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공자묘를 친견하다

작성일
2006-03-2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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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공자묘를 친견하다








칭다오에서 아침부터 출발을 했습니다. 그래도 비교적 새벽에 약한 동천선생인지라 꼭두새벽에 출발하지는 못했는데, 그로 인해서 저녁이 바빠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차는 산타페를 빌렸습니다. 동천선생의 차는 승용차라서 인원이 6인이 되는 바람에 산타페와 바꿨다고 하시네요. 준비도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지나는 길에 지형공부도 하시고요.]


 



[산동성의 위치와 방문할 곳의 지점 정도를 이해하려고 지도를 찾아 봤습니다. 곡부까지 승용차로 달렸는데, 7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내친 김에 칭다오 위치도 대략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산동평야를 지나서




산동의 넓은 들이야 전에도 봤습니다만 여전히 광활했습니다. 곡부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로 제남부근까지 가서 다시 곡부로 향하는 길로 이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차를 세우고 풍경도 감상하고 휴식도 취하면서 곡부에 도착하니 4시경이 다 되었더군요. 아마도 7시간 정도는 걸려서 도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겨울이니까 전에 봤던 여름의 옥수수밭 과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주로 과실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우스도 꽤 많이 보였습니다. 효천선생의 말로는 쪼그만 땅을 놓고 찢어먹으려고 싸우는 놈들은 모두 산동평야에 일주일만 내려놓으면 고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마음이 넓어진다는 표현인가 싶습니다. 중국이 대국인 이유가 땅에 있다면 이렇게 넓은 들에서 나온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취부(曲府)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동상입니다. 공자님께서 제자들과 춘추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시던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2. 공묘를 들려서 공림으로




공자님 사당은 공묘(孔廟)라고 합니다. 거주하던 집은 공부(孔府)라고 하고, 여기에서 만들었던 술은 공부가주(孔府家酒)가 맞나요? 그냥 그런가보다 할랍니다. 하하~ 그리고 공씨에도 안의 공씨와 바깥의 공씨로 나뉘는데, 안의 공씨는 정통이고 바깥의 공씨는 정통이 아니라고 한다네요. 여하튼 공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어려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보통은 자신의 성씨를 말하면 무슨가라고 해야 한다잖아요. 박가, 최가, 조가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공가라고 하면 조상님께 혼 난다네요. 공씨라고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특별대우를 해도 되는 건가요? 여하튼 큰 성인이라고 하는 공자어른이 나온 족보이니까 그렇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진위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도 그렇지 싶습니다.


그리고 왕가라고 하면 안 된다던가요? 왕씨라고 해야 한다지요? 아마도 그렇게 들었는데 하도 오래 전이라서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공씨는 틀림없이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낭월도 벌써 두 번째로 공자님을 뵈러 왔으니까 대단한 것은 사실이네요. 하하~


정문에 도착하니까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내원을 하나 샀습니다. 예쁜 낭자였는데, 다부지게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성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과 다투면서 부랴부랴 공묘를 둘러보고 본전에서 기측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금산선생님께서 놀라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과연 틀림없이 제 자리에 정확하게 잡았다는 것이지요. 일행이 모두 엘로드를 잡고 실험을 하는 사이에 관광객들도 모여들어서 뭔가? 하고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처음 봤겠네요. 그래서 자동으로 벌어지기도 하고, 오므려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공자님의 사당 본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에 공자사당은 많이 있습니다만, 여기야말로 본거지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혹 나중에 공묘에 가실 기회가 있으시거든 엘로드를 하나 챙겨서 가보세요. 물론 그 이전에 기에 대한 감지가 정확하게 되신 다음이라야 하겠습니다만, 상당히 강한 지기가 뭉쳐 있는 것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낭월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둘러리를 서는 정도라고 하겠습니다만, 작동되는 엘로드의 모양으로 봐서는 기의 센타 한 복판에 건물의 중심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밖에서 확인을 해 봤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추녀의 끝에서 기의 울타리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기의 테두리만큼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지요. 앞으로 집을 지을 적에는 이러한 것을 살펴서 그 땅에서 허용하는 만큼의 크기로 집을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게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공묘를 둘러보고 나니까 가이드 아가씨가 이야기를 합니다. 시간이 공부를 둘러보거나, 아니면 공림을 봐야 하는데, 두 군데를 다 볼 시간은 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동천선생이 공부는 뭐고 공림은 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얼른 설명을 해주고 공림을 가려면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공림으로 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공림에는 공자님의 묘가 있답니다. 그러니 당연히 묘가 있는 곳으로 결정을 할 밖에요.


