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영화(쉘위댄스&어둠속의댄서)의 소감.

작성일
2004-07-26 13:34
조회
6231
 


[제233화] 영화 두편(쉘위댄스&어둠속의댄서)의 소감.



 


지난 주말에는 밤이 늦도록 하는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끄지를 못했다. 그리고 어제 일요일 저녁에도 또 명화극장을 보면서 중간에 끄지를 못했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이 들어서 한담으로 끌어낸다.




1. 누가 그런 작품을 썼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것이 궁금했다. 아, 영화 제목은 ‘쉘 위 댄스’이다. 이미 보신 벗님도 계시겠지만, 낭월은 처음으로 그것도 주말의 명화에서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시작을 했는데, 이야기가 진행 되면서 흐르는 내용이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상세한 내용은 첨부한 네이버에서 얻은 자료를 참고하시면 되겠으니 생략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혹 보지 않으신 님은 보시고 나서 함께 생각을 해 보자는 말씀을 드린다.




작가 이름이야 아무렴 어떠랴, 중요한 것은 내용을 보면서 작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리고 춤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일에 대해서 혹은 한 가지에 대해서 그 정도로 몰두를 하는 정도라고 한다면 가히 미쳤다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장면장면마다 춤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애착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데, 연기를 하는 배우를 통해서 바라보는 초점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강력한 느낌을 줬다. 그래서 늦게까지 화면을 주시하게 되었는데, 낭월의 소감은 한 일에 그 정도로 몰두를 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연 낭월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자평명리학에 대한 열정이 그만 못하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리고 벗님의 사주공부에 대한 열정은 또 어떻신지 궁금한 것은 아무래도 걱정이 넓은(?) 넘의 천성인 모양이다. 그리고 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무슨 일에서나 미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이다. 모쪼록 그 작가가 춤에 대해서 미치듯이 사주공부도 미치도록 좋아한다면 사주의 좋은 점과 아쉬운 점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아직은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춤에 대해서 한번 미쳐버린 다음에 다시 정신을 차려서 관조하는 영역까지를 한 과정의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과정까지 완전하게 마치지 않으면 뭔가 덜 익은 세상에서 표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러한 사람은 중독자가 되어서 폐인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든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일러서 ‘반거충이’ 혹은 ‘반풍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완전한 영역까지 미쳐들게 되면 비로소 정답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타려면 완전히 타서 완전연소가 되어야 환경오염도 되지 않으면서 효율이 100% 살아나는 것인데, 불완전연소가 되어버리면 타다가 말아서 오염이 되고 보기에도 흉한 폐인의 모습이 되어버린다고 하겠으니 뭐든지 미칠 바에는 완전히 빠져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수행의 과정에서 얻는 소득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왜들 그렇게 미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변화를 희망하면서도 미지(未知)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이기고서 도전을 하게 되어야 비로소 답이 보인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씀이 된다.




‘쉘 위 댄스’를 보면서 작가의 그러한 모습, 그러니까 맹목적이면서도 또 어느 순간에는 숨고르기를 하는 것에서 수행자의 싸이클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봤는데, 벗님도 한번 보시면서 생각해 보시는 자료가 되시기 바란다.


 





2. 또 한 편의 음악 관련 영화




일요일에는 명화극장에서도 비슷한 테마의 영화가 방송되었다. 이름은 ‘어둠 속의 댄서’였다. 또한 미리 보신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낭월인 이제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슬픈 작가의 마음을 보았다. 전날 본 영화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는 음악에 연관되어서 너무도 슬픈 장면이 전개되는데, 또한 그것도 분명 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해서 아름다움의 극락세계를 보게 되고, 또 같은 음악을 통해서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바세계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두 사람의 작가가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겠다.




쉘위댄스는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회에 적응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으로 봐도 되지 싶다. 일본이라는 환경에서 잘 어울리는 주제라고 생각이 되기도 했다. 맘에 들거나 그렇지 않거나, 자신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갖고자 하는 동양적인 마음이 보인다고 해도 될 흐름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일에 미쳐서 몰두하게 된다면 가정이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현실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가 망설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이제 중년의 한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낭월의 마음에 그대로 부합이 된다고도 하겠다. 가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버리는 것을 깊이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작가의 나이도 아마 50 가까이 되어서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공의 나이를 봐도 그 정도인 것으로 봐서 자전적인 경험을 그 내부에 깔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반면에 어둠 속의 댄서는 아무래도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절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미국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슬픈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여성의 행위를 보면서 자유는 이미 사치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것도 또한 한 인생의 여정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마음으로 춤과 노래를 바라다보는 마음이 느껴진다.


