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공(空)이 이런 것이려니......

작성일
2004-07-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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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2화] 공(空)이 이런 것이려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니 그 공이 도대체 뭘 하는 공인지,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나날이다. 때로는 또 심심하여 뭔가 재미있는 꺼리가 없을까.... 싶을 적마다 또 생각을 해보는 물건이지만 답은 늘 빙빙 돌아다니다가 제자리에 오는 자신만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문득 방문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혹 이렇게 설명을 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근시치가 되려나 싶어서 정리를 해 보는 낭월이다.




1. 사진사의 생각




사진사는 그 생명이 필름에 있다. 필름이 없다면 있으나 마나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름을 아끼고 또 아낀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필름은 어때야 할까? 아마도 필름의 면은 텅 비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 것도 그 안에는 없어야 한다. 점이든 꽃이든 미녀이든 필름에 뭔가 있으면 이미 그 용도는 상실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상태가 사진사가 생각하는 필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우리가 공의 상태라고 한다면 말이 된다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야말로 텅 비어서 일점의 흔적도 없는 상태를 말이다.




혹시 ‘공=아무것도 없음’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야 하겠다. 공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득한 그 무엇을 일러서 공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필름에는 감광판(感光板)이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치밀하고 공간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 존재는 바로 감광판이다. 입자는 치밀한 것부터 거친 것이 있다는데, 말만 그렇지 눈으로야 봐서 알겠는가 싶다. 100이니, 200이니, 400이니 하고 표시를 하는 것으로 봐서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바로 공의 상태라고 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필름이 없는 카메라가 아니고, 필름에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비닐조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꽉 차 있는 그것을 공이라고 해보자는 생각이 든다.




2. 검객의 생각




무술영화를 한번 봐야 하겠다. 얼마나 시원한지 자신이 끝없는 허공을 한 마리의 가벼운 나비처럼 나폴나폴 날아다니는 와호장룡(臥虎藏龍)처럼 그렇게 최상승의 경공술을 발휘하는 고수들의 모습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데 그 고수들이 생각하는 공은 무엇일까? 칼을 휘둘러서 나무를 자른다고 생각한다면 그 칼은 나무에 박히게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덜고수의 수준일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진짜고수는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까지도 모두를 베어버릴 것이다. 그냥 혼자의 상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바위든 나무든 사람이든 머리카락이든 모두가 한 칼에 잘려 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공중에서 도약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아무 것도 없지만 그 가운데에는 가득한 그 무엇이 있음으로 그러한 경공술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이라고 하는 상태를 공이 아닌 상태의 공으로 이해를 할 적에만 가능하다. 범부는 공을 완전하게 텅 비어버린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에 깡총 뛰어봐야 그대로 되돌아 자기 자리인 것이고, 고수는 공간의 그 무엇을 알기 때문에 허공을 날아 다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 봤다.




3. 조치훈의 생각




바둑을 두는 사람을 대표해서 그를 떠올려 봤다. 그의 생각으로는 바둑판이 어떻게 보일까? 그의 말에서 생각나는 것은 정석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둑을 좀 배워보려고 해도 정성을 알지 않으면 3급의 벽을 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지레 포기를 한 낭월이다. 그만큼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석인데, 조치훈은 그 정성을 얼마나 많이 배웠을까를 생각해보게 되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의 말로는 아마추어들이 오히려 정석을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그가 생각하는 대국장의 바둑판 앞에서 상념의 상태는 아마도 정석도 포석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냥 바둑판만 존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허공에 점을 하나 찍는 기분으로 돌을 한 덩어리 내려놓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주의 기계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공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이 놓이기 이전의 상태는 바둑을 이겨야 하겠다는 생각도, 상대방을 이기려는 전략도 없어야 하는 것이 진짜 고수일 것이다. 그렇게 상대가 응하는 대로 동하는 것이 진정한 바둑의 고수가 아닐까..... 그와 같은 깨달음을 20대에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해 본다.




