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학문(學文)과 학문(學問)의 사이

작성일
2006-01-14 05:53
조회
6878

[제286화] 학문(學文)과 학문(學問)의 사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이틀 간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만 갑자기 봄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네요. 비가 내린 덕분에 산천의 눈조각들이 모두 물로 변해서 산에 놀러가기에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새벽입니다. 어제는 너무 일찍 잠이 들었던지 눈을 떠봐도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 두어 시간 거저 얻은 듯한 생각이 들어서 수지맞은 낭월입니다. 하하~


1. 학문(學文)이란


늘 사용하면서도 때로는 크게 구분을 하지 않고 사용하는 말이기도 해서 문득 정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학문(學文)이 뭐지요? 배울학, 글월문, 그렇다면 글을 배우는 것이 학문(學文)이 되겠네요. 글을 배우는 것을 학문이라고 하니까 틀리지 않았겠습니다. 그렇다면 글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지난 사람들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글을 배운다는 것은 고인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고인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은 또 다른 말로 독서(讀書)라고도 하던가요? 글을 읽는다는 것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독서(讀書)와 학문(學文)은 같은 뜻인가요? 근데 왜 느낌이 다르지요?


사실 글을 읽는 것과 글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이고, 글을 배운다는 것은 그 속뜻을 음미한다는 뜻이겠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어찌 생각을 해보면 겉으로 드러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라고 한다면, 속으로 숨겨진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학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공부를 하신다고 하면 아마도 독서와 학문(學文)이 함께 할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낭월의 스타일을 보게 되면 우선은 독서를 통해서 대략적인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학문(學文)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형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벗님의 공부 방법은 어떠신지요?



그렇다면 학문(學文)은 그야말로 '겉과 속을 살펴서 깊이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사실 책을 한 권 읽기는 쉽지만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소화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가령 적천수를 예로 들어본다면 그 책을 본지가 어느 사이 20년이 되었습니다만 올해에 다시 보면 또 새로운 내용이 보이니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으려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마음을 모아서 본 책이 몇이나 되겠느냐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글을 배운다고 하지만 실은 10%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이미 고인들께서 후학을 위해서 자세하고도 정성스럽게 적어 놓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의미를 모르고 겉핥기로 시늉만 내고 있으니 이러한 후학을 보시면서 고인들께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할까..... 싶은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되지는 않으니 부단한 노력만 있을 뿐이겠습니다만, 때로는 자신의 우둔함이 안타까울 때가 많네요.



정독(精讀)을 하여 깊은 뜻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지요? 벗님이야 이미 글의 맛을 아시기 때문에 능히 그러한 의미를 잘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얼른 읽어 치우지 못하고 자꾸만 책장이 뒤로 넘어가는 독서를 보면서 혀를 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담양오전집'은 자꾸만 책장이 뒤로 넘어가네요. 이 어른의 책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려야 한 번이나마 대충이라도 읽을까 싶습니다.



학문(學文)을 할 적에는 이와 같은 노력과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냥 독서라고 하고, 학문이라고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문의 의미를 바로 생각하고 정리를 해봤습니다. 크게 틀리지 않았으리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혹 더 깊은 뜻이 있다면 낭월에게 귀뜸이라도 해주시면 또한 감사하겠습니다.


2. 학습(學習)이란 말도 있는데....


학습이라는 말은 이미 흔한 용어가 되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이지요. '배우고 또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않은가'라는 의미입니다.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다시 생각을 해보면 학문(學文)을 실습(實習)한다는 의미로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학문(學文)으로 이론적(理論的)인 부분을 습득한 다음에는 학습(學習)을 통해서 소화(消化)를 시키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은 글들이 머리밥통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두고두고 소화불량증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글을 읽어서 배운 것은 부지런히 연습을 통해서 익혀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고 계시지요? 사실 읽어 두기만 하면 이내 잊어버리는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간에 소화를 시켜버려야 입력이 되어서 내 것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마도 정설(定說)일 것입니다. 그리고 혹 소화가 되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렇게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화가 되지 않으면 이번에는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지면서 다음 대목으로 넘어갑니다.


3. 학문(學問)이란


한국말로는 소리가 다 같아서 사실 구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낭월도 이 용어에 대해서 자꾸만 혼란스러워서 어느 하루는 일삼아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내린 결론이 이렇다는 것을 벗님께 전해드리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학문(學問)은 학문(學文)과 그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학문(學問)의 의미를 뜯어보게 된다면, '배우고 묻는다'는 두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서 형성된 단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어느 단어가 더 높은 경지에 해당하는지 말입니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 속뜻을 생각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아시게 될 것 같네요. 바로 이해가 되셨나요?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일삼아서 생각하는 낭월의 둔재가 측은하시기도 할 것입니다. 원래 이렇게 둔한 것이 낭월이거든요. 하하~



'배우고 묻는다'고 함은, '글을 배운다'는 것의 한참 위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학문(學文)이고, 대학과 사회에서 배우는 것은 학문(學問)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그야말로 대학원(大學院)의 차원에서야 비로소 학문(學問)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드네요.