 



 


3. 식상(食傷)과 관살(官殺)의 차이




그렇게 봐야 하겠다. 쉘위댄스가 식상의 관점으로 인생을 관조한다면, 어둠속의댄서는 관살의 관점으로 인생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식상에서의 관살에 대한 처리법이 쉘위댄스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관살에서의 식상처리법은 어둠속의댄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사주쟁이의 작가심리분석이다.




식상은 늘 감정적인 자신의 표현을 중시한다.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 것은 ‘식상생재(食傷生財)’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의 시점이 주어지게 되면, 관살보다는 식상의 방향으로 자신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가족을 버리고 수행자(修行者)의 길을 떠나는 붓다는 식상의 흐름으로 봐야 할 것이며, 그의 노력은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가 없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중간에서는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성공을 한 가출이었다고 해야 하겠고,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결코 이번 생에서 하고자 하는 것을 환경의 요인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서 다음 생으로 보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대로 추진하여 결과를 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류를 선도하는 다수의 성자(聖者)는 모두 이와 같은 방향으로 추진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성공을 하면 성인이 되고, 실패를 하면 별종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두를 걸고 한바탕 뛰어볼 준비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절반은 관살로 인성(印星)에 이어진다. 그래서 자신은 남들이 원하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많은 어머니들은 자신의 희망을 다음 생으로 미루고 자신에게 원하는 가족들의 희망을 따르기로 했을게다. 그리고 많은 인도의 하위계급층에 태어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이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성서러운 봉사가 되는 것이고, 삐따닥하게 말하면 현실안주형이라고 하겠다. 어느 관점으로 보거나 모두 같은 결과의 음양관(陰陽觀)으로 봐서 무리가 없을 게다.




이렇게 각자의 팔자에 나타난 암시대로 세상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고, 또 자신이 성장을 해온 환경에 의해서 현실을 관찰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것이 더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두는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가는 자신의 세계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에서 더 높고, 낮은 구분을 지은 것이며, 더 혁신적이고, 덜 발전적인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4. 낭월의 관점은 식상이다.




이렇게 남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동참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낭월은 미래지향성이 보수적인 성향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제의 흔적은 그대로 흔적일 뿐이고 오늘의 현실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책에서도 뭔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보이면 바로 수정을 하려고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어제의 생각이 기록된 자료를 보면서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 다시 새로운 내용으로 변경을 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얼마 전에 스티븐호킹 박사가 자신의 이론을 엎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그는 분명 학자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식상적(食傷的)인 사람임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어제의 생각에 연연하게 되면 새로운 오늘의 술을 담을 잔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의 술잔을 엎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쉘위댄스에서 고지식하게 직장만 다니던 모범가장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그 속에 빠져서 전철에서도 발이 움직이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인자가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 싹이 고개를 내밀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낭월도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어제의 삶을 살피는 것은 별로 큰 흥미가 없다. 그래서 상담자가 자신의 과거를 물어도 답을 하는 것에 별로 흥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상황을 살펴서 내일에 대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미 지나간 흔적을 알아맞추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면 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어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오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으며, 내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낭월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고 말한 데카르트와 라즈니쉬는 전적으로 옳았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문득 중노릇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되면 옷을 벗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중이 사주나 봐준다고 빈정거리는 말을 들으면 사실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가정도 훌쩍 벗어나서 방랑의 길에 오르고 싶은 생각도 불쑥 든다. 그러면서도 그냥 버티는 것은 아마도 정관(正官)으로 인해서 겠지만, 언젠가 마음이 동하게 되면 태풍의 소용돌이처럼 훌쩍 여행길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꾸 그러한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금년처럼 정관(甲木)과 상관(申金)이 같이 들어오는 갑신(甲申)년을 맞이하게 되는 해에는 갈등이 더욱 증폭되는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올해는 이성적(理性的)인 작용이 되는 성분이므로 그냥 견디겠지만, 내년에는 을유(乙酉)년이므로 감정적인 심리작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와중이기도 하다.




5. 최선의 길은 없겠지만.....




벗님의 오늘도 늘 새로운 나날이기를 기원드린다. 어제의 영향에 묶여서 자유를 버리지 말고, 오늘의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다 보면서 나날이 변화를 거듭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시기를 기원드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음양오행이 도움을 준다면 그대로 배로 삼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권장을 드리는 것은 주인장의 생각이 새로운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차제에 잘 알아 두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참고만 하시라는 말이다. ‘그 놈은 그렇게 말하더란다’는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오늘은 어떤 색깔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본 시간들이어서 벗님과 함께 생각을 해보시자고 한번 정리해 봤는데, 날이 덥다고 가을이 오기만 기다리시기 보다는 오늘의 관점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인지를 살펴보시는 것이 오늘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는 낭월이다. 참고로 아래에는 네어버에서 찾아 본 관련 내용이다.




