보이겠지만 밤이라는 것이 말이지요.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으니 그 멋진 자리에 위치한 풍경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기회임에도 식당의 내부만 보게 되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는 것이 동천선생의 생각이었습니다.


나그네야 그 풍경이 아무리 좋은들 보이지 않으니 달리 감회가 있을 것도 없겠기에 말입니다. 여하튼 그 풍경이 참 좋다고 하시기에, 한국의 해금강 정도로 머리에 담았습니다. 그만하면 손님을 초청한 동천선생도 덜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참, 중국에서는 자신이 돈을 낼 적에는 ‘칭커(請客)’라고 합니다. 글자로 봐서는 손님을 청한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오늘은 내가 쏜다~!’‘는 분위기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1. 진수성찬(珍羞盛饌)




진수성찬의 한자가 이렇게 복잡한가요? 말로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한자변환을 해 놓고 보니까 복잡하기 그지없네요. 자칫하면 식욕이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하하~


 



[품명: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불도장, 불도장이라니까 불붙은 도장이 생각나시진 않는지요? 수행하는 스님이 길을 가다가 그 냄새에 미쳐서 담장을 넘었다는 고사가 있는 요리랍니다. 금산선생님의 선정한 메뉴입니다.]


 



[위의 요리를 넣고 끓여서 요렇게 생긴 그릇에 담아서 내어 옵니다. 맛은? 그럴싸 하지요. 그런데 고기배가 많이 고픈 스님이 담장을 넘었다고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놀랄 정도는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하~]


 



[주객이 둘러 앉아서 식도락을 즐깁니다. 돈내는 분이나 얻어먹는 분이나 이 순간은 모든 것을 잊고 그 맛에 빠져들지요.]


 



[랍스타 회는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마도 제법 비쌌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먹을 때는 몰랐는데 사진을 보니 그렇겠습니다.]


 



[버러지가 아니고 매미볶음이랍니다. 사진만 찍었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요리의 제목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졸졸 따라다니는 점원에게 손가락질만 하면 됩니다. ‘물론 볶아줄까?’ ‘지져줄까?’ ‘구워줄까?’ ‘삶아줄까?’ 에 대한 답은 못하겠지만 그냥 웃으면 알아서 해 줍니다.


 



[이건 아무래도...... 버러지 같지요? 그냥 노랑누애라고 생각하지요뭐. 이것도 구경만 했습니다. 아무래도..... 좀....]


 



[이렇게 요리의 이름과 재료를 보여줍니다. 보기만 해도 어떻게 맛이 나올지 대략은 짐작이 갑니다.]


 



[제목도 기네요. 계화은사초어두랍니다. 뭔 뜻인지는 낭월도 모르지요뭐]


 


그리고 사실은 아무렇게 해줘도 다 맛있거든요. 다니면서 먹어 본 결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간단합니다. ‘음식을 모르면 비싼 것을 시켜라’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식당에 가서는 제일 비싼 것을 시키면 맛이 좋은 것은 보증을 할 만 합니다.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가장 싼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멋진 맛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하튼 이날 저녁의 식당 분위기는 능히 만족을 할 분위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테이블도 생기운이 모여있는 자리를 찾아서 앉았으니 더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어허~ 벌써 잊어버리셨군요. 우리에게는 지기전문가 금산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이지요.




2. 도사가 있다는 노산 탐방




라오샨이라고 하는 노산을 찾았습니다. 칭다오에서는 가장 유명한 산이면서 도교(道敎)에서도 상당히 비중이 있는 성지라고 하여 꼭 가보고 싶어서 여행 목록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사가 있으면 지리학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산세를 보니까 좀 볼품이 없어 보이네요. 그래도 기운이 뭉쳐있는 것은 확실하겠습니다. 산동평야를 달려서 온 기운이 이렇게도 암석지대를 만들었으니 말이지요. 여하튼 잘 둘러봤습니다.