공림에 오니까 마감시간인 4시 50분이었습니다(기억에 의하면). 그리고 재치가 있는 아가씨는 삼륜차였나..... 뭘 급하게 불러서 일행을 태웠습니다. 얼떨결에 아가씨의 활약에 모두는 압도당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마감시간이 딱 되면서 공림의 정문에 도착하게 된 것을 알고 나서야 아가씨가 서두른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3. 울타리를 넘어서




공림은 공씨들의 문중묘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묘들이 가득하더군요. 그리고 공자님의 묘는 맨 안쪽에 있었습니다. 참배를 하고, 둘러보니까 다른 관광객이 다 빠져나가고 우리 일행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이드 아가씨에게 그랬지요. 저 안에 들어가서 연구를 할 것이 있다고 말이지요.


물론 아가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이드 자격증을 박탈당할 수가 있으므로 그럴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다고 그 말을 들을 우리 일행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 가봐야 하니까 혹 관리인이 오면 적당히 잘 둘러대라고 하고는 담을 넘었지요.


사실 좀 무모했습니다만, 이번 여행길이 관광이 아니고 풍수공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좀 무리를 했습니다. 벗님들께서도 양해를 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 묘소의 비석]


 


 



[큰 스승님 묘소에서 기념 사진 한 장은 찍어야 하겠다고 생각이 되어서 모자를 벗었습니다. 괜히 숙연해 지더군요. 그래서 산소는 그 존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봐서도 아시겠지만, 참으로 허술한 묘지였습니다. 크기는 제법 컸습니다만, 주변의 규모로 봐서는 강유위의 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3000여 년 전의 세계적인 대 성인의 묘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벗님의 생각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석은 그럴싸했는데 묘지는 도무지 가꾼 흔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중국정부의 태도를 조금은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죽은 시신이야 가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묘지를 잘 가꾼다면 모조리 화장장으로 보내는 현정부의 통치에도 차질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거든요.




4. 묘의 중심에 잡히는 기운




그렇게 묘지로 올라가서 기를 측정해 봤습니다. 금산선생님의 의견으로는 좌향은 알 수가 없지만 자리는 정확하게 잡았다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심룡척을 꺼내어서 회전을 시켜봤는데, 60여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 정도면 대단한 기운이라고 하시네요. 보통은 30바퀴만 돌아도 큰 자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떼의 관광객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아가씨는 펄쩍 뛰었습니다만, 우리는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따졌습니다. 저 사람들은 뭔데 무엄하게 산소에 들어가서 저러고들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번 여행에 동행을 했던 동천선생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난감해 하고 있는데, 이 아가씨의 임기응변이 대단하더랍니다.




“아, 아니예요. 저 분들은 한국에서 오신 풍수지리를 연구하시는 학자들입니다. 지금 실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 천연덕스럽게 받아 넘기더라는군요. 어디가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네요. 말 주변이 말이지요. 그런데 관광객들이 나가면서 관리자에게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비로소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래서 혹시라도 낭월의 비싼(?) 캠코더를 압수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부랴부랴 가방에 우겨넣고, 만약의 경우에 카메라를 빼앗기더라도 필름은 넘겨 줄 수가 없다고 판단을 하고는 얼른 꺼내어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침을 떼고 늠름하게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의연해 보이지요? 카메라를 허둥지둥 감추고 이렇게 시침을 떼고 있습니다. 이녀석의 코에서는 좋은 기운이 나온다고 가이드가 말을 해 주더군요. 그래서 시키는대로 폼을 잡고 있습니다. 좀 가증스럽지요? 흐흐~]




그 아가씨가 아니었다라면 공자님 묘도 보지 못하고 이러한 자료를 얻을 수도 없었겠다 싶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가이드비 30원이라는 것을 깎아서 20원에 돌기로 했다는데 낭월의 마음 같아서는 100원을 팁으로 주고 싶더군요. 물론 아가씨가 예뻐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맡은 책임을 완수하는 책임감이 맘에 들어서지요. 사실입니다. 하하~




공자묘를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여유를 갖고 주변을 둘러 봤습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이렇게 바쁘지는 않았을 텐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어둠이 내리는 곡부를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길을 잘 못 들어서 다시 차를 되돌렸다거나, 등등의 이야기들은 없었던 일로 하고 마무리 합니다.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2006년 3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