           2004년 7월 2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




[쉘 위 댄스에 대한 자료들]


◎ 간단한 소개

일본 내에서는 220만 관객 동원은 물론 미국 190만 관객을 동원해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을 제치고 역대 일본 영화 중 흥행1위를 기록하였고 영국에서도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올린 쉘 위 댄스는 일본 열도에 한동안 '사교댄스 붐' 을 몰고 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아카데미상의 97년 외국 영화상을 제외한 공식 13개 부문상을 독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시코, 밟아버렸다로 92년 일본내의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평단과 관객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이 영화 쉘 위 댄스를 위해 조 감독에게 직접 사교 댄스 레슨을 시키는 등 영화에 대한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처음으로 사교 댄스를 배운 조감독 등 스텝들의 노력이 이 영화속에서 리얼한 댄스 연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 줄거리

스기야마 쇼헤이는 성실하게 가족과 자신의 생활을 구축해온 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는 회사에도 가정에도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전철 차창으로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댄스교습소에서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 마이의 모습을 통근 전철 차창으로 매일 바라보던 중, 스기야마는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발걸음은 댄스교습소를 향하고 그곳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같다.

얼떨결에 댄스교습소에 입회한 스기야마는 수다스러운 핫도리, 토요코, 뚱보 다나카, 자신과 같이 비밀리에 교습소에 다니는 회사 동료 아오키를 친구로 얻었다. 점차 댄스의 매력에 빠져드는 그는 아오키의 권유로 댄스홀, 댄스 파티에 참가하는 등 열을 올리고, 스가야마의 아내는 사립탐정을 고용한다. 스기야마는 마이에게 저녁식사를 제안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자 모멸감 때문에 더욱 댄스 에 열을 올린다. 그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던 중, 차갑게 얼어있던 마이의 마음도 차츰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신과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춤을 추어보고 싶었다"는 스기야마의 고백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마이. 스기야마를 통해 진정한 댄스의 즐거움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이는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토요코에게 스기야마와 함께 댄스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아오키, 토요코와 함께 맹훈련에 들어간다. 대회 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극한 긴장 상태에까지 다다른 스기야마는 젊은날의 청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플로어에 입장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춤을 보기 위해 온 아내와 딸을 보게 되고 깜짝 놀란 나머지 실수를 하여 토요코의 치마를 찢기게 한다.

대회가 끝난 얼마 후 마이는 영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고 마이의 송별회에서 스기야마는 그녀와 마지막 춤을 추게 된다.


◎ 정신분석적 측면의 감상

1. 스기야마와 마이의 관계에 대한 정신 분석

스기야마는 28살에 결혼하고 서른 살에 아이를 낳고 40살이 되어서 집을 갖은 정말 너무나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온 평범한 가장이다. 아이가 말썽을 피우는 것도 아니요, 아내와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스기야마는 생활의 활력이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이건만 목표점이었던 집을 구하고 나서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그에게 나타난 것이 댄스 교습소의 마이였다. 지하철의 차창밖으로 보이는 교습소의 창문에 나타난 마이의 얼굴에서 스기야마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호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가정을 가진 그가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게 그 정도로 호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마이 또한 블랙풀에 대한 자신의 목표를 상실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그런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고, 평소 매우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의 행동력을 발휘한 것에 대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이에 대한 관심을 고백하고 마이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스기야마는 자신의 새로운 목표점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이대로 다시 아무런 의욕도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의 목표점을 찾을 것인가의 기로에서 스기야마는 마이의 삶의 목적이었던 사교댄스를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음으로서 이때부터 스기야마의 마이에 대한 감정은 전과 전혀 다르게 변화된다.

2. 아오키에 대한 정신분석

스기야마와 같은 직장을 다니는 아오키는 대머리에다가 정보통신부에 있으면서도 컴퓨터의 윈도우조차 모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다. 그런 그를 다른 사람들은 왕따를 시키게 되고 그에게 있어 그런 괴로움의 탈출구가 바로 사교댄스였다. 직장생활에서의 그와 춤을 출 때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가 그의 긴 가발이고 후에 대회에서 그의 가발이 벗겨지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가발을 벗고 춤을 출 때 비로소 그는 그 의식의 양면성을 극복하는 게 아닐까 싶다.

3. 토요코에 대한 정신분석

젊었을 때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쓸쓸히 살아온 그녀에게 사교댄스라는 건 그녀의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열정으로 인해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하는 그녀.. 남에게 친절하지 못한 건 남편의 죽음에 대한 세상에 향한 분노일지도 모른다.