 



[노산의 풍경입니다. 중턱에 도관이 하나 있는데 보이시는지요? 여기 사는 도사가 바른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노산 태청궁 명패로군요.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도사를 만났느냐고요? 물론 만났지요. 그리고 각자 찾아가서 면담을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해야 한다는 것에 의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낭월의 면담에 대한 결과로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높은 곳에 들러서 도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중턱의 도관에서 기측정도 하고, 사진도 찍고, 여행객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엘로드가 말을 들으면 기특하지요. 그런데 이것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대로 끝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기술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수련이 많이 필요한 낭월입니다.]


 



[시종일관 바위 투성이입니다.]


 


삭도(索道)를 타고 산을 올랐습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으로는 이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 최고지요. 물론 인천의 도향(道香) 선생님과 동행을 하실 적에는 이러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산은 두 발로 걸어야 제 맛이 난다고 주장하시거든요. 물론 그래서 무척 건강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꽤만 남은 낭월에게는 장비를 이용해서 결과물만 보겠다는 편재적 성향이 가득하니 달리 방법이 없겠습니다. 하하~


 



[위에서 내려다 보니 바다를 인접하고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어촌의 풍경이라고 하겠습니다.]


 


2004년에 함께 동행을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 당시에 태산을 오르는데 따라 나섰다가 화인이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혹 태산을 오르실 적에는 이러한 점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노산의 실체




맨 위에 있는 도관에 도사가 산다는 말을 듣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별도로 입장료까지 지불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얻은 결론은 ‘노산에는 도사가 없다’입니다. 참, 여기에서 도사의 개념이 중요하겠습니다. 도를 닦는 선비라고 한다면 혹 모르겠습니다만, 자연의 이치에 통달하거나 그에 근접한 실력자가 없다는 의미로는 도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도사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도관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풍수학이나 운명학에 대해서 연구를 하느냐고 했더니, 혹 관심이 있어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면 큰일이 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래에서 도사를 만났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웃었습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다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속은 거요’라는 느낌이 쪼매 들었습니다.


 



[근사해서 제법 비싸겠지요? 그런데 공짜입니다. 결국은 차를 사라는 것이었기는 했지만 지독하게도 사지 않았습니다. 도사(?)와의 면담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열심히 마시기만 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도관은 도관으로 존재하고, 도관에 도사가 살아야 한다는 공식은 믿지 않아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도사를 면담하면서 느낀 것은 2004년에 피서산장에 가서 도사를 만났을 적에 들은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실체를 파악했다고 하면 좀 경솔하겠지만 확실한 ‘상통천문 하달지리’하는 도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산 중턱의 진짜도사인 사람의 표정입니다. 노산에는 당신들이 찾는 도사는 없다고 하는 말을 해 줬거든요. 옆은 약손도사 효천선생입니다.]


 



[해인사유지라고 하는 글이 서있는 비석입니다. 웬 해인사? 사실은 왕조와 종권이 바뀔때마다 종교전쟁이 심각했던 중국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도관을 헐고 절을 지었다가, 또 절을 헐고 도관을 지은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태청궁의 자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현장이기도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에고~ 이 아지매 하는 것좀 보소. 남들은 동전을 물에 띄우고 소원을 빌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종이 돈 위에 동전을 얹어서 띄웠다고 기도를 합니다. 누구라고는 차마 말하지 않을랍니다. 웃자고 하는 일이겠지요. 사실 모인 관광객들이 모두 즐겁게 웃었습니다.]


 



[향로 한번 푸지게 크네요. 좋은 기운이 나온다고 알려져서 손을 대보고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향로가 여기저기 많이 있습니다.]


 


4. 강유위를 아시나요?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강유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가 되어 있네요. 참고하시라고 옮겨 드립니다.




캉유웨이 [康有爲, 1858.3.19~1927.3.31]


중국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의 학자 ·정치가.




