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故 이은주님의 명복을 빌며

작성일
2005-02-2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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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故 이은주님의 명복을 빌며




요즘의 가장 가슴 절절한 뉴스는 연예계의 이은주님 자살사건인가 싶습니다. 엇저녁에 YTN을 보니까 영결식과 유골안치 장면이 보이더군요. 그렇게 블꽃처럼 살다가 급하게 떠나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얼마 전에 낭월도 개인적으로 일을 겪고 보니 그 부모나 주변의 사람들이 느끼는 황당스러움에 대해서 상당 부분은 공감이 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직업병이 도져서 유골함에 쓰인 탄생일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만세력을 뒤지러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기에 여기 간단하게나마 이해라도 해보려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980년 12월 22일 생 (양력일 경우를 가정함)




아마도 분위기로 봐서 양력일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음력보다는 양력을 선호하더군요. 그러한 점도 판단하는데 참고를 합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추정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은 생각해야 하겠지요. 그래도 확신을 하는 것은 다른 기사라면 몰라도 유골함에 써진 글자는 사실일 것으로 봐서 오히려 신빙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고 하겠습니다. 사주를 찾아 봤습니다.




時 日 月 年


모 己 戊 庚


름 巳 子 申




35 25 15 05


甲 乙 丙 丁


申 酉 戌 亥




시를 모르는 경우에는 모르는 것으로 놓고 제외를 시키는 것이 가장 옳다고 봅니다. 억지로 맞추다가 보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훨씬 많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제외하고 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하는 점을 생각하고 이렇게 대입하고 있습니다. 넘겨짚어서 시를 만드는 것은 과유불급에도 해당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2. 사주의 구조와 용신분석




자월(子月)의 기사(己巳) 일주입니다. 기토(己土)가 자월의 엄동(嚴冬)에 출생했다고 하겠네요. 비록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일지(日支)의 사화(巳火)가 도움을 주고 있는 형상이나, 월간(月干)의 무토(戊土)가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균형이 크게 기운다고 보지는 않아도 되겠습니다. 대략 균형을 이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여섯 글자를 보면 생조(生助)와 극설(剋洩)이 반반이네요. 여기에 월령(月令)을 얻지 못한 것을 고려한다면 다소 약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또 겨울의 기토(己土)이니 조후(調候)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면 온기라고는 일지(日支)의 사화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정황은 일지의 오화에게 향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군요. 조후를 겸한 신약용인격(身弱用印格)으로 답을 찾는다면 크게 오류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희신은 자수(子水)에게 극을 받는 사화(巳火)를 보니까 아무래도 토(土)가 급하다고 하겠네요. 토로 약신을 삼고 사화가 약하다고 보므로 지지(地支)로 들어오는 목(木)은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다만 천간의 목은 무토(戊土)를 극하므로 이로울 것이 없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사화(巳火)와 자수(子水) 사이에 완충작용을 할 조토(燥土)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추운 날에 등불이 바람앞에 노출된 형상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비닐카바라도 하나 만들지 않으면 위태로운 용신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3. 심리구조의 분석




심리적인 면에 늘 비중을 두고 연구하고 관찰하는 낭월입니다. 비록 심리적인 연구가 구체적으로 일의 길흉과 성패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원인을 규명하여 가노라면 심리적인 영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늘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종교적인 영향도 조금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一切唯心造)고 했으니 그 말은 만고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진 결과물로 논할 것인가, 아니면 만들게 된 상황으로 추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낭월은 당연히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고 답변을 드립니다. 왜냐면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지요. 음..... 말이 옆길로 새어 나갔네요....




이 사주의 주인공은 천성이 일지(日支)의 정인(正印)을 보고 따스한 수용성(受容性), 포용성(包容性)이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그리고 강한 겁재로 인해서 분발(奮發)심도 적지 않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것이 나쁘게 작용을 하게 된다면 흉한 결과가 되겠지만, 신약한 사주에서는 좋게 작용을 한다고 봐서 아마도 자신을 추스르는 효과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비겁통기론에 의해서 년간(年干)의 식신(食神)도 작용이 쉽게 이뤄진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을 향하는 마음으로 발현이 되겠지요. 뒤보다는 앞이 된다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년지(年支)로 비겁통기가 되어서 다시 월지(月支)의 재성(財星)으로 돌아온다고 하겠습니다. 결과물이 나타난다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그 결과물이 다시 일지를 공격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정리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결과로 인해서 자신의 수명의 근원인 사화를 손상시킨다’는 말로도 가능하겠습니다. 이러한 흉한 암시는 바람을 두려워하는 사화(巳火)의 보호벽 없음을 다시 염려하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시지(時支)에 조토(燥土)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고 하겠지요. 필요한 것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서 막아줘야 하는데 그 뒤에서 막아주는 것이야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해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신의 의식은 미래로 미래로 달려갑니다. 타고난 직관력으로 주변의 상황을 잘 살피게 되는 것도 한 몫을 하겠네요. 다만 사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 앞으로 가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는 것이겠지요. 왜냐면 앞으로 쏠려 있는 사주의 불안한 모습에서 그러한 조언을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보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내심(忍耐心)이 없나요? 관살(官殺)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하네요. 그렇다면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가고 브레이크는 없으니 과부하가 걸리게 될 가능성도 고려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주의 암시가 되시는 벗님이 계신다고 하면 없는 브레이크라도 만들어서 스스로 힘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상만사의 아름다움은 균형에 있으니 말이지요.




