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간절한 기도와 절대자의 존재

작성일
2004-06-2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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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1화] 간절한 기도와 절대자의 존재




‘故 김선일 님의 명복을 빕니다’




모두의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점점 의혹과 혐의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도 요즘의 모습이다. 벗님도 모두 알고 계시는 내용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다.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게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잠시 생각을 해본다. 물론 혼자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의 진지한 삶의 현실을 생각하신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보자고 해도 좋겠다.




1. 정치 이야기는 않을 참이다.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그 들이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간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말을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권투를 보면서 팬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야, 배를 쳐! 머리는 막아! 저런!! 에구 멍청한 놈, 그러니까 얻어맞지~~!!”




이렇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어느 부분의 프로였다. 전문가의 부와 명예를 건 한판 승부에서 아마추어 팬들은 그렇게도 코치를 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그냥 ‘힘내라’ 정도가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말을 보면서 대통령이나 기타 모든 관련자들은 말 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만 할 참이다. 추측을 하지 말라는 것도 성현의 가르침이니 말이다.




남의 가정에 대해서도 그렇다. 남편의 말을 들어보면 아내가 문제인 것 같고,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남편이 문제인 것 같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도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담실에서 부부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낭월의 소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공동책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만 죄를 물을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2. 죄가 없는 사람도 죽을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심판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고 공이 있으면 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배워온 선악론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입만 열면 말하는 인과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목격하고 느끼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적에, 이러한 말은 다 믿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팔자가 좋으면 마냥 좋기만 하느냐는 말에 대해서도 해당이 된다. 팔자가 좋은 사람도 일찍 죽고, 팔자가 나쁜 사람도 오래 산다. 그래서 세상에 절대적인 법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법회 시간에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이야기 할 때, 어느 신도가 하신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어떻게 못되고 험상궂은 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떵떵거리고 살며, 착하기만 한 이웃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궁핍을 벗어나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이다. 아마 벗님도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셨을 것이다. 불교에게 이 문제를 다시 질문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을 한다.




‘선한 사람도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고통을 받는다. 악한 사람도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으면 악인은 고통을 받는다. 선의 열매가 익으면 복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열매가 언제 익느냐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겠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시간적으로 명쾌한 설명이 없다. 어쩌면 영겁의 세월 속에서 본다면 시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나중에 복을 받는 것이 맞기는 맞을까? 그냥 위정자들이나 종교인들이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 여러 생각들이 맴돈다. 왜냐면 현실에서는 도무지 증명이 되지 않는 주장으로 혹세무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니 말이다. 아마도 종합적인 관리자에 해당하는 신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맴돈다.




2.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그야말로 철학자가 늘 문제로 삼는 명제이다. 신이 존재하는가? 물론 종교인에게도 늘 묻는 말이기도 하다.




‘스님, 신(혹은 부처)이 존재합니까? 그리고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증명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전지전능의 절대자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해 주실 수가 있습니까?’




물론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을 할 것의 존재가 그리 많이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쾌한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낭월도 어차피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보시리라고 본다.




기도를 하면 영험을 얻는다. 이것은 틀림이 없다. 낭월도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부정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영험의 배경에는 절대자의 존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실은 여기에 대해서 과연 그렇다고 단언을 하지 못하겠다. 요즘 드는 생각은 자신의 소원을 자신의 염력으로 스스로 이뤄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실로 각기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지만 소원을 이루고 말고는 대체로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고가 되는 것을 보면서 신의 존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각각 자신들의 신이 그렇게도 많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3. 분명히 존재한다면.......




예전에 풍수지리의 전문가를 왕이 불렀다고 한다. 과연 죽은 조상의 뼈가 자손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왕이 던졌다. 과연 왕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풍수선생은 그렇다고 답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왕은 그의 부친을 잡아다가 뼈를 부스러뜨리고 고문을 한 다음에 다시 풍수사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의 기분이 어떤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이 무엇을 생각했을지는 생략하거니와, 적어도 그 왕은 올바른 답을 알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을 했던 풍수사는 봉변을 당했다. 그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그런데에도 사람들은 정확한 답을 원하고, 그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는 강박관념으로 쫓기는 것도 전문가의 고뇌이다.




사주쟁이에게도 묻는다. ‘모든 사람은 팔자대로 삽니까?’ 당연히 사주쟁이라면 그렇다고 말을 하고 싶다. 그런데 실제로 임상을 하면서 반드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음을 늘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명확하게, 과연 그렇다고 말을 할 수가 있다면, 아마도 팔자가 같은 사람은 모두 같은 삶(100%)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일란성 쌍생아의 경우에는 이러한 비교를 하기에 더욱 분명하다. 그래서 명확하게 팔자대로 산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낭월의 소견이다. 그리고 사주광신도가 팔자대로 100% 살아야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다시 낭월은 그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1970년 9월 13일(양력 혹은 음력)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죽었습니까?”