바로 학문(學文)에서 학문(學問)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학습(學習)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이 단계가 없이 바로 학문(學問)으로 넘어가게 되면 반드시 소화불량성 두통으로 매일 진통제를 세 알은 드셔야 할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산을 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가만히 보면 학습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학문(學問)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이제 길게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이해가 되셨겠습니다. 비로소 학문이라고 한글로 쓰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한자로 적어 놓으면 그 깊은 의미가 나타나게 되니 한자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중국말로 해보면 어떻게 되는지 혹 궁금하지 않으시려나요? 적어보기나 하겠습니다.



학문(學文)은 쒸에원(xuewen)으로 발음을 합니다. 그리고 학문(學問)도 쒸에원(xuewen)으로 하게 되니 중국말도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면 여기에서 '땡~!'이 됩니다. 중국말은 성조(聲調)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래에는 곡조(曲調)가 있는 것과 같이 소리에는 성조(聲調)가 있는 것이지요. 학문(學文)의 문은 2성으로 끝을 올려서 발음해야 바로 알아듣고, 학문(學問)의 문은 4성으로 그냥 우리의 소리와 비슷하게 끊으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중국말의 소리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도 참고로 알아 두시라고 괜히 유식한 척을 해 봤네요. 장(항상) 그렇지요 뭐 하하~


4. 열심히 공부하십시다


결국은 뭔 말을 하고 싶으냐면요. 바로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중국의 사이트에서 풍수와 관련된 글들을 좀 읽어 봤습니다. 책에서 본 내용이 아니고,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오늘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풍수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내용을 보느라고 또 다른 일을 잊어버리고 꾸지람도 들었습니다만, 한 번 빠져들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낭월입니다.



그 중에는 한국의 행정도시를 설계하는데 홍콩의 풍수단체를 한국의 모 단체에서 초청하였다는 글도 보이고, 어느 특정인의 풍수실력이 형편없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책으로만 보던 쟁쟁한 고수들이 그 게시판에서는 그대로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과연 책과 현실의 불일치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요? 그보다도 무슨 말이 있는지 구경을 좀 하시겠습니까? 따끈따끈한 원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我講陳夢國的一個造作他.三重的一個江家作風水.作在宜蘭冬山河.丁山癸向.前幾年作. 他說癸未年要大發.結果那年却大敗!!我上去一看.簡直土公仔都不會這樣做.卦理不通. 形家也不會.本人還忘了告訴爾.他們村子裏的那個人說.陳夢國根本不會形家.而陳夢國現在在敎學生.一個一百萬(줄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몽국이 삼중의 어느 강변의 집에 대해서 풍수로 지었는데, 위치는 대만 의란의 동산 하천 부근인데 정좌계향으로 수년 전에 지으면서 말하기를 계미년(2003)에는 대발하게 된다고 했는데, 실은 그 해에 대패했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 번 가서 직접 봤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흙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렇게 지었는지.... 주역의 괘에도 전혀 아는 바가 없고, 형상의 부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는데 본인이 너한테는 말해주지 않던가 보지. 그들의 마을 안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진몽국은 근본적으로 형세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그는 학생에게 120만원(대략 4500만원 정도)을 받고 가르친다더구만(줄임)


글자가 우리가 쓰는 것과 달라서 깨어진 것도 있는 바람에 조금 고쳤습니다. 물론 내용만 봐서는 형편없는 선생이 엉터리로 잡아주고 대가로 행세한다는 의미가 나타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진몽국은 이번에 대만에 가서 만난 풍수가의 스승이라고 하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위와 같은 글만 봐서는 어디 찾아가서 공부를 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다만 사실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그의 저서가 있으니 글만 보고 이러한 내용을 모른다면 혹시라도 또 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세하게 살피고 있는 낭월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진짜로 재수가 없어서 애써서 일을 잘 해주고 이와 같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또한 모를 일이기는 합니다.