◎ 맺음말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대한 목표가 없다면 그것은 끝없는 공허함을 주고 다른 돌파구를 찾게 되기 마련인 것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적인 돌파구가 바로 사교댄스이고 이것은 그들의 생활에 활력과 평안함을 안겨 준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아오키와 토요코가 서로의 빠진 부분을 매울 수 있음을 알고 맺어지길 바랬지만 그렇게 전개되지 않아 아쉽다.내용출처 : [인터넷] http://kkucc.konkuk.ac.kr/~ucjeong/


=======================================================




[어둠 속의 댄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에 이어 '선의(Golden Heart)' 3부작을 이루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 비극적인 멜로 드라마와 헐리웃 뮤지컬의 형식이 결합된 이 작품 역시 평론가들을 찬반 양론이 있었다. 2000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여우주연상 수상. 2001년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음악상 노미네이트. 2000년 유럽영화제 작품상, 여우주연상, 관객상 수상. 2000년 아이슬란드 필름 &텔레비전 아카데미 어워드 올해의 배우상 수상. 2001년 그래미어워드 베스트 팝연주상, 베스트보컬상 노미네이트.

  체코 출신의 이민자인 셀마는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 뮤지컬에 쏟는 열정과 애정만이 그녀에게 답답한 삶으로부터 위안을 제공해준다. 셀마에게는 홀로 간직해 온 비밀이 있는데 그것인 즉 그녀가 이제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리라는 것. 게다가 그녀의 아들 진 마저도 곧 수술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밟게 될 처지다. 아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그동안 아무도 몰래 돈을 모아왔던 셀마. 이 문제로 이웃 경찰관 빌과 다투던 셀마는 그만 빌을 죽이게 되고, 그녀의 삶은 비극적인 드라마를 향해 치닫게 된다.

  이 영화는 제작부터 상당한 잡음이 있었다. 특히 주연 배우 비욕과 트리에 감독간의 마찰이 심해서, 두 사람이 싸우고 나흘동안이나 촬영장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비욕이 의상을 찢고 비디오 모니터를 박살냈다는 소문도 있었으며, 두 사람이 주고받는 욕설과 비난이 언론에 퍼지기도 했다. 비욕은 칸 영화제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으며, 이때 트리에 감독은 기자들에게 "비욕과 함께 일한 것은 멋진 경험이었지만 되풀이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인, 제작비 1,500만 달러에 디지탈 카메라 100대가 동원된 이 영화는 뮤지컬도 섞여있고 여기에 영어로 제작되었다. 순수 서약인 도그마 95를 완전히 배신한 것은 물론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촬영이 진행된 후, 칸느 영화제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관객의 반응은 완전히 양분되었다. 평론가들도 이 영화가 사람에 따라 아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인정했으나, 역시 극단적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영국 옵저버의 필립 프렌치는 "어떻게 이 지루하고 진부하며 쓸데없는 영화를 보고 감동받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불만을 표시했고,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 역시 "뻔뻔하고 억지스러운 멜로 영화이며 그 비극은 거짓에 불과하다... 가장 얄팍하고 조잡하게 눈속임하는 영화이며, 플롯은 순진하기 짝이 없고 어설프며, 여주인공 비욕이 지어보는 다 아는 척 백치같은 미소도 거슬린다. 이 여가수의 징징거리고 앙앙대는 소리는 반경 10Km 이내의 우유팩을 모두 응고시키고도 남을 정도다"라고 결정타를 날렸다. 반면,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퍼스는 "진정 흥미로운 영화 만들기의 사례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소개했으며,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리사 슈워츠바움도 A 등급을 주며 "놀랍고 훌륭한 뮤지컬 멜로 드라마... 도그마 선언을 탈피함으로써 스토리텔링의 신선한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극찬했다. 로저 에버트 역시 "영화의 벽을 허물고 그 근원으로 돌아간 영화"라고 정리하며 별 세개 반의 후한 점수를 줬다. 칸느 이후 9월 뉴욕 영화제에 소개때, 살롱 닷 컴의 평론가 스테파니 재커렉은 "인생이 그렇듯 영화를 만들 때도 서툰 솜씨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오만이 겹치면 절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폰 트리에를 공격했다. (필름 2.0 특집 기사 참고)

  감독의 변 - "이 영화는 뮤지컬 장면과 다큐멘터리라는 서로 다른 두 '모습'을 한데 담고 있다. 나는 뮤지컬 속에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도입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뮤지컬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온 발상이다. 나는 어떤 것도 전복시키거나 파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감정적인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뮤지컬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또한 뮤지컬 같은 장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라스 폰 트리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