이렇게 되고 보니 또 같은 동업자(?)들이 낭월을 비난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무슨 사주쟁이라고 나서느냐는 것이다. 물론 실력이 없는 것은 사실인갑다. 도무지 명확하게 사주대로 산다는 단언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치를 할 사람과 학자를 할 사람이 명확하게(100%) 정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해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말을 못하겠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사주의 작용도 있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환경적인 요인과 선천적(유전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단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공부를 더 해서 명확한 사주쟁이가 될 생각이 없느냐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공부를 여태 하기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절대적인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이 사주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앞으로도 한동안 이와 같은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이 팔자대로만 산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 알아낼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기도를 하면 소원이 반드시 이뤄집니까?’


‘부적을 쓰면 반드시 집이 팔리겠습니까?’




질문자는 늘 확실한 답을 원한다. 그렇지만 낭월은 늘 경험한다. 그렇게 확실한 답을 해줄 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4. 공자님이 옳았을 것이다.




요즘 하는 생각이다. 공자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냥 사람으로 사람의 윤리를 지키면서 살아갈 것을 권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전에 어렸을 적에는 그 말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속물의 발상이라고까지 생각을 했었고, 많은 절대자의 신봉무리들은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런데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보니 과연 공자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자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 당시는 춘추전국시대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목소리 큰 놈이 최고이고, 긴 창을 든 놈이 최고인 시대였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었겠는가 싶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노라면 선악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신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했을 법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도 신에게 기도하라는 말은 없다. 속박을 벗어나서 자유로이 살라는 말은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신을 믿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열등한 수준이어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근데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말이 있다. 근대의 어느 철학자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멋진 말은 남겼다. 자연과 사람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겠고, 절대적인 존재의 신은 없다고 하는 말과 서로 통하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면 부처는 신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다만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그러한 것을 기준 삼을 자료가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 다만 그의 생각이라면 역시 절대적인 존재는 없는 모양이다. 속박을 벗어나라는 말은 많이 보이는데, 절대자에게 모든 권한이 달렸다는 말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김선일씨의 비디오를 보면서 또 그러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신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있다고 하면, 그는 죽음에서 풀려나야 한다. 왜냐면 그는 원래 착한 사람이고, 죄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도 나중에는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물은 그의 기도를 외면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신의 큰 뜻을 누가 알겠느냐고 한다면 또 분명하게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벗님이 생각이 있으시다면 한번 곰곰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그가 원한 것은 신의 위대한 사업이 아니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보다 더 간절한 기도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은 정말로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혹 낭월이 불교인이라서 다른 종교인을 폄하하기 위해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그가 불자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분명히 드린다. 혹 어떤 광신도적인 불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서, ‘그가 불자였고, 그 시간이 관세음보살을 염했다면 그는 살아났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또 그를 잡아 가두고 그와 같은 경우에 처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난다. 아마도 결론은 모르겠지만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혹 종교가 다른 분들도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 이렇게 낭월은 절대적(혹은 맹목적)인 종교인들에게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믿음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증명을 해주지 않으니 그냥 막연하게 속는지도 모르면서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그렇게 살아가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사람의 소원을 이뤄준다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못 믿는다.




5. 옴마니반메훔을 하면 소원을 이룹니까?




옴마니반메훔은 최고최선의 주문이라고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해본다. 그 말이 가장 올바른 진리인가 하고서 말이다. 달라이라마가 떠오른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도록 오로지 옴마니반메훔으로 삶을 시작하고 마친다. 그렇다면 그들의 소원은 모두 한 순간에 이뤄져야 납득이 된다. 김선일씨가 혼자의 기도여서라고 한다면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한국민이 모두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고 봐도 되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달라이라마와 모든 티베트인들이 오로지 조국이 중국으로부터 해방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옴마니반메훔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벗님이 알고 계시는 대로이다. 그래서 또한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옴’의 말이 위대하다는 말도 한다. 'aum'은 우주의 소리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그 말도 못 믿겠다. 그 말을 믿게 하려면 중국에서 이미 해방이 되는 티베트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리한 요구라고 하실 벗님은 계시지 않을 것이다.




6. 그럼 무엇이 절대적 진리냐?




물론 낭월도 여기에 대해서 답을 찾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찾다가 세월을 다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도인을 발견했다. 그는 데카르트이다. 그의 노력은 참으로 진지하고 순수하며, 사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낭월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 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이다. 라즈니쉬의 말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인식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라는 것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은 지금 여기에 머물라는 말들이 공감으로 다가온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째깍거리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의 한담은 이렇게 끝을 내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의 사념(思念)이 내일을 만드는 시작이 된다는 것은 비교적 믿는 편이다. 벗님의 오늘은 무엇을 생각하시는가? 지혜로운 생각으로 번뇌가 없는 내일이 준비되시기를 기원드린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