자 광하(廣夏). 호 장소(長素). 별명 조이(祖詒). 광둥성 난하이현[南海縣] 출생.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전통적인 유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공양학(公羊學)을 배우고 널리 유럽의 근대사정도 익혔다. 그 무렵에 격렬해진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따서, 국회를 열고 헌법을 정하여 입헌군주제로 하는 정치적 개혁[變法自疆]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고향에 사숙(私塾)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열고 량치차오[梁啓超] 등을 교육하는 한편, 황제에의 상서(上書)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그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은 제사(帝師)인 옹동화(翁同龢 )를 통하여 광서제(光緖帝)에 받아들여져 무술변법이라 불리는개혁을 지도하였다.

과거(科擧)의 개정, 실업의 장려, 부정관리의 정리 등, 그 내용은 시대의 조류에 알맞은 것이었으나 개혁의 추진력이 궁정 내의 일부에 한정되었고, 국민들과의 광범한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00일변법’이라 불리고 있듯이 불과 100일쯤 뒤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배반으로 실패로 끝나고, 서태후(西太后)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모든 것을 원상대로 환원시키자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보황회(保皇會)를 설립하여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틈타 광서제(光緖帝)의 복위를 꾀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차차 쇠퇴하여 쑨원[孫文] 등의 혁명파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봐서 흡사 김옥균과 같은 스타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워낙 이러한 분야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는지라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서 이해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일세를 풍미한 사람의 묘가 칭다오에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앞의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5. 강유위의 고택과 산소




우선 강유위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고 해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입장료를 내고 둘러보면서 집터가 무척이나 좋다고 하는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금산선생님의 확인과 낭월의 실험에서는 상당히 강한 지기가 감도는 곳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강유위 고택이 있는 부근의 있어 보이는 사람들 집입니다.]


 


관리하는 여성이 나와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찍으라고 배려를 해 줬습니다.


 



[강유위의 고택입니다. 아담한 모양이라고 해야 할란지....]


 



[강유위고거(康有爲故居)라고 하는 현판이 보입니다.]


 



[강유위가 큰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입구에 이러한 동상이 있네요.]


 



[강유위에 대한 소개입니다. 잘 아시게지요? 사실은 간체로 써 있어서 보기도 어렵네요. 찾아 보시려면 그러시고 아니면 그냥 넘어 가셔도 좋겠습니다.]


 



[강유위의 공부방에서 바라본 창문입니다. 문을 열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겠네요. 이렇게 앉아서 꿈을 키웠으리라고 짐작을 해 봤습니다.]


 



[침상이라고 합니다. 좋은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확인을 해 봤습니다.]


 



[글도 참 못썼네요. 거의 낭월 수준입니다. 뜻은요? 가슴 속에 불이 나는 것을 찹는 마루라고 할까요?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애통해 하면서 분을 삭이는 마음으로 썼으리라고 짐작을 해 봅니다. 세상 경영도 어렵지만 자신의 마음 다스리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주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강유위의 사주는 戊午 乙卯 辛亥 乙未로 6대운입니다. 원수산 선생의 명보(名譜) 맨 끝에 나와 있는 자료입니다. 그의 개혁적인 성향이 사주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소는 훨씬 많이 떨어진 청도사범대학의 뒤쪽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찾았습니다. 묘 터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하고 여러 가지로 점검을 해 봤습니다만 자리는 제대로 잡았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주변의 풍경은 뒤로 산을 끼고 앞으로 바다를 바라다보는 분위기여서 시원해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한국과 같은 명당의 느낌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였습니다.


 



[강유위의 묘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대단한 규모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6. 산세의 풍경




칭다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세는 토질이 무척이나 척박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산의 풍경도 바위투성이여서 삭막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의 위력을 느껴보는 것이 좋겠네요. 노산에서의 풍경도 모두 같은 분위기라고 하겠습니다.


 



 



 



 


뭔가 떠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를 받았습니다. 대략 이 정도로 칭다오 주변을 정리하고, 다음에는 태산나들이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006년 3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