혹 100군데는 모두 잘 했는데, 그 한 곳에서만은 실수를 해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온통 하는 일이 다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다만 낭월의 소견으로는 적어도 바보가 아닌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것만 보고서야 거금을 내고 공부하는 사람이 많겠느냐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그래서 실체는 직접 보고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시면 그래도 재미있으시지요? 또 다른 경우를 찾아볼까요? 그냥 인터넷이라는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하라고 한다면 그냥 우스갯소리라고 하고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星期天4/17和師兄弟參加新竹市星相公會所辦的尋龍之旅同行的有幾位大師..包括..陳建利、還有劉訓昇前輩的傳人以及幾位高人看了幾個新竹山區風水地理其中有二個大地理當然也有一些是虛花假穴甚至絶地最讓我納悶的是其中有一個地據說是位於新竹山區峨眉湖邊--鍾義明大師所主庚的『飛鳳展翅』我納悶的是這個根本不是大地...還是個絶地據主辦單位說...鐘大師造葬後二年內死二人主家連忙搬遷果眞如主辦單位所說這是鐘大師所造葬那我眞該把他的書全部丟掉...(줄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4월 17일 일요일 스승님과 사형제들이 함께 대만 신죽시의 성상공회에서 용맥을 찾아서 답산하는데 동행하게 되었다. 일행 중에는 몇 분의 대가들이 계셨는데, 진건리를 포함해서 유훈승 선배의 전인제자와 몇 분의 고수들이 동행을 하여 신죽의 산촌에 대한 풍수지리를 봤다. 그 중에 두 개의 큰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는 당연히 허화가혈로 겉으로만 명당처럼 보이고 실제로는 거짓된 자리인지라 심하면 절손이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근거로 설명하면 이렇다. 여기는 신죽산촌의 아미호수 주변인데 종의명선생의 주관으로 '날으는 봉황이 날개를 펼치는 형'이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큰 땅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절지에 해당하는데, 그 자리에 대해서 주민이 말하기를, 종대사가 장사를 지내고 나서 2년 이내에 두 사람이 죽고는 주인되는 사람이 바로 이장을 하게 되었으니 과연 진정으로 그가 말하는 대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종의명선생이 잡아 준 것이란 말인가하고 나는 정말로 그의 책을 전부 내다 버렸다.(줄임)


역시 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번역이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혹시라도 잘못 번역해서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면 낭월에게 메일을 주시면 또 배우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아마도 어느 풍수 단체에서 답산을 갔는데, 마침 많은 저술활동으로 유명한 종의명선생이 잡은 자리를 예로 들어서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결과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물론 사람이 잘못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수 없이 다 잘 되었는데, 유독 이 하나가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현지에서 고수들이 용사를 한 것을 보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부지런히 자료를 수집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따져보면 더욱 뛰어난 고수도 늘 오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가령 지창룡선생님이라고 하면 당대에 일류급 지관이라고 하는데에도 처음에 자신이 잡은 명당이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 어딘가에는 자신이 잡은 것이 아니라고 했더라는 글도 봤습니다. 이러한 것이 아마도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 두 차례의 실수는 오히려 인간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자신은 완벽하고 남들은 엉터리라고 하는 중생심으로 관찰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또 진건리라고 하는 풍수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요. 이렇게 알아 가는 것이 공부려니 합니다.


5. 알아야 질문을 하지


여하튼 학문(學問)은 배우고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알게 되면 자연히 질문을 할 마음이 생긴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질문을 해보면, 늘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알아야 질문도 하지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하느냐고 말이지요. 과연 그렇겠습니다. 그래서 학문인가 봅니다. 배우고 알고 익히고 나면 질문을 하게 되고 질문을 하여 답을 얻는 것은 다시 새로운 배움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배움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질문을 할 줄도 모르고 배워서 익히기만 한다면 중간은 간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공부의 깨침이라고한다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물어야 하고, 묻는 것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다고 성현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질문 앞에 평등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하는데, 대학 교수가 질문을 하면 자신이 더 돋보이고, 어린아이가 질문을 하면 자신이 더 형편없이 보이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누구나 질문을 하고, 누구에게나 질문을 합니다. 질문을 하고 또 답을 얻습니다. 문제는 그 답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답변의 수준을 봐서 그 학자의 능력을 평가한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누가 질문을 해도 성실하게 답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실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대로 답을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답변을 하는 것은 남을 속이는 일이니 오히려 답을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답변을 하는 사람보다 수준이 반드시 낮을까요?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항상 질문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실력은 형편없는 것이었을까요? 여하튼 학문의 길은 그렇게 생각하고 배우고 익히며 물어서 답을 찾고 또 제자가 물을 줄을 모른다면 스승이 물어서 제자를 깨우치기도 하는 것이 배움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좋은 질문은 스승을 땀나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통해서 스승도 성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6. 마무리


누구나 학문(學文)하고, 학습(學習)하고, 또 학문(學問)을 합니다. 그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질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완벽한 학문이 없듯이 완전한 스승도 없다고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누구라도 할 수가 있는 실수입니다만, 그러한 것을 개선하고 더욱 정미롭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비로소 학자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한 것에 그냥 안주하게되면 그야말로 술객(術客)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벗님의 오늘 하루는 어떠시려는지요? 어느 부분에 마음을 두시렵니까? 그리고 어느 부분에 마음을 두시더라도 자신의 내공이 발전하는 것은 틀림이 없으니 또한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겠습니다. 열심히 정진 하십시다. 큰 성취가 있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참, 그런데 학문(學問)의 위에는 뭐가 있나요?


           2006년 1월 1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