3. 대운과 세운의 상황




병화(丙火)대운이 들어오면서 환경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야말로 일지(日支)의 사화(巳火)가 천간(天干)에 투출(透出)된 느낌이기도 하네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길에 유감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세운의 상황도 살펴서 판단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대운만으로 봐서는 해수(亥水)를 넘긴 상황이므로 급격한 환경변화가 있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아울러서 이 운이 너무 빨리 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이러한 운은 적어도 30세가 넘어서 들어와야 하는데, 나이 열 여섯에 들어온 운은 자칫하면 세상의 험난함을 견디는 저항력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게 될 가능성을 염려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부잣집 아이는 환경이 나빠지면 견디지를 못하게 되지만, 빈촌의 아이들은 역경이 와도 꿋꿋하게 견디는 힘이 이미 어려서 단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에서는 너무 힘을 내지 말고, 조용하게 교사의 수업을 목표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사람에게 이러한 조언이 먹혀들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면 그 다음의 21세부터 술토(戌土)가 들어오는 것에서 절정이라고 봐도 좋겠습니다. 왜냐면 병이 있음에 약이 들어온 형국이니 그야말로 사주에서 염려하는 자수(子水)의 장애를 술토(戌土)가 막으면서 사화(巳火)도 보호하고 주체(主體)도 강화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운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 해석을 해보게 됩니다. 이상은 대운(大運)을 살펴서 확인할 수가 있는 해석으로 봅니다.




그럼 세운(歲運)은 어떤가요? 작년은 갑신(甲申)년이었습니다. 갑목(甲木)이 들어오게 되면 모든 일에 부담이 발생하게 되는군요. 무엇보다도 무토(戊土)가 견디기 힘든다는 것에서 안타까움은 더욱 심하다고 하겠고, 그래서 주변의 동료들이 모두 적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한 불안감을 동료들은 정상에서의 고독이라고 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지했던 동료들이 자신을 질시(嫉視)한다고 느낀다면 감성이 예민한 기토(己土)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래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은 갑목(甲木)의 정관(正官)은 합리적(合理的)이라는 것이지요. 주변을 살피면서 견디도록 노력하는 성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점은 많았지만 그래도 합리적인 생각으로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다가 아직은 술토(戌土)대운이 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한 가닥의 믿는 마음이 내부적으로 깔려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갑신(甲申)년을 버텨온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4. 을유년(乙酉年)의 상황




올해는요? 을유년(乙酉年). 을목(乙木)은 기토(己土)가 가장 껄꺼러워하는 글자입니다. 물론 ‘낭월이 기토라서 잘 압니다’ 라고 한다면 웃으시겠네요. 하하~ 그렇습니다. 갑목(甲木)이 들어오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불안감은 갑목이 기(氣)의 성분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을목(乙木)이 들어오게 되면 구체적으로 질(質)에 해당하는 성분이므로 현실적인 부담이 된다고 해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담감(負擔感)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도 어려서 인내심으로 단련이 된 사람이겠지요. 그렇지만 나름대로 순탄하게 진행을 하던 사람에게 들어오는 대운의 부담감과 세운의 부담감이 겹쳤을 경우에는 여간해서 벗어나기 어려운 고통을 줄 수가 있다고 봅니다. 자동차에 비유를 한다면, 브레이크가 없이 고속질주를 하던 차에 한 그루의 나무로 인한 충돌은 엄청난 충격을 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이 부드럽지만 비행기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과 같은 결과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견딜만 했던 을목(乙木)도 너무 힘들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억압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대운(大運)조차도 올해부터는 을목(乙木)이 들어오게 된다면 이것은 더 말을 해서 뭘 하겠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사람은 다 죽나요? 원 그럴리가 있나요. 여기에다가 각자의 개인 경험이 추가되겠지요. 그래서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에 올해 힘든데 어떻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면 올해는 휴식을 취하면서 기도를 하라고 권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유명인이 마음대로 기도하기도 쉽지 않지요.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을테니 말이지요. 그래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운명의 소용돌이가 되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올해만 버티면 내년에는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대운을 보면 지지(地支)로 유금(酉金)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대로 수세(水勢)가 강화되면서 용신은 더욱 힘들어 하겠지요. 갑신(甲申)대운인들 그냥 온전하게 넘어갈까 싶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의 암담함으로 인해서 택한 결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5.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 20년을 고생하고도 지금과 같은 영화가 없다면, 차라리 몸을 바꿔서 다시 태어나서 20년 후를 기약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면 너무 불교적인가요? 윤회를 전제로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실은 낭월은 그녀가 무슨 영화에서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아는 바가 없네요. 그래서 이름도 전혀 모르지요. 다만 뉴스를 통해서 보고서야 주홍글씨라는 영화를 최후로 마쳤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가능하면 논산 나가서 비디오라도 구해서 한번 볼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사람이 살다가 떠나는 것이 참으로 손바닥 뒤집기와 같다고 하는 고인들의 말씀이 종종 공감으로 다가온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벗님은요? 자살 충동을 받지 않고 일생을 살아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자살을 택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로 어우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낭월은 어려서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자살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더랬습니다. 요즘은 혹 재생이 불가능한 죽음의 병이 온 몸을 감싸게 된다면 이때야말로 뭔가 결행을 해야 할 시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야말로 안락사(安樂死)는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러한 점은 벗님의 생각도 같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을 살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내일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도 아닐 적에는 더욱 암담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죽음을 택하고, 더러는 입산을 택하고, 또 더러는 운명공부를 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택한 방향대로 진행이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이렇게 선택을 한 자신의 오늘을 사랑하고 더욱 노력하는 것이 자연과 조물주에게 최선을 다 하는 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의 선악은 내버려 두고서라도 여차하면 산으로 튀기라도 하는 것이 그래도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가 싶은 생각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벗님의 오늘이 건강하심을 축하드리겠습니다.




         2005년 2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