4. 사주쟁이의 생각




어떤 사주쟁이는 사주를 하나 보고 나면 그 사주의 그림이 한 달 동안 잊혀 지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대단히 탁월한 능력으로 생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좀 더 세월이 흘러서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아직도 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낭월도 그러한 시기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며칠 동안 떠올라서 이런저런 대입을 하면서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나서 그런가보다 싶다.




그런데, 방문을 해주는 사람도 그렇다. 자신의 사주에 대해서 오래도록 기억을 해주고 잇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낭월은 나름대로 공부가 상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주를 기억하는 정도가 적어도 일천 개는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주도 그 안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전화를 하면서 그런다.




“한 달 전에 의뢰했던 아무개입니다. 사주 기억나시죠?”




정말 민망하다. 한 달 전의 사주를 기억하다니.... 그런 천재가 어디 있겠는가 싶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5분 전에 본 사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경험을 자꾸 하게 되면서, 문득 이러다가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증세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아서 참 고민이다. 그리고 어떤 사주를 대하면 어떤 선생은 그와 유사한 자료가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장관이라고 하면 이 사람의 사주도 장관 사주라고 하는 선입견이 생긴다는 말도 한다. 그런데 낭월은 그러한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고, 오로지 앞에 놓인 사주만 보일 뿐이다.




방문자가 찾아오면 무엇 때문에 왔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물어보고 목적에 대해서 비로소 사주를 놓고서 답을 찾아가게 되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것은 바보의 사주궁리법이라고 하면서도, 한편 생각을 매우 좋게 해보면, 나름대로의 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람이 앞에 앉아서 사주를 적어 놓고 나서야 비로소 공에 일점이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하겠고, 그 시점에서부터 해석의 실마리가 가동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주객 간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객이 떠나고 나면 그를 전송하면서 사주도 함께 보내버리는 모양이다. 돌아서면 사주는 잊어버리고 다시 텅 빈 공간의 상태가 됨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공과 비교를 해볼 것이냐는 궁리를 해봐야 하겠는데 이야기는 간단하다. 다시 필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천간지지의 온갖 생극변화가 머리 속에서 필름처럼 저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나무라거나 불이라거나 하는 형상이 아니고 그냥 원형그대로 존재인 모양이다. 그러다가 하나의 돌(예컨대, 사주팔자 한 명식)이 날아들면 그 순간에 갑자기 기관이 작동하듯이 그렇게 움직여서 처리를 하는 것이 사주팔자를 풀이하는 것과 필름의 공 상태와 많이 닮아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단 사진이 찍힌 필름은 버려버린다. 그것을 다 쌓아 놓게 된다면 아마도 창고는 이내 넘쳐버리고 말 것이다. 다행히 디카처럼 그렇게 사용하고 나서는 바로 지워버리는 것이 뇌의 상태가 아닌가 싶어서 연결을 시켜 봤다.




음양오행의 이치가 원형으로 저장이 되어 있는 상황이 바로 공의 형상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는데,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이미 그 가운데에는 모든 상황을 반추할 자료들이 원자의 형태로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존재하는 것이 공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보이지도 이름 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 있으니 이름 붙이기를 ‘부처’니, ‘견성’이니, ‘창조주’니, ‘공’이니 하는 이름들로 매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망상들을 해 봤다.




언뜻 생각하면 마치 도인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또 천만의 말씀이다. 때로는 그렇다고 봐야 하겠고, 또 다른 경우를 접하게 되면 3일이든 4일이든 마음을 놓지 못하고 궁리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을 보면서 아직 도인은 아니고 나름대로 공부는 되어가는 상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은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5. 모든 것을 다 지울 수가 있을 때.




그러한 때가 온다면 비로소 허공(虛空)과 하나가 되고, 우주(宇宙)와 하나가 되며, 자신의 내면과 외면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해 본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하실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펴 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뭔가 기약이 없는 터널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아시는 바가 있으면 메일로 한 수 지도 부탁드린다. 낭월의 생각으로는 점점 소유하는 공간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그만큼 빈 공간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공상을 해 보는데 이것이 잘 하는 것인지 그것을 증명해줄 분이 계시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컴퓨터 하드 정리나 해야 할까보다. 진작에 그 생각이나 할 것을 허허허~




         2004년 7월 9일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